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 임혜신 >

월간 현대시 2008년 9월호

우주적 모성과 상생의 꽃       
                                                                                        대담:  서안나(시인)

임혜신 시인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다.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한 그녀를 나는 강남역에 있는 이국적 정경의 카페에서 만났다. 출국 이틀을 남긴 날이었다. 동해에서 방금 돌아왔다는 그녀는 좀 피곤해보였지만 소녀처럼 맑은 모습이었다. 창밖에는 며칠 계속되는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고 대담자리 내내 현장감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놓칠세라 난 그녀에게 열중했다.

서안나: 임혜신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선 현대시에 <이달의 시인>으로 선정되신 점 축하드립니다. 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네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한국에 오면 어떤가요? 그런데 장마철이라 즐거운 휴가를 보내기엔 날씨가 도움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웃음)

임혜신: 반갑습니다, 안나씨.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쏘다니니까 재미있습니다. 미국에선 그럴 일이 없거든요. 서울에서 처음으로 우산 없이도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줄지은 인파가 모두 우산을 쓰고 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어요. 나도 덩달아 이 우산에서 저 우산으로 비를 피할 수 있었지요. 작은 우산들이 모여 큰 우산을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그게 사람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라고.(웃음)

서안나: 더불어 산다는 말이 좋습니다. 전 플로리다 하면 불타는 듯한 강렬한 태양과 잘 익은 오렌지 나무가 생각나요. 오렌지 드시면서 하루 종일 시만 쓰시는 건 아니겠지요?(웃음)
선생님의 발표하신 “마지막 사과”란 작품에서 거주하고 계신 플로리다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었습니다. 
“무방비의 내 가슴을 들여다보곤 했지 외로운 곳이었어 플로리다, 고향에서 아주 먼 곳” 혹은 “한 이십년 내 곁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고 동그란 빵을 만들어준 이방의 나라” 라는 내용들을 볼 수 있는데요. 고국을 떠나 정착한 플로리다가 선생님의 시창작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임혜신: 그래요 거기 오래 살았으니까요. 제가 사는 곳은 대서양을 향한 바닷가 도시인데 슈가샌드라 부르는 설탕처럼 고운 모래밭이 운동장처럼 넓게 펼쳐있어 조깅하기가 참 좋지요. 남부사람들은 대개 느리고 낙천적이지요. 기후가 좋아서 노인들도 많이 살아요. 그곳에서 딸아이 하나 키우면서 일하고 시도 쓰고 번역도 하면서 살고 있죠. 보스톤을 거쳐 플로리다에 정착한 것이 이제 20년이 훌쩍 넘었으니 내 생이 뿌리내린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뜨거운 태양의 생명력으로 내 고독을 감싸주던 제 2의 탯줄이죠. 어쩌면 스스로 지은 추방이며 탈출이며 자폐의 땅이기도 하구요.
이번처럼 고국여행에서 돌아가면 늘 견디기 힘든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듯이 나의 유배지를 믿습니다. 내 영혼에 햄버거 살을 찌우기도 하고 야자나무 위의 바람으로 내 육신을 푸르게 흔들어주기도 하는 내가 살아가는, 그래서 살아있는 나의 땅인 거죠. 
요즘에는 소유가 부담스러워져서 집도 줄이고 가구도 줄이고 차도 하이브리드로 바꾸었습니다. 일상의 군더더기들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줄이니까 참 마음이 편해져요.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환경이나 사회에도 부담을 덜 끼치는 일 같기도 하구요.

서안나: 네. 저도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과 함께 부드러운 “슈가샌드” 해변을 걸어보고 싶어요. “제 2의 탯줄”이라는 표현이 외국에서 모국어로 시 창작 하는 애로점들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요. 소유를 줄인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소유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일상에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집, 가구를 줄이고 자동차도 하이브리드로 바꾸며 친환경적  삶을 실천하시는 것 같습니다. 환경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듯합니다. 시에서도 생태에 관련된 소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임혜신: 저는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환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환경문제가 심각하거든요. 우리의 아들딸들을 위해서 지구를 보살펴야 할 때가 된 거예요. 고맙게도 20세기에 팽만했던 개인주의는 이제 환경이라는 공동의 화두 속에서 새로운 미덕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구공동체로 함께 살기라는 새로운 철학이 서구에도 등장한 거죠. 이러한 환경에의 관심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멋스러운 일로 간주되기도 해요.

서안나: 미국은 소비가 미덕이었던 나라 아닙니까?  그런 나라의 젊은 층에 환경운동이 번진다니 참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랫동안 문학을 접어두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임혜신: 부끄러운 고백인데 젊은 시절 나는 탐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좋은 문학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 편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또 한편으로 나의 문학이 허망한 탁상공론이며 망상의 쓰레기라는 자책 사이에서 마땅한 길을 찾지 못했었지요. 결국 문학 아닌 것을 찾아 미국으로 갔고 거기서 실용학문인 전자공학을 공부했지요. 공학이 문학을 보완하는 건 물론 아니지요. 다만 나를 괴롭히던 탐미의 파괴성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망상의 살과 뼈, 그 육신을 찾아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 어디에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헤맬 광야를 찾아가 거기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을 하며 헤매야만 되었던 것이겠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젊은 날, 문학의 세월이 탕진이었다면, 공학을 한 시간은 낭비였다는 생각도 하죠. 거꾸로 문학이 연인이었다면 공학은 친구였다는 생각도 합니다. 세상일은 정말 의외의 결과를 낳아놓곤 합니다. 문학을 잊었던 낭비의 십여 년이 탕진으로 지친 내 문학적 영혼에 귀한 필터와 같은 작용을 했으니까요. 그 필터를 거치고 나니 가치에 대한 강박관념도 사라지고 내 문학의 허물과 더불어, 타인의 허물 그리고 나 자신의 허물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할 수 있군요.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그 쉬운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서안나: 네. “탕진과 낭비 사이”에서 밀쳐두었던 시의 의자로 다시 되돌아와 앉으셨군요.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이란 한 문장 속에서 선생님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약간 주제를 돌려 최근 미국의 ‘한인 문학회’ 활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임혜신: 미국에도 한인문학지가 많이 있습니다. <미주문학>, <재미시인>, <해외문학>, <미주시인> 또 뉴욕이나 워싱톤 등지에 많은 지역문학지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아주 많은 분들이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시지요. 이민 1세대에게는 때로 1.5세대까지도 고향을 떠났다는 이유 때문에 애수나 그리움이 일차적으로 시 속에 많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 향수를 넘어서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민문학은 일종의 유배문학이지요. 유배문학은 소외, 격리로 인해 오히려 색깔과 성격이 독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경작해내느냐가 문제지요. 
또 미주의 문인들은 한국문학과 미국문학의 교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미주한국문학의 문학적 심도와 더불어 정치적인 문제, 나아가서는 해외한국인으로서의 외교적 의무를 이야기하곤 하지요. 개개인의 문학적 탐구와 더불어 본국과의 교류 또한 미주한국문학을 위해서도 본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안나: 그러시군요. 최근의 심도 깊은 존재와 존재의 성찰에 관련한 시들이 많이 발표된다고 하니 반갑습니다. 선생님 약력을 살피다보니, <임혜신이 읽어주는 오늘의 미국 현대시>라는 번역 시집이 있던데요. 월간 <현대시>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시인들도 실려 있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미국 현대시를 흥미롭게 접했습니다. 아무래도 문화권이 다르다보면 미국 문단의 특성이나, 문화 차이와 가치관 그리고 표현 등 번역 작업을 하며 느끼셨던 점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또 미국 문단의 상황도 간단하게 알려 주세요. 우리나라 문단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임혜신: 미국현대시를 읽으면서 저는 한국시와 미국시가 언어정서, 표현기술은 다르지만 삶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고뇌한다는 데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문학은 사람의 이야기이니까요. 일상, 사랑, 사회문제, 인종, 전쟁, 환경문제 등으로 고뇌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이야기이라는 것이지요.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어떤 시는 번역을 하면 최소한 20퍼센트 이상 그 향기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거예요. 시에서 20%를 빼면 남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경우 영어로 읽으면 재미있는데 번역을 해놓으면 너무 시시한 겁니다. 결국 번역이 불가능한 경우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번역이라는 다리를 건널 수 없는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는 자리를 옮겨 놓으면 죽어버리는 괴팍한 식물이지요. 
미국과 한국의 문단의 다른 점이라면 미국엔 등단제도가 없다는 게 다른 뿐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한 편의 시로 시인이 되는 절차가 없는 미국에선 발표할 지면을 얻는 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며 책을 출판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영광인 것이지요. 문학상들은 물론 출간된 책을 통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시집 중에서 주는 상도 있고 두 번째 시집 중에서만 주는 상도 있지요. 그리고 미국문단에서도 대학을 중심으로 시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데서 문제점이 거론됩니다. 수많은 문예창작 위크샾이 맥포임 생산지라 하여 맥도날드식으로 똑같은 시를 만들어내는 장소라고 지탄받기고 하죠. 또 문학지 뒤에 몇 페이지씩 실리는 문학상 공모나 출판공모가 쇼일 뿐이라는 거죠. 그런 것들은 대학과 문예창작 워크샾 주변에서 암암리에 결정되어버리니까요. 부당한 것 같지만 또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요. 다만 진정한 독자는 그 이상 것, 즉 살아있는 문학, 학교나 인맥이라는 굴레를 뛰어넘는 ‘생이 낳는 문학’, 원초성을 지닌 개성 있는 문학을 원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것만이 살아남을 진정한 예술이니까요.   
  
서안나: “자리를 옮겨 놓으면 죽어버리는 괴팍한 식물”이라는 말이 실감 있게 와 닿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도 한 권의 소설 번역서를 두고 번역자들 간의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원전 해석에 있어 번역자의 과도한 개입관련 문제를 일간지에서 지상토론식의 논의가 있었는데요. 이런 문제들이 번역가의 괴로움이 아닐까 싶은데요.

임혜신: 어차피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언어에서 독자의 언어로의 번역입니다. 독자의 독자적인 해석이 개입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문학은 수동적 생물체이기도 합니다. 독자의 개입과 번역가의 개입으로 해서 그 생물체는 의미가 더해지기도 하고 빼지기도 하면서 독특한 생물체로서 살아나게 되는 거지요. 가능한 한 원작의 뜻을 살리려하지 않는 번역가는 없을 겁니다. 번역가의 언어능력과 문학적 소양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서안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섬세하고 예리하고 직관력이 강한 점들이 시인의 면모를 다 갖추고 계신 듯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삶의 철학이나 비중 있게 두시는 가치가 있다면요? 그런 것들이 결국 선생님의 시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임혜신: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웃음). 상당히 보수적인 생각인 것도 같은데 저는 잘 살아야 잘 쓴다는 생각을 제 자신에게 늘 일깨웁니다. 평범한 생활철학이지요. 잘 산다는 것은 물론 세속적 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삶을 향한 나름대로의 치열성과 진실성을 말하는 거지요. 시가 안 되는 날은 삶을 점검해보기도 해요. 뜨겁지 않고 용감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으면 답변은 오지 않거든요. 그리고 삶에, 대상에 가까이 갈수록 좋은 시를 낳을 거라고 말하곤 하지요. 시인과의 거리가 연인처럼 가까워질 때 이 세상 온갖 만물은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안나: 가까이 두고 자주 접하는 시인의 작품이 있는지요? 

임혜신: 미국에서도 문화의 오지인 플로리다에 살다보니 한국의 좋은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합니다. 간간 친구들이 보내주는 시집이나, 한국에 올 때마다 사가지고 가는 책들이 대부분 제가 접하는 전부입니다. 미국 시들은 책방에 들러서 읽어보고 또 에세이를 써야할 경우 인터넷이나 대학 도서관을 통해 리써치를 하지요. 개성이 독특한 시면 다 좋아합니다. 미국시인으로는 유머스런 빌리 컬린즈의 시를 좋아하고 시닉한 도날드 홀의 시도 좋아하고 13세기 루미의 시도 무척 좋아하고 게리슨 키일러가 편집한 ‘좋은 시’를 옆에 두고 들춰보기도 좋아합니다. 
한국 시인으로는 근래에 허수경, 김선우의 시집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대적 불안과 존재의 파편성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요즘 시가 내적 서정성을 완성했을 때, 그런 시를 만나는 기쁨도 큽니다. 물론 좋아하지 않는 시도 때때로 읽습니다. 모든 시는 모든 사물처럼 그 자신의 목소리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의외의 만남에서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기쁨을 얻기도 하구요.  

서안나: 본인이 아끼는 작품이 있으시다면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임혜신:. 최근에 쓴 ‘꽃들의 진화’를 좋아합니다. 식물적 자아, 언뜻 생각하면 수동적인 듯하지만 거기에는 동물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한 진화의 깊은 뜻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으나 끊임없이 번식하고 성장합니다. 식물들의 상처 재생능력은 동물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내부에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여분의 에너지조차 있다는 것이지요. 

서안나: 저도 <꽃들의 진화>란 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에서 “꽃이 지구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남는 존재”로 시적화자가 진술하고 잇는데요. 선생님이 “꽃”에 관련된 식물적 상상력과, “꽃”에 부여하는 가치가 독특합니다. 

임혜신: 이상하죠. 꽃이란 말만 들으면 나는 물먹은 초목처럼 살아나는 느낌이예요(웃음). 실은 몇 년 전에 나는 절대불모와 같은 세상에 홀로 던져졌었어요.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런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오래 오래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식물이 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모든 동물적 희망과 욕망을 포기하자 나는 산을 덮어 오르는 또 다른 생명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동물인 내가 동물성을 벗고 식물성을 회복하면서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예요. <꽃들의 진화>는 희망 없이 닫힌 방에서, 외부와의 일체 소통이 끊어진 상태에서 대상없는 그리움의 팔을 열어 미래라는 시공의 산을 점령해가던 내 자신의 내적 생태를 표현했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서안나: 선생님 시에서 “꽃”은 페미니즘적 특성과 연결되면서 자리하고 있는데요. “꽃”을 통해 여성성의 어떠한 면을 부각시키고 싶으셨는지요.

임혜신: 나에게 있어 꽃은 여성성을 넘어서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페미니즘운동 또한 여성을 위해서라기보다 생명을 위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물론 꽃을 생각하면 여성, 혹은 모성이란 말이 생각나고 자연적으로 페미니즘이 생각나고 섹시즘이 생각나고 메일쇼비니즘이 생각나고 성차별이 생각나고 여성이 겪은 역사적 사회적 문제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 고발은 과도기적 문제이고 진정한 여성성의 추구, 혹은 꽃의 추구는 생명의 추구일 것입니다.  또 자아라는 권리의 회복이기도 하지요. 나는 무엇이고 싶은가라는 진지한 성찰이 페미니즘을 더욱 성장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의 생태를 닮은 여성에게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엔 남성들이 배워도 좋을 것들도 많지요. 그러니 페미니즘과 메일쇼비니즘이라는 깃발을 내리고 이제는 생명의 공동문제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페미니즘운동을 남성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깊지요. 진정한 꽃의 소유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메일쇼비니즘이나 섹시즘을 여성이 이해해 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게 될 것 같군요 (웃음). 왜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궁극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꽃이 여성이 아니란 것입니다. 나는 모성도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것이며 생명의 것이며 사물들의 것이며 우주적인 힘이기도 한 것이죠. 무슨 빛깔 무슨 모습이던, 온전한 모습이던 구겨진 모습이던, 스스로라는 존재의 물길을 길어 올려 세상이라는 진흙에서 피어난 모든 것이 바로 꽃이니까요. 

서안나: 네.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생물학적인 성차를 통한 이분법적 파악이 아닌 “생명의 추구”로 파악하시는 면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1990년대 여성시인들이 “몸”이나 “육체적 도발” 등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시를 많이 발표했는데요. 성차를 극복하고 진정한 모성성 내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여성성의 지향도 중요하게 남겨진 과제라 생각됩니다.
선생님 작품 중에는 ‘죽음’이나 “노인”에 관련된 소재 또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과’란 작품이나 “여든 여덟 살”등의 작품에서 노인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노인들을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으면서 죽음을 즐겁고 당당하게 맞이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늙은 노인의 몸에서 파란 잎사귀들이 자라는 등의 생성과 소멸이 혼재된 노인의 몸과 그 몸에 내장된 소년 이미지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노인”이란 존재들이 새로운 생명과 연결되는 매개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선생님만의 신선한 해석으로 읽혀졌어요. 불교적인 ‘연기론’ 혹은 ‘순환적 세계관’이 엿보입니다. 특히 ‘삼나무 숲’이란 작품에서도 죽음에 대한 개성적인 사유가 읽혀지는데요.

임혜신: 신선하게 읽어주니 고맙군요.(웃음) 그래요, 나는 시간과 공간 또 그것을 넘어서는 높은 차원의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하죠. 그것은 불교적이며 지극히 현대적 사고이기도 합니다. 매슈 리카드와 트린 타우완이 공동 집필한[양자물리학과 연꽃]이라는 책은 불교와 현대 물리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지요. 모든 게 하나이니 삶과 죽음은 서로를 보완하는 하나의 수레바퀴일 수밖에요. 또 산다는 것은 죽음의 연습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겪는 상실과 실패와 이별이 다 그런 것이지요. 내 것이라 믿었던 것은 어느새 우리의 손가락을 빠져나가지요. 아름다운 순간은 곧 사라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작은 죽음을 경험하지요. 그러나 한 순간이 죽고 또 한 순간이  태어나는 그 장소에서 우리는 영원이라는 신비의 열매를 보기도 하죠. 그렇게 노인과 소년을 태운 눈 먼 영원의 수레바퀴는 시작과 끝을 맞물리면서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서안나: 선생님의 발표작 중에 “미술관에서”란 작품에서는 문명비판과 사회비판적인 시선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 이외의 여러 작품에서도 역시 사회 현안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선생님이 시가 더욱 묵직한 무게감을 갖는다고 생각됩니다. 시사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신 것 같아요. 특히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임혜신: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세상의 문제들을 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날마다 들리는 것, 보이는 것이 차별의 문제지요. 불평등이 없다면 시도 없겠지요( 웃음) 우리가 사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시인은 위를 넘보는 존재가 아니라 아래를 어루만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사를 다루는 시적 꼴라쥬에는 언제나 숨은 목적이 있을 겁니다.  <미술관에서>란 작품에서 부드러운 육신의 연인으로 부활하는 할로그램이 그것이죠. 일종의 구원입니다. 종교적 구원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의 내부에서 찢어진 현실로 일으켜낸 구원이지요. 허무한 구원일 수도 있으나 인간적인 구원이기도 하죠.

서안나: 네. “소외”와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질문을 드린다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이란 작품에서는 실업의 문제와 관련해 빈곤층을 소재로 한 작품도 볼 수 있었는데요.

임혜신: ‘언덕 위의 하얀 집’이란 시를 말씀하시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이가 결국은 천국에 간다는 말을 무척이나 하고 싶었는데 이 시에서 해버렸기 때문이지요( 웃음). 이 시는 안나씨 보신대로 빈곤층의 문제이며 그들의 영혼의 심원에 흐르는 구원에 가능성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나’는 겨울 언덕을 걸어오는 세상의 남자를 기다리는 우주 혹은 자연이라는 냉철한 모성으로서의 구원의 손길이기도 합니다. 소외된 사람들은 천국을 꿈꾸며 혹은 의심하며 생이라는 힘든 언덕길을 오르고 있지요. 언덕 위에서 천국으로 대변되는 ‘나’라는 모성이 무감각한 문을 환하게 열고 기다리고 있구요. 무감각하다 하는 것은 이 모성이 핏줄로 이어진 끈끈한 모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감싸줄 마지막 장소로서의 우주적 모성인 때문이지요. 그 모성은 내가 꿈꾸는, 혹은 제공하고 싶어 몸살을 앓기도 하는 기묘한 평등론이기도 하지요. 기독교적인 천국은 아니고 인과를 벗어난 영원한 죽음, 혹은 영원한 사라짐이라는 불교적 해탈에 더 가깝겠습니다.    

서안나: “인과를 벗어난 영원한 죽음” 그리고 “우주적 모성”이 바로 선생님이 추구하는 시세계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과 전쟁에 관련해서 선생님의 작품 중 “테러” 연작시들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작품의 정황상으로 볼 때, ‘911 테러’를 소재로 하여 쓰여 진 시 같았습니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하여 그리고 지구상에 발발하는 전쟁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혜신: 하루도 전쟁이나 테러라는 말을 듣지 않는 날이 없으니 관심이라기보다 차라리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연작시들 중 몇 편은 911 특집 청탁을 받고 쓴 것입니다. 나머지는 테러리스트의 입장에서 쓴 것입니다. 아직도 이라크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루지아와 러시아가 무력분쟁을 시작했지 않습니까. 전쟁, 기아, 인종차별, 계층 간의 양극화 현상 등의 문제는 사실 날로 심각해갑니다. 생존불가능의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테러 속에도 아이를 낳은 어머니, 죽음의 직전까지 꿈꾸는 영혼들,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불법이민자들은 모두 나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요. 사회적 문제를 벗어난 아이덴티티는 자아를 벗어난 아이덴티티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서안나: 최근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등 다양한 문제들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데 있어서 해결해야할 이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배려와 껴안음이 곧 상생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상생의 철학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자주 등장하는 소재중의 하나인 “꽃“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도 언급 되었지만, 어쩌면 1시집을 관통하는 소재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시집의 제일 처음에 실린 <하얀 난>에서도 “이 세상 모든 고뇌를 꽃이라 부르겠다”란 구절이 있는데요. 선생님에게 “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임혜신: 상생의 철학이라 참 귀에 향기로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 모든 고뇌를 꽃이라 부르는 것도 상생의 한 방식일지 모르겠네요(웃음). 그러나 내게 있어 꽃은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는 평이한 사랑의 목소리입니다. 온갖 불평등과 아픔과 싸움을 딛고 마침내 피어나는 자비이지요. 꽃 속에는 욕망과 유혹과 아픔과 후회와 죄와 속죄와 구원에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 모든 복잡한 인간사를 뚫고 꽃은 피어남으로서 인간의 고통을 완성시킵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아름다움으로 꽃은 죽음 속에서도 피어나고 사막에서도 피어나고 썩은 물속에서도 몸을 일으켜 피어나지요. 스스로 아픔이며 슬픔이며 죄인 줄 알면서도 더러운 세상사 차별 없는 진흙탕의 손을 이끌어 끝끝내 꽃이 되고 말지요. 내게 꽃이 매혹적인 것은 그 안에 담긴 이러한 세속성 때문이며 그것을 절정으로 밀어올린 그 순도 높은 열정 때문이며 또 하릴없이 질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도도함 때문이지요. 상생이란 목적은 없으나 이러한 꽃들이 바로 상생의 땅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해요.

서안나: 아마도 마지막 질문이 될 듯합니다. 틀에 박힌 질문이지만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웃음) 선생님께 시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요?

임혜신: 어쩌면 시는 내 영혼의 몸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나의 영혼에 몸을 부여하는 작업이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의도적 작업이지요. 

서안나:네. 선생님, 우문현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시세계와 더불어 선생님의 삶과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인터뷰에 열중하느라 맛있는 커피가 다 식어버렸네요. 그리고 바쁜 시간 중에 선뜻 사진 촬영을 도와 준 박영민 시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덕분에 대담자리에서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선생님의 내면까지 포착해낸 멋진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디카를 살펴보니 사진들이 아주 잘 나왔는걸요. 짧고 촉박한 휴가 일정 일 텐데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좋은 작품 많이 쓰시구요. 즐거운 여행길이 되길 바랍니다.

임혜신: 안나씨, 영민씨 감사합니다. 헤어지기 섭섭하군요. 미국에 돌아가면 그대들이 추천해준 한국영화 꼭 다운받아 보리다. 언젠가 와인 한잔 마시고 슈가샌드를 함께 걸으며 영화이야기도 하고 그림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이야기를 마치고 있을 때도 창 밖에는 폭우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근처의 맥주 집에서 세 종류의 맥주를 시켜서 한잔씩 마시고는 헤어졌다.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수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으며 원고를 완성시켰다.

사진) 박영민시인



월간 현대시 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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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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