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글릭의 [꽃의 말]

2008.03.12 11:00

임혜신 조회 수:369

루이스 글릭의 [꽃의 말]

연령초 
                     -Trillium

잠에서 깨어나니 나는 숲 속에 서 있었어,  
겹겹이 짙은 빛으로 소나무 사이를 비춰오는 하늘
어둠은 자연스러웠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 그저 바라보고 있었지.
바라보고 있는 사이 하늘나라의 모든 빛들이
사라지면서 한 덩이가 되어버렸어, 차거운 전나무 
사이로 타오르는 불 
그러더니 파멸하지 않고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져 버렸어.

죽음이 함께해줘야 하는 영혼들이 있어? 
내게 보호가 필요하듯이?
이렇게 한참 무언가 지껄이다 보면
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도 마침내 저들이 보는 걸 다 보고 될 거야, 
전나무를 뚫고 오르는 사닥다리, 
저들에게 생명을 바치라 명령하는 그 누군가를,

봐, 내가 벌써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나는 숲 속에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깨어났어, 
방금 전까지도 몰랐어, 내게 만일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일 거라는 거, 내 문장은 
서로 뒤엉켜있는 울음일거라는 것을.
난 정말 몰랐어 내가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슬픔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까지,
나의 몸에서 빗물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때까지.




  지난여름도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화씨 백도가 가까이 되는 날씨가 2-3주 계속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훅 하고 더운 바람이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사람도 지치고 초목들도 지쳐서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날씨가 조금 누그러지면서 비도 내리고 맑은 바람이 불고 가을의 낯익은 발자국 소리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머지않아 정원의 꽃들은 다 사라져갈 것입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숲은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 한 여름의 뜨거운 열망들을 추억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시간에 루이스 글릭이 쓴 정원에 관한 시집을 읽어봅니다. 꽃을 보고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천만가지 다르겠지요. 루이스 글릭 특유의 우울과 절망은 이 꽃의 시집 속에도 가득합니다. 그의 꽃들은 큰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애원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꽃들은 작고 도도하고 조금은 까달스럽고 앙칼지며 생명의 슬픔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슬픈 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니 온 세상이 지난 수 만 년 피었다 사라져간 애잔한 꽃들의 달빛 같은 추억으로 다시 만발하는 것 같습니다.
   꽃을 그리기 좋아하는 견습화가에게 어떤 중견화가는 말하더군요. 화가가 되고 싶으면 먼저 꽃을 그리는 일을 중단하라고. 예술 작업과정에서 꽃이 이렇게 일종의 천대를 받기도 하는 것은 수 천 년 시와 그림 속에서 쓰이고 쓰여 달아버린 낡은 상징에의 실증일 것입니다. 현대는 모든 면에서 다양함과 새로움, 개성과 자신감을 추구합니다. 몇 천 년 우려먹은 서정으로서의 꽃은 어쩌면 설득력 없는 질료입니다. 외적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 그리고 부드러운 질감에서 또 몸속에 새 봄을 위한 씨앗을 잉태한다는 데서 단연코 꽃은 구조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여성일 것이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꽃을 여성상징이라 하는 일에 분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꽃의 여성상징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을 꽃으로 단순히 한정짓는 것일 겁니다. 언제나 위험한 것은 닫힌 정의의 단순함이니까요. 시인이 기피할 것은 꽃이라는 대상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단순하고 진부한 정의입니다. 이 세상에 진부한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진부한 관찰자의 진부한 시선들이 있는 뿐이지요. 시인 루이스 글릭은 이런 저런 현대적 위험을 무릅쓰고 꽃들의 정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정원으로 들어가 온갖 종류의 꽃이 되어 한 해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꽃들의 목소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꽃들을 소재로 한 권의 시집을 엮었습니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언어로 지어진 시집 ‘야생 아이리스’는 이렇게 꽃의 이야기이며 정원의 이야기이며 분명코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모든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시집으로 루이스 글릭은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이른 봄, 첫 꽃이 피기로부터 조락의 가을에 이르기까지의 정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시집에는 동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꼭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입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 정원사입니다. 꽃과 나무의 생이 독립적이듯 정원사와 꽃들의 생도 독립적입니다. 그들은 정원이라는 장소에서 서로 얽혀있지만 각각의 감각적 생은 조금도 얽혀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의 절대적 고독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식물들은 모두 난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것은 이들이 움직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일종의 장애존재이지요. 움직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수동성은 그들의 삶 전체를 수동적으로 규정짓고 맙니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사랑하고 수동적으로 질투하고 수동적으로 의문하고 불평하며 수동적으로 죽어갑니다. 식물들은 노래를 하거나 화를 내거나 어루만져주거나 전쟁을 하거나 학교나 예배당을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이들이 장애존재로서의 한정된 생명력을 가졌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들의 생존력은 참으로 대단하니까요. 그 누군가의 말대로 식물적 수동성은 인간의 지능처럼 일종의 진화적 선택일 것입니다. 요즘 첨단의 과학자들은 식물의 생존력, 적응력, 재생력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리가 하나 쯤 잘려나가도 살 수 있는 것이 식물이며 죽어 둥지만 남은 것 같은 데도 봄이 되면 새로 잎을 피우고 살아나는 것이 식물이니까요. 수백만 년 전부터 지구를 뒤덮고 있는 식물들, 저들이 대지와 푸르른 공기와 어울려 피워내는 생명 유지력은 실은 동물인 우리들에게는 기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동물들에게는, 특히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가치유력이 빈약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아픔과 슬픔, 상처에 그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릅니다. 한 번 잘린 동물의 다리는 다시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 반 다친 마음의 상처도 잘 아물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상처들을 대부분 치유하고 일어서는 식물에 비해 마음대로 대지를 여행하고 팔과 다리를 휘둘러 꽃도 꺽도 싸움도 하고 장작도 패는 우리들은 한없이 연약하기만 한 것이지요.
  이렇게 왕성한 번식력과 자가치유력을 가진 식물군락은 꽃을 통해 종족을 유지합니다. 식물에게 있어서 꽃은 아주 중요한 존재이며 또 극히 순간적 존재입니다. 식물의 생명력이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식물의 영생 번식을 위한 최전선의 전사가 꽃이라하면 지나칠까요?  연령초는 나무숲이 제법 깊은 낮은 지역에 피어나는 꽃잎이 세 개인 흰꽃입니다. 정원이라면 키큰 참나무나 월계수의 그늘쯤이 되겠지요. 흰 꽃들은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봄날에 덤불 덤불 피어있는 하얀 싸리꽃이나 하얀 올린더 혹은 하얀 은방울 꽃을 보면서 슬픔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비 온 뒤 우수수 떨어진 하얀 꽃잎들을 보면 저절로 아련한 아픔과 슬픔에 젖어들게 되지요. 그중에서도 연령초는 정말 작은 풀꽃입니다. 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어디쯤 젖은 땅을 열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으로 하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꽃들은 왜 이 세상에 이렇게 나오는 것일까요? 저절로 일까요? 그저 우연일까요?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시인은 꽃들의 탄생을 간절한 탄생에의 염원에 의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얀 꽃은 그러한 열망을 안고 힘들게 세상에 나왔는데 숲으로 비유된 세상은 그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반겨주기는 커녕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생존을 위한 다툼이 치열한 경쟁터입니다. 경쟁은 약자를 탄생시키고 외로움을 탄생시키고 패자를 탄생시킵니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꽃들의 꿈속의 열망처럼 달콤한 것만은 아닙니다. 게다가 꽃은 멋진 식물군락을 보존키 위해 경쟁의 전쟁터에 나온 전사가 아니었던가요.    
   연령초는 차거운 세상에 나와서 세상을 천천히 관찰합니다. 거기 숲이 내리깔아놓은 어둠이 있고 그 위로 새벽빛이 먼저  내리쬐더니 태양이 번쩍 떠버립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꽃에게 떠오르는 불의 태양은 너무나 눈부신 놀라움이었습니다. 그 태양을 꽃은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눈이 멀어 버릴 테니까요. 세상에 나오면 모든 것을 만져보고 느껴보고 누려볼 것이라 생각했던 꽃은 태어나자마자 좌절을 알게됩니다. 저 힘찬 생명의 근원인 위대한 태양은 우리가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라보고 열망하면 파괴를 불러오는 것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황금이나 권력을 추구하다가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도 꽤 되겠지만 순수해 보이는 지식이나 아름다움이나 사랑이나 그런 것도 한참 따라 가다보면 실망과 절망 그리고 파멸을 불러오는 경우는 허다하지요. 아마도 모든 절대적 목적지가 다 그러할 것입니다. 목적은 생명의 마지막이고 생명은 다만 과도기적 존재이니까요. 연령초가 태양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누리는 법을 일찌기 깨달았다면 이처럼 슬프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이 시집 속의 꽃들은 세상을 익히 꿰뚫어본 도사연한 꽃들이 아니라 예민하고 감각적인 눈물의 꽃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령초는 바라보면 눈이 멀어버릴 태양과 손이 닿지 않는 나무 그늘위의 거대한 하늘과 제 작은 몸 사이에서 한없는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그의 열망처럼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연령초가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나야 했을 겁니다. 최소한 호랑이가 되거나 사자가 되거나 힘센 사냥꾼이 되거나 그랬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태어나고 보니 그는 꽃이었습니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어보니 그것은 울음 같았고 느껴보니 자신의 몸뚱이는 빗물처럼 눈물처럼 솟구쳐 흐르는 그런 꽃이었던 것입니다. 슬픔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눈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숲 속의 작은 꽃에게 자각이 있다면 이 슬픔 외에 다른 것이 없을 것도 같습니다. 차라리 자각이 없다면 바보같이 예쁘게 피었다 지겠지요? 그렇다면 하얀 돌과도 다름이 없겠군요. 그러나 루이스 글릭의 꽃들은 슬프지만 도도한 존재입니다. 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록 눈물 보따리를 터뜨리는 것이 꽃잎 하나 하나라 해도 돌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꽃들은 식물군락의 최전선에 선 아주 신비하고 매력적인 전사인 것입니다. 
  연령초처럼 혹은 진달래 라일락 제비꽃처럼 여성은 아름다운 생명의 전사입니다. 여성은 정치가이기도 하고 운동선수이기도 하고 사업가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지만 역시 꽃이기도 합니다. 꽃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포용하고 아이를 낳고 또 낳고 키우며 이겨나가며 이 땅에 사람의 씨를 퍼뜨립니다. 꽃이기 때문에 산하를 생명으로 덮어가는 것입니다. 꽃이 가진 여성적 수동성은 그러고 보면 놀라운 능동의 기술입니다. 꽃 속에는 그리고 꽃의 영혼 속에는 환한 사랑의 순간이 되는 절대의 시간이 들어 있고 또 꽃잎이 떨어지는 절명의 위태로운 슬픔도 있습니다. 연령초의 매혹적 눈물은 슬픔의 좌절이 아니라 온 몸으로 샘물처럼 솟아 올리는 생명의 처절하리만치 작고 하얀 생의 찬가입니다. 아주 일시적 찬가이지요. 이 찬가는 꽃들의 것이며 여성들의 것이며 또 이 우주의 것입니다. 이 작은 찬가들로 하여 세상은 끝나지 않는 것이지요. 내일이면 사라질 저 낮고 고요한 탄식의 보드라운 잎새들, 별들, 미아들, 어느 영원처럼 길고 멋진 생애가 저들의 칼날처럼 예리한 슬픔의 개화와 도도한 낙화를 품지 않고 존재와 존재를 거듭할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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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아이리스]
                                            
내 몫의 고통이 끝나자
거기 문이 있었어

얘기를 들어봐: 그건 네가 죽음이라 부르던거야
난 기억해.

머리 위로 소음, 소나무들이 비비적거리는 소리.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창백한 해가
마른 대지의 표면에서 불꽃처럼 까딱이고 있었어.

땅 속에 갇혀버린 의식처럼
살아남는다는 것은 처절한 일이야

그리고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던 것, 영혼이 되었으나
말할 수 없게 된 것, 갑자기 끝이 났지, 굳어버린 지상이
약간 구불어졌을 뿐. 새가 낮은 관목 위에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것 같았지.

너 저 세상에서 오는 길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자
나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말해주지: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들은 다
제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오는 거야:

내 생명의 한 가운데
위대한 샘물이 솟아올랐어, 청아한 바다 위
깊고 푸른 그늘들


[백장미]

           
여기가 세상이야? 그럼
난 여기 속하지 않아요.

거기 불 켜진 창문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죠
반짝이는 저 여행자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
난 이 초여름을 넘길 수 없어요, 당신은
이 여름을 살아남을 수 있나요?

밝은 창가에  한밤 내 가느다란 나무 가지들은 
서로 움직여 몸을 비비는군요
내 생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당신 꿈적도 않는 이,

하지만 나는 밤이되면 당신을 불러내죠:
나는 당신과는 달라요, 내게는
몸이 목소리지요; 그러므로 나는 침묵 속으로
사라질 수 없어요--

어두운 세상의 표면위에
차거운 아침이 오고 
나의 목소리는 떠돌며 메아리쳐요
증인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지요

마침내 어떤 증표를 보여주듯이
당신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아니면 당신은 내가 빛이라 부르던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어둠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려는 듯이

[꽃 고비]
            -The Jacob's Ladder

지상에 갇힌 그대
당신도 천국에 가고 싶겠죠? 난
아가씨의 정원에 살고 있어요. 용서해줘요, 아가씨;
기다리다가 나는 그만 우아함을 잃었어요. 나는
당신이 원하던 그런 것이 아니예요.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원하는 것처럼 나도
간절히 파라다이스에 대해 알기를 욕망해요--이제
당신의 비탄, 베란다의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벌거벗은 줄기. 그리고 결국 끝에는 뭐가 되는 거죠? 
작고 파란 별 같은 꽃. 절대로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의 눈물에 담긴 뜻인가요?

   
* 꽃고비(Jacob's Ladder) ; 
      잎이 사다리 모양으로 병렬하는 하는 꽃고비속(屬)의 다년생 식물

 
[자장가]


이제 쉴 시간이야, 잠시나마
넌 충분히 흥분했었어.

이른 저녁 무렵, 낮과 밤의 중간지점
방안에 여기저기 개똥벌레들이 반짝이고 
여름의 깊은 달콤함이 열린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어

더 이상 이런 것들 생각하지마
내 숨소리를 들어봐, 네 자신의 숨소리를 들어봐
개똥벌레들처럼, 작은 호흡마다
불꽃 속에 드러나는 세상들

여름밤 동안 나는 네게 긴 노래를 충분히 불러주었지.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나야; 세상은 네게
변함없이 지탱해줄 비젼을 줄 수 없어.

넌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해. 사람은 
침묵과 어둠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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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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