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 읽기 [독자 고르기]

2008.01.05 10:58

임혜신 조회 수:276

테트 쿠저의 [독자 고르기]



먼저 아름다운 여자여야 해,
아주 외로운 오후의 한 순간
나의 시 앞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걸어와야겠지.
막 감은 그녀의 머리는 목선에 아직 
촉촉할 거야. 레인코트를 입고 있어야겠지. 낡고
더러운 레인코트, 돈이 없어서 세탁소에 맡기지
못했을 거니까. 그녀는 거기 그 책방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책들을 더듬어가기 시작할거야. 
하지만 책들을 다시 제 자리에 꽂아놓으며
혼잣말을 하겠지, “ 이 돈이면 레인코트를 세탁할
수 있겠는걸.“ 그리고 그녀는 코트를 세탁할거야.


        매년 플로리다에 몰아치곤 하던 태풍이 올해는 플로리다 남부를 거쳐 미미시피강 하구의 뉴올리언즈를 강타하고 말았습니다. TV를 통해 몇 주째 허리케인 피해와 복구과정, 그 속에 얽힌 개인적 비극들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더불어 들려오는 소수민족과 빈민층차별에 대한 경악할 일화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게 합니다. 최소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또 흑인도 백인도 권력자도 걸인도 평등한 줄 알았던 것도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조금이나마 자연재해의 피해를 미리 알고 막거나 최소한 줄일 수 있게 된 것은 더할 수 없이 좋은 일이나 결국 바로 그 이유로 자연재해 속에서도 사회문제, 계층 차별과 인종의 차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뉴올리언즈의 태풍은 폼페이의 지진과 달랐습니다. 폼페이의 지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의 태풍은 결과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격이 된 것입니다.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자와 피할 수 없는 자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태풍 카트리나의 치명적 피해자들은 대부분 도피할 수 없었던 가난한 흑인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서둘러 구조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에 인간이 개입하면서 자연조차 인간 평등을 외면하고 말게 된 것, 이것은 문명사회 시스템의 서글픈 면모의 하나일 것입니다. 
       소리 없이 잎 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을의 첫 길목에서 태풍 카트리나가 할퀴고 간 자리를 지켜보면서 문학과 금권에 대해 잠시 생각해봅니다. 문학은 언제나 정치나 금권의 힘에서 밀려난 약자이며 버려진 자이며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문학예술의 영토는 가난하고 소외 받은 자들 속에서 우러난 아름다운 비극의 노래인 재즈, 그런 재즈를 만들어내는 뉴올리언즈의 흑인들처럼 풍요로운 가난의 땅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로 이 풍요로운 가난이 문학을 가치 있게 하고 명예롭게도 하고 또 떳떳하게도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개하는 시 [독자 고르기]라는 시를 쓴 시인 테트 쿠저는 2005년 현재 미국의 계관시인입니다. 1995년 퓰리쳐상을 받은 그는 미국 시인 중 짧은 시들을 가장 잘 쓰는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속의 인물이나 상황묘사는 아주 정갈하고 깨끗하고 놀랍게도 정밀합니다. 시적 감각이 치밀하고 섬세한 것에 아울러 생명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이 시는  ‘밤의 비행’ 이라는 시집의 첫 장에 실린 시인데 이 시인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뛰어난 짧은 시중의 하나입니다. 제목은 [독자 고르기]라고 되어있으니 인 테트 쿠저가 선정한 가장 좋은 독자고르기 콘테스트의 선발기준은 무엇일까를 먼저 알아봐야겠습니다.  테드 쿠저는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를 천천히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난해서 입고 있는 레인코트를 세탁하지 못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좋은 독자가 꼭 가난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다만 이 시인은 바로 이 구절을 통해 황금주의와 물질주의의 화려함과 오만에 거부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금은 편리하나 마음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갈수록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랑과 마음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들 하니까요. 그러나 이 편리한 황금이 때때로 사람을 얼마나 천박하게 만들고 마는지요.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좋은 독자로서의 첫 번 조건은 황금에 눈이 멀지 않은 순수한 사람, 황금과 유희를 해보지 않은 그러한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없다고 다 좋은 독자는 아닌 것입니다. 이 시인이 원하는 독자는 가난하지만 시를 읽는 사색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두 번 째 조건입니다.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 시인에게 매력적인 독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세 번 째 생활경제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금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문학을 사랑하고 삶의 경제를 아는 사람이 바로 이 시인이 자신의 시를 통해 만나고 싶은 독자인 것입니다.
     세 가지 조건이 다 재미있지만 이 시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역시 세 번 째 조건입니다. 책을 사는 독자가 아니라 사지 않는 독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쓸쓸한 오후, 책방에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던 독자는 아마 테드 쿠저의 책이 사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테드 쿠저의 시들은 이 독자처럼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아주 따스하고 깊은 시선으로 조명해내고 있으니까요. 책값이 얼마쯤 했을까요? 한 15불쯤 했을까요? 하트커버였다면 25불쯤 했을까요? 독자는 뒤표지에 적힌 값을 보고는 생각에 잠깁니다. 살까? 말까? 결국 그 돈이면 코트를 세탁소에 맡길 수 있겠다 싶어 독자는 책을 도로 꽂아놓습니다. 이 시인은 정말 책을 사지 않는 이런 독자를 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인은 독자의 조건으로 생활과 예술의 건강한 경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돈과 편리만 알고 시와 예술을 모른다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책에 너무 빠져 옷도 세탁하지 않고 책만 사들인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겠지요. 책의 소유는 또 하나의 물욕일 테니까요. 문학의 소유, 시의 소유는 책의 소유와 엄연히 다르니까요. 문학의 최상의 목적은 영혼의 나눔이지 책이라는 상품의 판매나 소유는 아니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 독자는 진지하고 독립적이며 건강한 생활인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고상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며 동시에 또 상당히 경제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제란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된 눈먼 자들의 경제가 아니라 영혼과 삶과 옷과 빵을 삶 속에 적당히 분배, 유통시킬 줄 아는 지각 있는 생의 경제를 말합니다. 레인코트라는 물질이 시라는 영혼을 품지 않고 세탁이라는 경제 행위를 택한다면 서글픈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이 독자는 책은 감동이라는 영적인 것으로 가슴에 품고 책값에 해당하는 물질로는 생활의 필요물인 레인코트를 세탁한다는 데서 재미있고 좋은 독자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경제성과 아울러 이 시가 암시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문학의 가치에 관한 문제가 되겠지요. 이 시인은 자신이 심열을 기울여 쓰고 묶어 하나의 시집과 한 여인의 더러운 레인코트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문학지상주의자의 견해라면 옷을 세탁하는 일과 책을 사는 일의 비유는 문학에의 모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옷이야 찢어졌던 낡았던 더럽던 간에 문학이 먼저여야 하니까요. 문학은 이 모든 자잘한 생의 필요와 욕구들을 이기고 태어나는 불사조 같은 것이어야 하니까요. 생의 모든 것을 다 넘어선 생의 모든 것을 다 불타올린 후에 생기는 한 마리 새, 그것이 또 종종 사실일진대 문학 창작자의 이러한 오만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문학은 그런 오만의 불 속에서 태어나는 불새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멋진 불새라도 저 세상으로 날아가 버리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을 아는 이 시인의 불새는 이 세상으로 날아듭니다. 그 불새는 오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불새는 이 세상 것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불새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불새, 즉 이 시인의 문학은 그 모든 특권을 거부합니다. 한 여인의 세탁비와 비교되는 책값, 값과 가치의 저울질에서 지고 마는 책 값, 그러나 이 시인은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야말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의 불새는 세상을 타 올리는 동안 세상의 모든 일상사들이 시라는 위대한 불새만큼 혹은 그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큰 불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빵과 비교해서, 옷과 비교해서, 신발이나, 어쩌면 예쁜 장식품과 비교해서조차 이길 생각이 없는 이기기를 원치 않는 낮고 큰 불새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불새 입니까? 낮게 낮게 엎드린 이 커다란 불새의 시 앞에서 가슴이 훈훈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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