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 읽기- 분노의 깊이에서

2008.01.05 10:59

임혜신 조회 수:216

차알스 브꼬브스키(1920-1994)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자라났고 시를 쓰기 위해 로스엔젤레스 시립대학을 중퇴했다. 그는 우편 배달부, 트럭 운전사, 접시 닦기, 공장노동자 등 잡노동을 했다.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명성을 얻었고 시집으로 Flower, Fist, bestial, Night walker, Love is a Dog From Hell외 수 십 권이 있고 Factotum, Post Office 등 다수의 소설과 드라마를 썼다.  
a smile to remember

                Charles Bukowski

we had goldfish and they circled around and around
in the bowl on the table near the heavy drapes
covering the picture window and
my mother always smiling, wanting us all
to be happy, told me, "be happy, Henry!"
and she was right: it's better to be happy if you
can
but my father continued to beat her and me several times a week
        while
raging inside his 6-feet two frame because he couldn't
understand what was attacking him from within.

my mother, poor fish,
wanting to be happy, beaten two or three times a
week, telling me to be happy: "Henry, smile!
why don't you ever smile?"

and then she would smile, to show me how, and it was the
saddest smile I ever saw.

one day the goldfish died, all five of them,
they floated on the water, on their sides, their
eyes still open,
and when my father got home he threw them to the cat
there on the kitchen floor and we watched as my mother
smiled.


잊을 수 없는 미소

한 때 우리는 금붕어를 길렀어.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커다란 유리창, 그 곁에 놓인 책상 위, 작은 어항 속에서
그들은 둥글게 헤엄치곤 했지.
항상 미소짓던 어머니, 우리들 모두가 즐거워하길 바라면서
어머니는 내게 말하곤 했지, “행복해 하거라, 헨리,”
맞는 말이지: 행복할 수 있다면
행복해야지. 하지만 말야. 
아버지는 일 주일에도 몇 번씩 나와 엄마를 두들겨 팼어. 
육 척 장신의 몸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 
도대체 무엇이 그의 내부에서 그 자신을 공격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내 어머니, 가여운 붕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두들겨 맞던 행복을 원하던 어머니,
“헨리, 미소지어봐!
넌 왜 미소짓지 않니?“ 말하곤 하던 어머니,

어떻게 미소짓는가를 보여주려는 듯
스스로 미소지어 보이던 어머니, 그것이 내가 본 가장 슬픈 미소야.

어느 날 다섯 마리가 금붕어가 
죽어서 물위에 떠올랐지, 눈을 뜬 채
옆으로 누워 떠다니던 붕어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부엌바닥에 금붕어를 내던져
고양이밥이 되게 했어. 그때도 어머니는 미소짓고 있었고
우리들은 바라보고만 있었지. 


며칠 전 멀리 사는 친구에게서 몇 권의 책이 왔다. 그 중에 하나가 틱낫한이 쓴 ‘Anger' 라는 책의 한글 번역서이다. 차근차근 잘 번역된 그 책을 읽다가 ’채소를 가꾸지 않았으면 나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구절 앞에 한동안 서 있는다. 한 쪽으로 나는 차알스 부꼬브스키라는 시인의 시를 유심히 읽던 참이었는데 차알스 부꼬브스키라면 ’채소를 가꾸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죽도록 매를 맞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바꿔 말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차알스 부꼬브스키와 틱낫한은 참 다른 성격의 사람이다. 그러나 이 둘은 지금 내 머리 속에 마주 앉아 있다. 이들 둘이 한자리에 앉아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를 듣는다. 그들 사이에 ‘화’라는 화두가 놓여있다. ‘화’라는 화두를 앞에 놓고 한 사람은 차를 마시고 또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다. 
차알스 부꼬브스키는 1920년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로스엔젤레스에서 자라났다. 대학을 중퇴하고 글을 쓰기 위해 뉴욕으로 갔으나 마땅한 출판사나 스폰서를 찾지 채 소그룹의 제한된 문학활동에 그치고 만다. 수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세상으로의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하자 결국 붓을 놓고 1946년부터 노동자의 길로 들어서서 10여 년을 사회의 낮은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과음과 방탕한 생활로 병을 얻은 것이 생의 전환점이 되어 뒤늦게 그는 다시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후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수많은 시집과 소설집을 냈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개성적이며 독자적인 시인이라 불려 무리가 없을 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끝까지 문단의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의 문제, 또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개인의 문제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언어와 의식으로 표출한 그의 작품들에는 미국사회의 낮은 곳을 사는 사람들의 생존방식과 희로애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가장 미국적인 시인 중에 하나임에 분명하건만 왜일까, 미국문단은 지극히 미국적인 이 시인을 꺼렸다. 미국의 철학은 승리와 실용의 철학이다. 미국은 승자를 우상화한다. 복잡한 인과관계와 생로병사의 우연성보다 ‘인간승리’의 드라마에 집착하는 것이 미국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승리를 향한 닫힌 꿈이기도 하다. 미국사회의 저변에는 이렇게 살아남는 자에 대한 편애와 패함을 패한 자의 결함으로 보는 선별의식이 은근하고도 깊게 깔려있다. 이것이 화려한 미국문화의 어둔 곳이다. 이 시인은 그런 아메리칸 드림의 단순성에 대항한 시인이었다. 파헤치고 비판하고 코웃음을 친 시인이며 스스로 사회구조라는 피라미드의 말단에서 살며 그 말단의 삶을 대변한 당당한 사회의 낙오자였던 것이다. 이 당당한 낙오자를 시인으로 모시기를 미국문단은 한동안 망설인 것이다. 그의 작품이 유럽각지로 번역되어나가고 그래서 외국에서 대단한 명성과 독자를 확보하면서 말자하면 국내로 재수입된 문인인 셈이다. 미국 내에서 또한 많은 대중을 불러모았지만 문학사에 그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이다. 힘든 여로를 거쳤지만 결국이 시인은 미국의 꿈을 지극히 미국적으로 실현해낸 성공한 패자이며 패한 승자인 것이다.
  차알스 부꼬브스키의 문학은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의 문학이다. 어떤 사조에 속한다기보다 그가 살았던 캘리포냐, 로스엔젤레스와 산페드로등의 도시문화가 탄생시킨 자연스런 산물로서의 프로레타리아 문학이다. 낮은 곳에서 낮은 자들과 더불어 낮은 자의 목소리로 낮은 자의 이야기를 쓴다는 면에서 비트문학의 거장인 알렌 긴스버그와 그 성격상 가깝다. 그러나 비트문학인들과 친분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조의 소외 속에서 고통 하는 개인의 혼란을 이야기하는 그의 문학은 생의 부조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에 단단히 뿌리내려 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총괄적이라기보다 단편적이다. 다시 말해 개인 개인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그려낸 조각들로 사회의 단면을 모자이크해 내는 편이기 때문에 시 하나로 그를 들여다보기는 상당히 힘들다. ‘잊을 수 없는 미소’는 그의 시 중 대단히 온건한 시이다. 비록 그의 시 세계를 한눈에 짚어볼 수는 없지만 문학을 시작하게 한 근거로서의 정신적 배경을 읽기에는 마땅한 시라는 생각이다. 
차알스 부꼬브스키는 그의 문학적 삶의 시작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매를 맞던 일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이유 없는 매맞기, 억울한 매를 죽도록 맞던 어느 한 순간 그는 부당함의 저 밑바닥에서 평정의 힘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코너에 몰린 쥐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깨달은 평정은 의외로 놀라운 선물, 이해라는 것이었다. 분노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그를 분노하게 한 세상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존재의 난감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고 세상을 대변하는 ‘아버지’라는 구타하는 자와 개인을 대변하는 ‘나’라는 당하는 자 모두에 대한 깊은 연민을 깨달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에게 부당한 만큼 그의 아버지에게도 부당하다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동등해진 순간, 아니 맞는 자가 때리는 자보다 강해진 이 순간에 이르러 그는 억울함과 분노, 그 화의 소용돌이에서 스스로와 스스로가 깃든 세상을 받아들이고 일으켜 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아마 맞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 그리하여 더럽고 억울한 곳에서 일어서서 그 깨달음의 힘으로 세상의 음침한 곳의 생존논리를 꿰뚫어보며 한 평생 그것을 다루는 글을 쓰며 살게된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어머니의 미소를 가장 슬픈 미소이며 또 기억할만한 미소라 부르고 있다. 무슨 일이 닥쳐도 사라지지 않던 어머니의 미소, 맞으면서도 미소짓고 짓밟히고 무시당해도 미소짓던 그 미소는 이미 세상사를 왈가왈부 가리는 보통사람의 미소가 아니다.  모든 것이 부당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지당하게 받아들이게 된 자의 초탈한 미소이다. 인간적 욕망의 불균형을 넘어선 이 절대적 이해, 절대적 희망은 오히려 생존권을 포기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슬픈 미소이다. 죽은 금붕어처럼 편안하게 계속되는 이 미소는 또한 시인 자신이 억울한 구타의 끝에서, 사회구조의 냉혹하고 부당한 매질과 착취 아래서 얻은 존재에의 서글픈 이해이기도 하다. 아픔과 아픔 없음을 넘어선 미소, 포기와 희망을 다 넘어선 미소가 가장 슬픈 것은 생명의 속성인 집착과 고통이 다 제거된 낙천성 때문일 것이다. 초월한, 깨달은, 혹은 죽은 미소의 슬픈 밝음, 이 가련한 초월, 이 창백한 희망을 이 시인이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미소만이 아버지라는 ‘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까닭이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무조건 이해하는 이 손길 아래서만 아버지의 매질, 그것이 대변하는 운명의 화살에 시달리는 존재의 원죄는 설명될 수 있는 까닭인 것이다. 이 시인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그 미소 때문에. 그는 또한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 그의 매질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 행복과 불행, 구조와 개인, 그 모든 것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미소를 더욱 기억하고자 한다. 용서와 이해 그 자체인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미소, 그래서 죽은 미소이며,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한 자의 창백한 미소인, 그 미소가 바로 그를 세상이라는 곳으로 다시 탄생시키고 문학이라는 출구를 열어준 밑바탕 힘인 까닭이다. 매를 맞는 자이며, 알 수 없는 분노에 시달리는 화난 개인이며 동시에 그들 모두를 달래는 미소였던 이 시인은 그리하여 초탈의 웃음을 껄껄 웃으며 부조리한 세상 속으로 깊이 걸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게 된 그의 시는 강한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심오한 은유나 구불거리는 사색의 고통도 심미적 화려함이 없다. 거칠고 상스러운 시적 상황을 열고 나오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쾌하며 나아가 희망적이다. 의미의 다양성도 없다. 따라서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어진 막다른 골목에서 구한 세상에의 이해는 그저 ‘살기’라는 좌충우돌의 숨김없는 세계이다. 맞는 자의 비명을 삶의 진흙탕 속에서 부르는 노래로 환원시킨 거칠고 자유로운 세계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과 한 밥상에 앉아 이 밥이 얼마나 맛있느냐, 사랑은 얼마나 좋았고, 이별은 얼마나 아팠더냐 함께 재즈도 부르고 랩도 부르고 칼싸움도 하고 놀기도 하는 이 시인의 시는 저급한 어휘와 상황들, 그리고 반사회적인 카리스마로 하여 사교(邪敎)적이기까지 하다. 그만큼 당해야하는 자의 울분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카타르시스적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또한 이 시인의 글의 개성이며 매력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틱낫한의 아름다운 ‘화’와 부꼬브스키의 당당한 ‘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나는 당신의 생각의 등에서 화라는 짐을 내리라 하고 하나는 내 등에서 그 짐을 내리지 말라 한다. 한 사람은 채소를 가꾸고 한 사람은 난해한 삶 속으로 자꾸 깊이 깊이 들어간다. 서로 다른 이 둘이 앞에 놓고 평생 대결하는 ‘화’라는 짐 속에는 똑같이 패자에의 사랑이 가득 들어있다. 실패한 자, 불행한 자, 잃은 자, 없는 자, 그 모든 패자를 위한 패자의 미학이 있다. 미소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화’와 떡 버티고 서서 껄걸 웃는 당당한  ‘화’가 그렇게 어느 한 지점, 맞닿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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