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아름답고 난해한 숲에는/임혜신 시집 해설

2009.09.05 14:53

백인덕 조회 수:607 추천:32


임혜신 시집 / 지금, 이 아름답고 난해한 숲에는




백인덕







지금, 이 아름답고 난해한 숲에는
     -- 임혜신의 시집, 《환각의 숲》( 현대시, 2001 )



                             백 인 덕 (시인)
                                      1964년 서울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가 있다.

문학, 또는 시를 둘러싸고 있는 이러저러한 '위기'의 담론들 한 가운데로 여전히 새 시집들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히 절정에 다다른 것 같다. 게다가 그 절정이 막 피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무참히 꺾여버리기 직전과도 같아서 더욱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리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인용문은 지난 세기 문학 훈련병이던 시절, 너무도 강력한 전범이었던 한 출판사의 시인총서 발간 취지문의 한 구절이다. 시대가 변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시의 위상도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인용문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는 그런 시집, 시인을 종종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은 '시의 유효성'에 대한 작은 확인과 같아서 늘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는 한다. 임혜신의 첫 시집, 《환각의 숲》(현대시, 2001년 6월)이 바로 그러한 시집 중에 하나이다.
임혜신의 이력은 사뭇 이채롭다. 95년 《워싱톤 문학》, 97년 《미주 한국일보》일보로 등단했다는 부분과 '자서'아래 명기된 '플로리다'에서 라는 부분에서 시인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임혜신의 시적 현실은 불가분 미국이라는 사회와 관련되어 있고, 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와 시대를 이해하는 것과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소아(小兒)적인 발상일 것이다. 그의 시는 몸의 공간과는 상관없이 모국어, 그러니까 한국어라는 세계 안에서 2001년 오늘, 나와 엇비슷한 시적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오히려 몇 편의 작품들을 통해서 나는 심하게 뒤틀리고, 상처 난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치유할 새로운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임혜신의 이번 시집은 첫 시집이고, 게다가 80편에 이르는 작품들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아서 완벽한 경개景槪를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다는 점을 사족처럼 밝혀둔다.

남은 것은 이제
세상 온갖 괴로움을 꽃이라 부르는 일이다
생명 한가운데 피어나는 번뇌의
싸늘한 살과 뼈를 꽃이라 부르는 일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
        --<하얀 蘭> 부분

임혜신의 시집은 우선 자신의 '편애'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여느 욕망에도 매달리지 않은 들꽃, 그가 편해한 것은 '야생의 꽃'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한줌의 먼지와 몇 가지 화학약품으로' 빚어 올린 '커피테이블 위의 분盆'을 발견하고 자신의 '편애'가 끝이 났다고 선언한다. '야생의 꽃'에 대한 편애가 끝난 순간부터 그에게 남겨진 것이 바로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이었다. 이 새로운 출발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자서'에도 나타난다. '비명이 지나간 자리는 어느새 막 터지려는 꽃봉오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저것이 치유인가, 굴종인가, 저항인가, 희망인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아름답고 난해한 시의 숲을 지나서 나는 밖으로 나갈 뿐이다.'고 술회되어 있다.

나는 왜 아닌가,
미명의 부드러운 손끝에서
이 세상 가장 느린 속도로 옷을 벗는
저 섬이 왜 아닌가.
    
……

왜 아닌가 나는,
영원도 소멸도 두렵지 않은 듯
검은 물 위로 꺼멓게 제 몸을 드러내는
저 거칠도록 자유로운 돌,
섬이 아닌가,
         --<검은 비 2 --제부도> 부분

편애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꽃'은 이 시에서 '섬'으로 변주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섬이란 '저 거칠도록 자유로운 돌'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바로 욕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변질되기 이전의 사물, 그 자체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혜신의 '편애'의 끝은 '왜 아닌가'라는 물음을 통해 촉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나의 본능은 식물성이다'(<작은방>)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 '식물성'은 부동성의 메타포로 읽힌다. 앞의 시에서 '검은 물'로 상징되는 세계, 즉 갖가지 욕망이 난무하는 세계를 배회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휩쓸리는 것은 최소한 '편애'가 끝나기 이전의 임혜신의 본능은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는 비의(秘意)적 공간들, 그러니까 임혜신 만의 동굴, 숲속, 신전, 방 등은 그의 식물적 본능이 구현되면서 차츰 무르익어 그 자체를 무화하는 공간들이다. '이유를 물어 소용없는 날/ 불을 끈다'(<검은 비 1>)로 시작되는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이 비의적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그는 외부의 불을 차례로 끄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슴에 달깍거리는 촛불'을 끔으로써 슬프지만 안온한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편애>)부르기 이전의 모습이다.

이 십 년 만이었어
슬며시 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혹시 길이 아닌가, 이 끈질긴 추위가
삶과 죽음의 사이에 가늘게 놓였다는
그 신비의 줄이 아닌가, 라고
                    --<빙판> 부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편애'라는 화두를 가지고 풀어보는 임혜신 시의 궤적은 대략 이러하다. 시인은 '야생의 꽃'으로 상징되는 사물 그 자체의 원초적 세계를 편애한다. 그 편애는 시인의 '식물성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본능은 욕망으로 원초적 세계가 왜곡되는 현실에서 신전, 동굴, 숲속, 방과 같은 비의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은 그 스스로 무르익어 무화(無化) 되면서 슬며시 의심의 싹을 틔워낸다. 앞의 시에서 '의심'의 계기는 다름 아닌 '끈질긴 추위'인데, 추위야말로 '식물성 본능'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이다. 이 위협에 직면해서 삶과 죽음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고, 나아가 그 둘 사이의 관련성까지가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임혜신의 '편애'의 끝은 '추위'로 상징되는 위협에 시달린 오랜 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는 다음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세상을 끝낸 자가
또 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오, 저 비밀스런 욕망의 속도
           --<無> 전문

정말 '한 세상'을 끝낸 자가 '또 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데에서도 '욕망의 속도'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욕망'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몸을 벗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오'라는 외마디 감탄사이다. 내게는 이 외마디가 발견이나 주목의 시작을 알리는 고지(告知)로 읽힌다. 앞으로 그의 시가 지향하게 될 새로운 핵심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적어도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가 '치유인가, 굴종인가, 저항인가, 희망인가'라는 질문에 뒤이어 바로 '나는 모른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임혜신은 '이 아름답고 난해한 시의 숲을 지나서' 밖으로 갈 뿐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를 가늘게, 그러나 재빨리 지나가는 저 '비밀스런 욕망의 속도'와 싸우는 것이 결국은 모든 시인 된 자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묻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행위', '갈 뿐이다'라는 자세에서 빚어질 뿐이다. 편편이 아름다운 작품들에 서툰 칼질을 해댄 것 같아 죄송스럽다. 하지만 무수한 칼질이 또한 부드러움을 빚어낸다는 것 또한 시의 운명의 한 속성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이렇게 겨울밤은 깊어가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은 멀다. 지켜야 할 약속이 남았으므로 아직은 행복하다.  

<퍼옴> 계간 <<문학마을>>2001 . 겨울호 문제 작가. 문제 작품 샅샅이 뒤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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