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사랑, 안전한 섹스

2009.09.02 11:17

임혜신 조회 수:32

[해설]  임혜신

                     

      불온한 사랑, 안전한 섹스



                              -나는 X를 원했다. 
                              그러나 X가 내게로 오자 나는 달아나길 원했다-
                                     -도날드 홀의 시 <유배> 1953에서-

   

[안전한 섹스] -전문=


                            도날드 홀
                            번역 임혜신



만일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다시 만날 일 같은 것은
아예 없을 것이라면; 그 남자가 사랑이 담긴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여자는 내면이 아주 무감각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욕망하는 것이
단지 서로의 울부짖음이라는 공물뿐이라면; 옛사랑에 대한 복수나 

일종의 권리의 요구나 냉정함으로만 그들이 만났던 것이라면-
그러면 배신이란 없을 것이다, 읽지 않고 돌아오는 편지도 없을 것이며

광란의 아픔도 없을 것이며, 영원히 상처로 남을 말들을 퍼부어대는 일도
몸을 떨며 전율하는 날들도, 한 밤중에 토하는 일도, 그리고

연못가에 엎드려 떠다니는 시체 유령의 반복되는 
출몰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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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프로스트를 이은 전통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도날드 홀의 시 전집을 뒤적이다가 지금은 팔십 세가 되었을 그의 삶을 생각해본다. 1928년 뉴잉글랜드에서 태어나 하바드와 옥스퍼드를 졸업한 그, 첫 번째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고 1972년 19살 연하이며 제자이었던 시인 제인 케년과 결혼하여 1995년 제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햄프셔의 전원에서 시인커플로 늙어간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긴 겨울이 시작되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뉴햄프셔의 농장, 소년인 그가 첫 번째 시를 쓴 곳 그리고 그 스스로 세기의 시인이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젊은 아내와 23년을 지낸 곳, 그 자신은 암과의 투병에서 살아났으나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젊은 아내를 지켜보아야 했던 그,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시를 쓰는 도날드 할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해본다. 그 누구의 일생이든 일생이란 말은 내게 수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끝나가는 혹은 다 채워진 그릇으로서 ‘일생’이란 그 자체로 얼마나 절묘한 서사인가. 하물며 시인의 일생이라니. 그의 시간을 채워온 수많은 생의 편린들이 내 상상 속에서 바람처럼 불어 닥친다. 
도날드 홀은 전통파라 불릴만하게 전원적 정서를 노래했고 고대 서사시적 웅장함으로 장시로 써내기도 했고 회고적 시인이라 불릴만하게 사적인 지난 일들을 시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시에서 읽은 것은 전통과 전원성의 근저에 밑그림처럼 깔린 인간 존재 야성성 이다. 야성도 자연일진대 자연이라 하지 않고 야성이라 하는 것은 순응과 순리보다는 모진 체험의 적극성이 그의 시에 내재한 때문일 것이다.  아닌 예를 들어<소달구지 농부>를 보면 전원을 배경으로 한 시이지만 전원의 풍경을 넘어서는 생의 치열성이 보인다. 농부가 그가 경작한 농산물만 팔았다면 평범한 전원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농부는 감자와 꿀과 식초를 팔고나서 달구지를 팔고 소를 팔고 안장까지 팔았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판 것이다. 문자 그대로 완전한 알 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이 농부는 단순한 농부가 아니라 냉엄한 자연이다. 자신의 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팔고나서 무소유, 절망, 파멸, 혹은 완전한 파산신고 같은 일종의 정신적 혹은 물질적 제로상태에 이르고 거기서 아무 마찰과 저항도 없이 다시 달구지를 만드는 노동을 시작하는 일은 기계적일만큼 충실하게 지속되는 자연의 사이클, 인간의 지지부지한 감정을 품지 않은 야성적 존재의 사이클인 것이다. 그의 짧은 시들이 사랑받는 이유는 이처럼 평범한 단어 속에 함축된 복잡하고도 심플한 뉴앙스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그의 시 속에는 보일 듯 말 듯 확연히 드러나는 묘한 야성적 힘이 있다. 생명의 원초적 힘으로서의 야성을 가진  황야의 이리가 그의 시안에 갇혀 있다. 그 이리는 쾌락과 배반과 늙음과 패배와 비굴까지를 관찰하고 또 수락한다. 존재의 천적성을 누리는 동시에 그에 수반하는 죄와 위험과 고통을 견디는 그것은 아무 우선권이 없는 실존과 현상으로서의 야성인 것이다.  
   우스꽝스런 연설처럼 쓰여진 시 <물고기에게 민주주의를 >도 언뜻 보면 공생 공존의 모토아래 가식적으로 살균된 세상의 비민주성, 비개인성의 공격으로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이 시는 공격성을 갖고 있지 않다. 통제사회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더 심한 말로 시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신 이 시를 읽고 나면  본원적 천적성과 그것을 거세한 착한 공동사회를 동시에 갈망하는 인간존재의 희비극성을 생각하게 한다. 시 속의 물고기는 물론 인간이고 양어장은 통제된 사회이다. 물고기와 다름없는 우리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모든 식물을 먹고 또 동물들을 잡아먹는다. 잡아먹는 자, 즉 먹이라는 대상의 천적으로 산다는 것은 바다라는 자연의 프레임 안에서는 죄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군락을 이루어 생태계를 유지해가는 미덕일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왕국을 보며 도덕성을 들먹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연에서 스스로를 구별시켜 안정과 통제의 구조적 양어장을 만들어온 인간세계에는 자연의 법칙에 제동을 거는 또 다른 규율이 있다. 양어장이라는 통제되고 축소된 프레임 안에서의 천적적 행위는 사회생태계를 흔들어대는 살생의 악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찰나적으로 가늘고 미세한 선으로 구분되는 미덕과 악덕을 동시에 살아간다. 어디까지 자연이어야 하고 어디까지 순한 인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한 채 이중의 스탠다드 안에서 꿈꾸고 시달리고 고뇌하며 사는 것이다. 야성을 원하는 동시에 통제의 보호와 공생을 갈망하는 인간의 생존영역은 바다도 양어장도 아닌 중간지대이다. 기실 동물성과 신성이 영원히 갇힌 상징의 연옥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갇힌 바다이면서 양어장인 인간세상인지 모른다.     
  야성을 가진 자는 끊임없이 탈출하고 또 방랑한다. 그것은 장소를 옮겨 다니는 유랑일 수도 있고 정신적 탈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인은 후자적인 탈출을 유배라 부른다. 떠남이라 하지 않고 유배라 부르는 것은 떠남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유일한 길이었던 때문일 것이다. 방랑은 어느 만큼 자율적인 것이겠으나 유배에는 강제성, 운명성이 담겨있다. 1953년에 썼던 장시를 단 세 줄로 줄여서 1968년에 개작한 <유배>는 그의 그런 사유체계를 잘 보여준다. 이 시를 읽어보면 그의 유배는 공간적 유배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내적인 유배이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뒤로 남긴 채 떠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떠났고 그러면서 울었고 또 잊었다고 한다. 그런 아픈 떠남 속에서 새 거리를 만났다고 한다. 그것은 감정의 사슬을 떠나는 영혼의 유배이다. 부여잡고 싶은 애착의 순간을 떨쳐 일어나는 인간적이며 또 비인간적인 선택의 순간을 이 시인은 유배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유배를 새 길과 연관시키고 치유와도 연결시켰다. 내면 속의 한 마리 이리가 또 한 마리 이리를 쫒아내듯이 스스로를 또 하나의 스스로에게서 유배시키지 않았다면 그가 걷는 거리는 다만 소멸하는 과거의 거리였을 것이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생이란 유배라는 아픔의 연료를 태우며 쉼 없이 달리는 황야의 기차인 것이다.    
   또 그의 시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가  <안전한 섹스>라는 시이다. 제목이 주는 첫인상과는 달리 섹스에 관한 시가 아니라 연애시이며 사랑시이다. 제목부터 눈길을 끌지만 소위 튀는 현대시가 아니다. 이 시에는 외설적이며 고전적이고 퇴폐적이며 순정적인 사랑행각의 속성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의 시를 우리가 대하는가. 그 중에 이 시가 눈에 와 닿는 것은 도날드 홀만이 할 수 있는 풍자도 역설도 아닌 묘한 시작법이다. 내가 끝내 마땅한 단어를 찾아주지 못한 그의 시작법에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내적 구성이 있다. 이 시를 살펴보면 안전한 섹스는 뒤에 탈을 불러오지 않는 섹스이다. 그것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뜨겁게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이 없는 냉정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섹스이다. 바꿔 말하면 안전한 섹스는 불온한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이 시인은 인간의 뜨거운 심장이 고통을 불러오는 화근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역으로 아플 줄 모르는 존재란 결국 냉혈의 존재라는 것을 일러준다. 이 세상 모든 관계란 대부분 평탄하지 않다. 관계란 관계 이후를 만든다. 그래서 슬픔과 미움과 원망이 생겨나고 어떤 이들은 한탄하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왜 사랑은 계속될 수 없는가, 의문하며 비관하기도 한다. 시인은 왜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면서  싸움과 죽음까지를 불러온 관계의 원천은 사랑이라는 따스한 샘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비록 ‘사랑으로 고통 받는 그대에게’라는 식의 달콤한 서두로 시작하지 않지만 사랑으로 고통하고 있거나 고통 받았던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그대가 한 때 사랑하였으나 지금 무슨 연유로 늦은 밤 술에 취해 어느 골목길에서 방황하고 있거나 혹시라도 알약들을 손에 쥐고 있다면, 아니면 저 언덕아래 어둡고 깊은 죽음의 호수를 향해 느리게 차를 몰아가고 있다면, 그렇다면 내 노래를 들어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의 고통이 그대가 얼마나 따스한 인간이었는가라는 증거란 것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죽음을 향해 차를 몰던 이가 천천히 새 삶을 향해 차를 돌릴지 모른다. 불안전한 인간의 사랑을 위해 다시 한 번 이 세상으로 유배처럼 돌아올지 모른다. 
   이처럼 따스한 인간애와 야성을 동시에 가진 그러나 야성의 힘으로 인간애를 정의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뉴햄프셔의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는 한 그루 고목을 생각한다. 몸을 웅크려 근육을 타이트하게 조이면서 겨울을 준비하는* 그의 밤 꿈속에 열려있는 눈발이 흩날리는 대지를 생각한다. 홀로 남은 차고 굳은 손가락을 느리게 올려 검은 나뭇가지에서 마지막 하프를 타는 저 늙고 아프고 꿋꿋한 야성의 겨울은 아, 얼마나 매혹적인 생명의 속성인가.




* 도날드 홀의 시 <웅크림>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도날드 홀의 시들
             


[유배]  (1968)


나와 함께 놀고 이야기 하고 책을 읽던 소년은
단풍나무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으나 그녀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울었고 그리고 잊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그 거리를 나는 걸었다.
모든 거리는 새로 난 길이었다.

8



[하얀 사과]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일주일 되는 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창백한 빛의 문을 응시했다

하얀 사과 그리고 돌의 맛

만일 아버지가 다시 부르신다면
나는 코트를 입고 고무장화를 신을 것이다.







[물고기들에게 민주주의를]



물고기가 물고기를 먹고 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우리는 안전하고 튼튼한 
담을 쌓은 양어장 안에서 그들을 보호하며 천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의 자유를 
돌볼 것이며 건강과 행복과 영양분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모든 존재가 다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숙기에 이르면
그들은 삶의 의미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소달구지 농부]


매년 시월이면
그는 갈색 땅에서 캐낸 감자를 센다.
씨앗을 골라내고 저장할 것을 갈라놓고
남은 것은 소달구지에 싣는다.

4월에 깎은 양털을 싣고
꿀 주걱과 꿀을 싣고 린넨과 볕에 그슬린
양가죽과 대장간의 화덕 곁에서 손으로 
만든 배럴에 식초를 담아 달구지에 싣는다.

소와 함께 열흘을 걸어
그는 포츠마우스 장터로 간다. 감자를 팔고
감자를 담았던 자루를 팔고 아마인 씨와
자작나무 빗자루, 단풍나무 설탕, 거위깃털과 실을 판다 

달구지가 다 비면 그는 달구지를 판다.
달구지를 팔고 나면 소를 판다
그다음에 마구와 멍에를 팔고 그리고 
집으로 걸어 돌아온다. 그의 주머니에는 
일 년치의 소금과 세금을 내기 위한 동전이 가득하다

집에서 그는 싸늘한 11월의 장작불빛아래 
내년에 헛간에 들일 소를 위해 
새 마구를 만든다.
멍에를 자르고 새기며 다시 달구지를 
만들기 위해 나무판자를 톱질한다. 

       
   good poem 161

번역/해설 임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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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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