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진화

2008.03.12 11:00

임혜신 조회 수:82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어요 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이상한 곳 풀밭은 푸르고 산언덕이 들여다보이는 호수의 수면은 은빛으로 빛났지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싸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간간이 폭우가 흰 눈처럼 펑펑 쏟아져 앉는 침묵의 도시, 대체 이 눈부신 폐허의 땅은 어디인 것일까요? 벌써 오래전 3차 4차 대전이 끝나버린 걸까요? 

고요한 식물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는 일에는 나도 자신이 있지요 한 때 나는 강아지풀이었고 들국화였고 호박꽃이었으니까요 여느 꽃이었을 때처럼 익숙하게 흙 속 깊이 발을 묻고 바람에 얼굴을 묻고 자폐증 환자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지요 저녁이 오고 어둠이 깊어가고 동쪽 하늘에 당신의 얼굴을 닮은 둥근 달이 뜰 때 문득 먼 혹성이 내품는 한숨소리를 들었는가 싶었지요 피리소리처럼 물 위를 스쳐가는 길고 애달픈 목소리, 나는 누가 저 먼 혹성으로 그 많던 짐승들을 다 옮겨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비밀의 통로가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면 계획도 있었겠고 배후의 조종자도 있었겠군요 누군가는 말했지요 보이지 않는 통로로 언젠가 모든 식물들도 사라져갈 거라고 그리고 아메바를 닮은 최초의 외계인들이 똑같은 통로를 통해 들어올 거라고, 그러나 내 관심사는 통로가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고 누가 어디로 갔을까도 아니고 그저 나 자신일 뿐이었어요 짐승들이 다 사라진 정물의 산기슭을 쑥쑥 자라나는 나의 몸, 그 속에 맛있었던 빵의 기억처럼 살고 있는 호수 같은 기다림이 문제였지요 그리워하거나 기다린 적은 많았지만 특별한 대상도 없는 기다림이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요

만일 내가 좋아했던 아주 논리적인 짐승이 곁에 있었더라면 말해주었을 지 모르지요, 구체적 대상이 없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언어의 소리나 향기라고 봐야 될 거라고 그러기에 목적하는 방향이 따로 없고 스스로의 내부와 외부를 향해 파문처럼 동시에 퍼져나간다고 레이져 광선 같은 독기가 없어 대상을 파괴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평화시 우주 탐사등(探査燈)으로 사용하기도 아주 좋은 구조일 거라고 이런 기다림은 기다림이라는 형이하학적 행위의 마지막 실현, 혹은 실체화라서 대상과의 거리가 무한으로 길어질 때 생물에게 발생하는 놀라운 돌발현상이라고

어쩌면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다가와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고 갈망하지 않는 기다림이란 불가능한 만남이나 완전한 결별에 대한 욕망의 진기한 진화인 게야, 라고 중얼거리며 렌즈처럼 차거운 외계의 손가락으로 진달래꽃 화안하게 피어난 적멸의 산하, 분홍빛 내 머리카락과 발가락을 송이 송이 꺾어 침실로 데려간 다음 신기한 듯 밤새도록 나의 D, N, A를 뒤적거렸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말들 
나는 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주먹만한 뿌리를 깊이 더 깊이 넓게 더 넓게 내리면서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었겠지요 붉어지는 가슴을 여민 채 때로는 언덕 너머 태양을 등지고 달려올 아이들을 생각해보고 때로는 빗속에 방울 방울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소년들을 생각해보고 때로는 마차, 때로는 소를 모는 목동 때로는 당신과 내가 모래둔덕을 뛰어놀던 것을 상상해보면서, 예쁜 짐승들의 기억을 짐승들이 다 사라져버린 황량한 풍경에 조금씩 더해주고 빼주면서 저녁종소리처럼 바알갛게 산 하나, 산 둘, 산 셋, 산 넷,  점령해 오르고만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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