숲과 바다와 달과 향/임혜신 시 해설

2009.09.05 14:51

김남석 조회 수:761 추천:31


북 리뷰, 숲과 바다와 달과 향 / 임혜신의 시




김남석







현대시 리뷰 /서평 08/01
임혜신 시집 [환각의 숲]

숲과 바다와 달과 향

김남석

1. 숲: 세상의 바깥

    임혜신 시집의 제목은 [환각의 숲]이지만, 시집 어디에도 [환각의 숲]이라는 시는 없다. 대신 [밀항자]의 마지막 연에서 밀항자가 스며든 숲이 "환각의 숲이었다"라고 말해지고 있을 뿐이다. 시집 제목을 짓는데 규칙이 있을 수 없고 시집 체제 역시  시인의 의지에 달렸다고 해고 이것은 약간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통상적으로 [환각의 숲]에는 [환각의 숲]이 있어야 하고 그것도 중요하고 대표적인 시로 존재해야 하건만, 이 시집은  통상적 관행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환각의 숲'이라는 주장은 인상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육성으로 '환각의 숲'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어보자. "폭풍 치는 바다에서 죽어 가는 자를 건져내/생선죽을 먹이고/ 쓰러진 희망을 다시 살려낸 것은/바로 저 무섭고 고요한 " 숲. 이 숲을 시인은 "환각의 숲'으로 명명한다. 삶의 고비는 종종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빗대어진다. 이러한 관행은 근대문학 초창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에 해당한다. 우리 문학의 소중한 자산인 김우진의 [난파]는 삶의 터전을 바다에 삶의 역경을 난파에 비유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임혜신의 '폭풍 치는 바다" 역시 생의 한 모퉁이에서 만난 간난신고(艱難辛苦)의 비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숲의 존재유무로 인해 임혜신의 "조난자'는 김우진의 '조난자' 와 다른 길을 걷는다. 임혜신의 시는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숲"은 시인에게 이러한 간난신고를 넘을 힘과 양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희망의 서식처로 인지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숲"의 희망이 아니, "환각"을 말하고 있는가,
    임혜신의 시집을 조망해보면 넓은 면적이 울창한 숲으로 덮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시를 읽는 것은 시편들고 조경된 수목원을 거니는 느낌을 준다. 그 숲은 아릿한 정취를 품게 하는 '사라진 스윗베이나무숲'이기도 하고 "하찮응 일로 늦도록 싸우던 날 베개만 끓어안고" 갈 수 있던 가까운 뒷 숲이기도 하고, 관심을 갖고 지켜 본 '백 하고도 몇 치"나 되는 나무이기도 하고 " 신문지에 둘 둘 말린 채 내게 건네 지"눈 국화꽃 다발이기도 하고, 거리 한 모퉁이의 흔하디 흔한 가로수 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합쳐놓은 세상 바깥의 별유천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숲은 시인에게 마음의 안식처이자. 세속의 바깥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임혜신은 틈만 나면 숲을 찾고 그 숲의 흔적을 길거리와 도시의 모퉁이에서 발견하려 하고 또 언어로 옮겨와 우리에게 그 평온함을 전달하려 애쓰는 것 같다. 그녀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대도시의 풍광에서 해방되어 청량한 느낌을 선사 받게 된다. 더구나 그녀가 묘사하는 숲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배어 나오는 공간이어서 낯선 느낌마저 덤으로 전해준다. 이러한 숲의 모습과 정취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인은, 숲이 마음의 안식처라 해서 숲을 아름다움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숲의 안온함에 무조건 자신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의 임혜신의 시에서 숲을 한층 의미 있는 모티프로 격상시키고 시의 현실적 응전력을 확보하게 하는 이유이다.


그 숲을 나는 세상으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은
것도 실상 착각이었는지 모르지요. 어차피 깨어날 바에는 크고 검푸른 알속
에서 깨어나느니 밖으로 빨리 나와서 깨어나는 것이 좋았습니다
----[깊고 푸른 숲 속의 그들] 부분

숲이 좋기는 하지는 숲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영원히 숲에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숲을 보고 난 이후에는 돌아가야 할 세상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숲이 삶의 터전으로 기능 하는 순간은, 세사의 삶에 지쳐 세상 밖으로 쉬러 왔다가 가는 잠시 뿐이다. '숲의 환각'이란 아름답고 평온한 숲에 영원히 머물고 싶지만 또 삶의 활력소와 희망의 온상지인 숲이 세상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지만 , 그럼에도 숲에서의 삶과 세속에서의 삶이 엄연히 별개라는 깨달음에서 온다. 하루 일과표가 필요하고 지난달에 영이 엄마가 죽고 엊그제 잔 아저씨가 죽어간 곳은 숲이 아니라, 세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숲은 세상의 안쪽이 아닌 바깥에 위치하고 또 그러해야 한다.

II 바다와 달 : 세상의 모습

    임혜신의 시제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질료가 바다와 달이다. 두 질료는 서로 어울려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모래벼룩]에서는 이러한 어울림을 " 다리를 나무 그늘처럼 드리운 채 바다 속에 달빛이 누워있다"고 감미롭게 노래했고 [작은 방]에서는 바다와 달의 이미지를 "가슴 가득 달빛을 담은 작은 방/깊숙이 뿌리를 드리우는 수련처럼/잠든 것들의 수면에 파도 친다"는 미묘한 표현 속에 삼투시켰다. 바다와 달의 겹침 효과는 정서적 감회를 고조시키거나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 안 에 담겨 있어야 할 삶의 체취를 상대적으로 희석시키곤 했다.
     바다와 달이 어울려 삶의 자국을 짙게 배어 나오게 한 작품은 [바다 위의 달]이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구원을 포기한 늙은 등대를/순례자처럼 따라가는 저 순한 바다의 내면을 봐/ 길 없이 휘어져 뻗은 검은 물 속을/ 달빛 지팡이 짚고/ 그 노인 홀연히 앞서 가는데." 이다. 여기서의 노인은 "몇 년 전 내 마당에 뗏장을 깔던" 노인이다. 이 노인은 주름투성이의 새까만 얼굴을 하고 시인을 찾아왔고 그 얼굴 위에 드리워졌던 신산한 삶의 표정과 불안을 전해주었다. 새카만 얼굴은 어둠이 내린 바다의 색조를, 주름 깊숙이 만들어진 피부 고랑은 물비늘을 닮아 있다. 어둠이 깔리면 바다는 청명한 파란색에서 음험한 검은색으로 바뀌고 물비늘이 더욱 두터워진다.  그리고 [밀항자]에서처럼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위험을 몰고 온다. 임혜신은 여러 시에서 어둠에 대한 불안 내지는 기피 반응을 드러내곤 했는데, 바다 역시 어두운 색조를 띄는 순간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공포의 바다에 "순례자"의 길을 만들고, 바다의 내면을 순하게 가라앉히는 것도 달이다. 물비늘로 현란한 바다 위에 길을 그어, 초라하고 무서웠던 노인을 인도해 가는 것도 달이다. 이처럼 바다는 응집된 삶의 공포가 도사린 터전이고, 달은 바다라는 터전 위에 안정과 미래를 가져오는 존재이다.
    바다와 달의 어울림은 어둠과 빛의 대조로 정리된다. 그리고 어두운 바다 위를 비추는 한 조각 빛은 험난한 삶과 미약하지만 소중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그 의미망이 증대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원은 절대자로부터 나오는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험난한 삶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서 얻어내는 성취된 목표에 가깝다. 그 것이 세상에 대한 조금 확장된 깨달음이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임혜신의 시중에서 인상깊게 본 시는 [밝은 아침]이다. 이 시는 밤바다의 공포와 달빛의 구원을 세상의 자리로 옮겨오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절대자로 보이는 '당신'에게 묻는다. 깊은 어둠이 사라질 때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사라지는 어둠의 틈 사이로 당당한 빛과 함께 등장하는 저들이 누구냐고, 허물어진 건물에서 기어나오고, 공사장근처에서 서성이고, 주인을 기다리고, 쓰레기 흐트러진 골목으로  개의치않고 접어드는 장삼이사(張三李四) 들이 도대체 누구냐고. "머리핀에 새셔진 호랑이와 꽃 잿빛으로 바래어 가는 중국인 웨이추레스도, 그녀를 기다리는 열 살 짜리 소녀, 소녀가 홀로 TV를 보는 빈집도, 빈집에 새벽까지 서성이는 불빛도, 불빛을 삼키는 낮은 안개도" 사라지는 어둠과 관련이 있느냐고.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또한 생명의 허물이니라
허물들이 어둠을 나누어 지니고
여기 저기 흩어졌으므로
찬란한 새벽이 온 것이니라

---[밝은 아침] 부분


    "당신"은 대답한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허물"이라고. 허물은 나날의 생존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각질화된 피부조직이거나 성장을 위해 벗어 던져야 하는 껍질이다. 이들을 나날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노동하는 존재이고 끊임없이 성장을 꿈꾸는 존재이다. 시에서는 이들이 노력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고 말한다. 원래대로 말하면 이들은 새벽과 함께 자신의 일터로 나가데 되어 있는 사람들인데, 시인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의 참모습을 깨닫게 된다. 우리 세계의 안정과 밝은 미래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그토록 난감하고 공포스러운 어둠이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저 날라진다는. 밤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달과 같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 이들이었던 것이다.

III 향 : 시의 향기와 음향

    임혜신의 시 갈피에는 향그러운 향(香)과 청량한 향(響)이 함께 피어나고 있다. [라벤더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보면, 라벤다향기를 네 가지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하나 열거하면, "안개를 품은 햇살처럼 깨어나는 첫새벽" " 발 끝에 와서 감기는 숲 사이로 난 오솔길" 꽃잎보다 부드럽게 열려있는 창" "부서져 가장 밝은 빛으로 노래하는 풀벌레의 혼"이다. 이 네 가지 비유는 소리의 울림도 좋고 그 안에 담긴 뜻도 좋다. 싱그러운 단어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표현어구들이다. 또한 피부를 상큼하게 자극하는 첫 새벽만큼이나. 산책의 설레임을 일깨우는 오솔길만큼이나, 누군가의 방문을 절실하게 기다리게 만드는 편안한 창만큼이나. 무균질의 아름다운 음악만큼이나, 어디에선가 날아오는 라벤다향기의 독특한 인상과 질감과 정서가 잘 우러나온 표현인 것이다. 이처럼 라벤더 향기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깨어나게 하고 기분 좋게 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라벤더 향기는 문학, 특히 시의 인상과 닮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 역시 지친 삶에 자극과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새벽송]을 보면 소리에 대한 독특한 비유가 빛나고 있다. "은어의 비늘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어둠을 휩쓸어가던 햇살/새의 울음이 하늘로 솟아오르고"가 그것이다. 햇살의 도래를 경쾌한 소리의 울림으로 파악하고 그 경쾌함을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의 비늘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찬 움직임 곁에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내려놓는다.  필자는 "새의 울음이" 다음에 '되어'를 넣어 해석하고 싶은데, 이 것은 은어와 햇살과 새 소리의 유기적 어울림이 보다 큰 시적 탄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망고 먹는 노동자]에서는 "삶이란 때로 이처럼 감미로와요"라는 이웃의 대화음을 그대로 녹취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임혜신은 많은 빈도는 아니지만 적정할 때에, 미미한  소리의 결을 채집하여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시를 윤택하게 하는 장기를 발휘한다. 시가 단어와 어구와 표현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의 질서에 대단히 민간한 장르라 할 때, 임혜신의 시속으로 옮겨진 음향은 시의 고유한 특징을 잘  반영한 경우라 할 수 있다.

IV .세상 바깥으로, 시의 안쪽으로 가는 시

    이제 임혜신의 [환각의 숲]을 정리해 볼 때가 되었다. 임혜신의 시집은 아름다운 국립공원을 연상케 한다. 각종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수림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그 사이와 외곽에 바다가 뒤척이고 있다. 바다는 달과 즐겨 어울리는 데 그래서 밤바다의 형세룰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밤바다는 삶의 고통과 신산함이 응집되어 있는 현장이다. 임혜신은 어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피력하고 있는데, 밤바다의 음험함이나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은 이러한 부정적 인식의 시적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밤바다의 위험을 다스리고 인도라는 달로 인해 국립공원 같은 시의 세계는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유지하게 된다. 바다가 연상시키는 것이 험난한 세상이었듯, 숲이 대칭점으로 삼고 있는 곳도 험난한 세상이었다. 이러한 세상의 윤곽은 임혜신의 시에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만일 임혜신의 시가 아름다운 공원과 자연만 있고 그 자연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 세상이라는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조금 맥빠지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은 절대적인 기준으로도 아름답지만, 또 희망과 안정과 미래를 예비라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비루하고 초라하고 힘든 세상의 저편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다. 임혜신은 이러한 세상 바깥과 세상 속의 대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아름다울 뿐 아니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어둠"이라는 시어 속에 몰아 넣어둔 세상의 간난신고와 혼란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적실한 관찰을 해야한다는 나의 바램을 보태고 싶다. 이러한 관찰이 심원해질 때, 자연의 상대적인 위상과 가치와 의미가 보다 확고해 질 수 있다. 아울러 임혜신의 시는 지나치게 산문적이다. 산문적이라 함은, 시어의 조탁보다는 문장의 평이함을 넓게 수용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시의 언어는 압축과 우회를 거치게 마련이다. 불필요한 단어의 나열이나 완료형 문장의 사용 그리고 단조로운 반복 구조를 피하고 사상을 압축할  수 있는 단어와 어구의 표현의 선택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시인의 의도가 설명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형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라벤더향기'의 인상을 전달하는 방식이나 사물의 윤곽에 음향을 덧씌우는 기법은 무엇이 시적일 수 있는가 라는 자문에 보다 폭넓은 힌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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