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터너는 오레곤 대학에서 MFA를 받았고 미군으로 한국에 머물기도 했다. 그는 2003년에 이라크에 파병되었다. 그의 시들은 Peotry Daily, The Georgia Review 등에 실렸었고 첫 시집 [총알아, 내가 여기 있다]로 베아트리체 상을 받았다. 이 시집은 또 메인문학상, 북 캘리포냐 도서상, 펜 센터 USA상과 포잇상을 받았고 뉴욕타임즈 편집자의 초이스에 선택되기도 했다. 

[해설]


           
           -전선에서 보내온 사랑과 죽음의 언어-
           
                     오직 죽은 자 만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Only the deads have seen the end of the war.  --플라톤--


지난여름 나는 낯선 필라델피아의 밤거리를 헤매었고 캘리포냐의 눈부신 햇살 속을 걸었고 비를 맞으며 서울거리를 다리가 아프게 쏘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긴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여행에서 돌아와 달콤하고 고적한 우울에 시달린다. 저 홀로 깊어가는 소리 없는 영혼, 텅 빈 영혼의 방, 그 작은 출입문에 ‘우울’이라는 말을 현판처럼 걸어놓고 몇 날 며칠을 칩거하다가 밖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오니 배가 고프다. 식품점으로 간다. 야채와 빵을 카트에 싣고 카운터에서 줄을 기다리며 앞에 서 있는 아랍인 가족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엄마, 아빠, 아들 둘, 딸 둘 그렇게 여섯 식구다. 엄마와 딸 들은 베일을 쓰고 있다. 그들은 학용품 몇 가지와 갤런짜리 식용유와 60개짜리 달걀박스를 산다. 금색실로 수를 놓은 검은색 드레스에 회색 베일을 쓴 두 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라크인일까, 아프카니스탄 사람일까, 시아파일까, 수니파일까, 일없는 생각들이 스치다가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 시인 브라이언 터너의 시들에 생각이 이른다.   브라이언 터너는 이라크 전에 파견되었던 소위 전쟁시인 (War Poet)인데 그의 시집 [총알아, 내가 여기 있다]에는 얼굴을 가린 아랍의 잿빛 망령들이 모래바람처럼 세상을 흘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의 뒷장에는 달과 이라크를 비교한 뉴욕 타임즈의 북 리뷰가 적혀있다. 거기에 적힌 바에 의하면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 딛던 날 어느 문학교수는 ‘ 언젠가 우리는 시인을 달에 보낼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실을 탐색해내기에 가장 적합한 자는 시인이라는 것, 그러므로 브라이언 터너는 전쟁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달보다 훨씬 이해하기 복잡한 이라크라는 전쟁터로 파견된 셈이라는 부연설명도 쓰여 있다. 사십 육 편의 시에 전쟁터의 실상을 담아들고 돌아왔으니 브라이언 터너는 그의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전쟁의 기록, 처절한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총과 폭탄이라는 이 시대의 무감각한 말초신경에 닿는 인간존재의 비애와 그것을 넘어 살아남는 생의 비극적 여운이 서정적일만큼 섬세하게 그려진 이 시집을 읽으면 때로 이 것이 전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고 부당하게도 산다는 일의 비극적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비극을 이용(?)하여 시를 지어내는 시작업의 피할 수 없는 비극성을.
  요즘 미국은 대통령총선을 앞두고 있는 욕망과 양심사이, 국가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 참에 새로운 미국정신이 태어날까? 그것은 알 수 없으나 분명 새 세대는 자라나고 있고 구세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테러범이 아니라 시아파를 비인도적으로 살생한 죄로 처형당한 지 2년이 지났으나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거기에 얽힌 석유와, 정부와, 군사물자 회사에 관해 서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 이 전쟁이 얼마나 부당한가 알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는 전쟁이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인도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그간 미국인 희생은 수천 명이며 이락인의 희생은 백만이 넘는다는 사실, 그 숫자 하나 만으로 이 전쟁이 얼마다 부당한 전쟁인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기에 더욱 이 시집을 읽으면서 왜 군인이 되었을까, 그 이유나 사연이 불온하게도 나는 궁금해지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총과 칼의 순결한 측면을 믿는 시인들이 있는가 싶기도 했다.  브라이언 터너는 왜 군인이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전쟁을 체험한 후 시에 관해 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사의 절박한 체험으로 그의 시론이 뼈와 살을 얻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 영혼의 목소리인 시도 육신을 원하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시란 체험주의자들이 갈망하는 시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시인들은 뜨거운 생의 심부를 경험하기 위해 도덕적 의문을 넘어 원초적 욕망을 따라 나서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버려진 곳, 비시대적인 곳, 비문화적인 비도덕적인 곳, 그런  부당한 장소로 간다. 체험주의자에게 가장 순결한 것은 체험 그 자체가 아닐까.  브라이언 터너도 그중 하나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영웅 서사시 ‘길거메쉬‘를 탄생시킨 고대문명의 땅 메소포타미아로 간다.  ’길거메쉬’이후 5천 년이 흐른 후, 이제 이라크라 부르는 땅에서 벌어진 부당한 전쟁을 통해 그는 현대사의 일부가 되고 현대시사의 일부가 된다. 
  이 시집은 전 편이 다 이락크전을 배경으로 쓰여 졌는데 서두를 < 군인의 아랍어>라는 시로 열고 있다. 그 시는 아랍어로 사랑, habib,과  죽음, maut,이라는 단어로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오른쪽에서 왼 쪽으로 써나가는 언어, 다른 언어들이 끝나는 쪽에서 시작하는 언어, 모래바람에 날리는 베일처럼 필기체로 구부러진 그 문자, 피로 만들어진 두 단어 ‘사랑’과 ‘죽음’을 통해 어떻게 언어가 체험 속에서 확장되어 깊은 울림의 내부영역을 갖게 되는가를 말해준다. 아랍 땅에 가서 드디어 사랑과 죽음이라는 언어를 다시 배운 시인, 그는 아랍어와 영어를 잇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공동의 언어, 그 언어의 내부에 충적된 아픔과 욕망과 풍요를 체득한 것이다. 체험이 없는 언어는 체험이 없는 영혼처럼 공허하다. 언어의 무게는 그 언어를 소유한 영혼의 무게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이 뒤섞이는 전선의 체험 뒤 이 시인의 언어는 깊어지고 확장되며 일상 언어에서 시적 언어로, 범인류적 언어로 확장되며 마침내 보다 깊은 의미의 울림을 얻는 것이다. 그 깊은 울림을 지닌 브라이언 터너의 망원경 혹은 총구사이로 보이는 아랍의 풍경은 잔혹함과 비인도적인 거리를 배회하는 바람 같이 부드럽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서정적이기도 하다. 위험에 처한 서정이란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서정적인가. 죽은 뒤에도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사자들, 죽은 자처럼 배회하는 산 자들, 둥그런 지붕의 첨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무심한 까마귀들, 고요히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나무, 강과 모래와 그림자와 군인과 여인들과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서성이는 아랍 땅의 사랑과 죽음이 직접 총을 들었던 군인시인 앞에 그 깊은 곳까지 남김없이 드러낸다. 총구앞에 밝혀지는 따사한 진실을 읽으면 나는 진실은 밝은 빛의 갈망으로만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으로 갈등하는 아픈 갈망 앞에서 더 잘 밝혀지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 < 총알아, 내가 여기 있다> 는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작이다. 이 시는 죽음의 엑스타시까지를 집약해서 보여 준다 데서 눈에 띄게 자극적이며 자학적인 시이다. 시집 전체를 흐르는 인도주의와 서정성과는 다르게 이 시는 국적과 종교를 넘어서 한 인간과 죽음의 마지막 결투의 장을 시화하고 있다. 21세기적 순간성과 즉발성, 환각적 엑스타시의 미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총알은 이미 그 누군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공중을 가르며 날아오는 총알, 죽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진 그 순간, 이미 피할 수 없는 그 상황에 이르러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일 것이다. 피하려 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돌아서 뛸 것인가 결투를 받을 것인가. 오열할 것인가 희열할 것인가. 시속 화자는 두 번째를 택한다. 총알은 이미 화자의 따스한 살과 피와 뼈와 신경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이 총알을 향해 그는 자신의 몸이라는 폭탄을 내놓는다. 그것은 생명이 가진   마지막 무기이다.  화자는 배럴의 목처럼 고통하고 신음하는 스스로의 목숨이라는 그 라이플을 당기는 것이다. 총알은 그렇게 그의 몸을 파고들고 그는 자신을 방어할 하나의 라이플이 되면서 그의 삶은 끝나고 그에게서 플라톤의 말대로 전쟁은 끝이 난다. 죽음에 이른 모든 삶은 기실 완성된 삶이다. 삶의 완성은 죽음이기도 하다. 생과 사는 그렇게 생사일치의 순간에 끝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화자가 겪는 마지막 생의 체험으로서의 죽음은 당당함으로하여 엑스타시를 얻는다. 죽음에서 희열이 본다면 너무 퇴폐적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퇴폐적인 것은 이런 죽음을 유발하는 엑스타시 이전의 계획된 행위들이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전환과 비약으로서의 엑스타시가 아니다. 다다른 죽음을 희열로 받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선택일 수 있다. 전쟁은 발발되었다. 누군가가 총구를 내게 향했고 총알은 나선형을 몸을 뒤틀며 다가오고 죽음은 즉발의 순간에 있다. 이런 불가피한 죽음과 벌이는 마지막 결투의 엑스타시를 어찌 파괴적이고 퇴폐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시인은 시집 전체를 통해 한 번도 종교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석유문제나 부시정부나 빅 코퍼레이션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길거메쉬라는 서사시의 땅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힘과 욕망의 서사가 아니라 이 모든 불가해한 분쟁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서정이다. 잔혹하리만치 고요하고 그로테스크한 전쟁의 내면,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내면이다. 그곳에는 아랍의 영혼과 미국의 영혼이 함께 존재의 성전을 배회한다. 세상이라는 성전, 전쟁이라는 성전을 시인 자신이 배회하며 브라이언 터너는 미국인보다 아랍인의 병사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서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적을 위한 시인인 셈이다. 아랍인이 입이 되어주는 미국인 병사, 적군을 배려하는 군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한다. 나와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 내 것도 아닌 것들, 그런 것을 향해 스스로의 영혼을 내어주고 목소리를 내어주는 이들이 진정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달나라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더럽혀진 땅으로 간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이언 터너의 시


<총알아, 내가 여기 있다>


몸을 원한다면 여기 내가 있다
뼈와 연골과 살이 있다.
소망이 잠긴 쇄골과, 대동맥의 열린 밸브,
시냅스 사이를 뛰어다니는 생각들이 있다.
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아드레날린이 
여기 쏟아지듯 흐르고 있다, 열기와 피 속을 
달려들며 미친 듯 구멍을 뚫는 저 냉혹한 비상.
내 당당히 말하건대, 시작했으면 끝 내거라. 
왜냐하면 총알아 이곳이 바로 내가 한 단어를
완성하는 곳이니까. 네가 허공을 휘이익 가르며
가져온 바로 그 말을 완성하는 곳 
내 몸 속에 있는 라이플을 찾아 
폭발적인 혀의 방아쇠를 당기는 
이곳이 바로 내가 신음하는 차가운 배럴의 식도
나선형으로 돌며 비틀릴 때마다 점점 깊이 
파고드는 총알아, 이곳이 언제나 세상이 
끝나는 바로 그 곳이다.
  
<바디 백>


우리는 죽은 자들 옆에 서 있고
죽음의 까마귀들은 유카립스 나무 위에서 
침묵으로 내려다본다---
죽은 자들은 마치 돌아눕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꿈에서 깨어나 몸을 쭉 펴고 일어서며
그의 머리통에서 말라붙은 피
머리 뒤에 박힌 총알은 대체 어찌 된거냐고
아내와 아이들은 이 아침에 어디간거냐고
대체 윙윙 거리는 이 파리들은 뭐냐고
왜 입에서 납작한 빵과 차이 티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냐고
그들은 의아해 물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른다, 이 새끼야, 이게 마지막이야,
딱딱한 발로 차는 저 낯선 자들은 대체 누구냐고,

14
<유령> 


밤이면 미국 군인의 유령들이
발라드 거리를 배회 한다

집을 찾지 못하고, 지친 영혼들,
사막의 바람이 좁은 골목에
쓰레기를 불려온다, 첨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영혼으로 가득 찬 부름의 소리가 일깨운다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가를

얼마나 길을 잃었는가를, 죽은 이라크인들은
지붕 위에서 말없이 바라본다.
첫 새벽의 바람이 불어올 때

대추야자 나무들이 바닷가에 실루엣을 드리우듯, 
메카를 향해 기댄 채로


<찬가>

월요일 아침, 11시 20분
탑지기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고
갈매기가 티그리스 강을 배회하고 있을 때
그 일은 일어난다.
수인들이 눈을 가린 삼베 자루와 두꺼운 테이프 속에서
서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피아노 느슨해진 코일이 울리듯이 
철조망 아래 그 소리는 반향 한다.
태양이 푸르른 날,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사병 밀러가 그의 총을 들어 입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 소리는 물가의 새들을 쫒고
오렌지 나무아래서는 쪽제비 하나가 멈춘다
아무것도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그의 주변에
희미하게 모여드는 그 무엇도
잡음의 혼란으로 찍찍거리는 라디오 소리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지상의 것들은 모두 정지 한다
사병 밀러가 유카립스 그늘 아래 흐르는 
강물의 낮은  물살을 알게 된   
그 때 그 강가에서


20
<바그다드 동물원>


        세상은 더 안전해졌나요? 이라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스 블릭-

이락크의 북쪽산 갈색 곰이 거리의 한 쪽에서
사람을 물어뜯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그를 끌고 좁은 골목으로 끌고 간다

무거운 바퀴를 굴리며 탱크가 미술관 앞을 지나
석유내각을 향해간다
사자를 지키던 총을 든 자가 말을 쫒아 내려간다.

머리통까지 먹힌 채, 기린은
선사시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들의 목은 비현실적으로
연약하고 21세기로서는 너무 우아하다

달마샨 펠리컨과  대리석 상오리들이 날아오른다
검은 매는 헬리콥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나른다.

도시를 빠져나간 한 마리 비비, 사막에서 발견되었다
초승달꼴의 사구, 바르한 언덕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길을 잃고 어슬렁거리다가 

<군인의 아랍어>

사랑이라는 말, HABIB, 는  
우리가 끝나는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말이 시작되는  왼쪽으로 끝난다.

전쟁이 끝나는 데서 
또 하나의 전쟁은 시작하고
그렇게 역사의 메아리는 그 자신을 반복한다   

죽음이라는 말, MAUT
우리는 알 수 없는 베일 속으로
아랍어처럼 구부러져 들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 언어는 피로 만들어져 언어이다
모래와 시간으로 만들어져 있는 언어이다.

언어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그 언어를 체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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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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