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 읽기 -완다와 폭설

2008.01.05 10:58

임혜신 조회 수:268

폴 짐머는 1934년 오하이오에서 출생했다. 지난 25년간 학술지 출판일을 해왔으며 세 개의 대학출판사( 피쯔버그, 아이오와, 그리고 조오지아 )의 시선집 시리즈를 편집을 해왔다.  ‘가족모임: 폴 짐머 시선집’ 으로  American Academy and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로부터 문학상을 받았고 “사랑의 위대한 새‘는 National Poetry Series에 선정되었다. 그는 세 번의 Pushcart상과 국제예술기금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위스콘신주의 농장에서 지내고 있다.


Lester Tells of Wanda and the Big Snow

                                Paul Zimmer

Some years back I worked a strip mine
Out near Tylesburg. One day it starts
To snow and by two we got three feet.
I says to the foreman, " I'm going home."
He says, "Ain't you stayin' till five?"
I says, ' I got to see to my cows."
Not telling how Wanda was there at the house.
By the time I make it home at four
Another foot is down and it don't quit
Until it lays another. Wanda and me
For three whole days seen no one else.
We tunneled the drifts and slid
Right over the barbed wire, laughing
At how our heartbeats melted the snow.
After a time the food was gone and I thought
I'd butcher a cow, but then it cleared
And the moon came up as sweet as an apple.
Next morning the ploughs got through. it made us sad.
It don't snow like that no more. Too bad.


Wanda(완다)와 폭설


                                폴 짐머

몇 년 전, 타일러스벅 근처 노천광에서 일했었거든.
하루는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두 시경엔 세 자가 내린거야.
“집엘 가겠습니다”라고 십장에게 말했지.
십장이 “다섯 시까지 기다리지 않겠어?”하더군. 
“집에 가서 소들을 돌봐야해요” 하고 둘러댔지.
완다가 어찌해서 집에 와 있는 지는 말하지 않았어.
네 시쯤 집에 다다랐는데 그간 눈은 
한 자는 더 내렸고 그리고도 또 내리고 또 내렸어.
완다와 나는 삼 일간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
눈더미 속에 굴을 뚫고 가시철사 담을 넘어다니며 
눈을 녹이는 심장 소리에 얼마나 웃어댔던지.
음식이 동나버리자 소를 잡을까 생각했었지.
그때 그만 날이 개이고 사과알 같이 달콤한 달이 떠올랐어.
다음날 아침 제설차가 도착했는데, 슬프더군.
요즘은 눈이 그렇게 오지 않아. 다 그런 거지 뭐.

이곳 플로리다엔 봄비가 내리고 있다. 따스하고 나른한 습기 속에 갇혀 나는 ‘좋은 시’라는 제목을 가진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아본다. 두 권의 책 중 하나는 저명한 시인들이 가려 뽑은 ‘올해의 좋은 시’이고 또 하나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모은 ‘좋은 시선집’이다. 전자는 대개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아프다고 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어둡고 두렵다고 한다. 후자는 그냥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한다. 세상이 그렇게 아픈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깊이’를 저울질하는 저울의 양쪽에 책을 하나씩 올려놔 본다. 습관이 아니면 강박관념일 것이다. 깊이를 재고 싶어하는 것. 슬픔의 깊이, 기쁨의 깊이, 진실의 깊이, 어둠의 깊이, 기억의 깊이, 원한의 깊이, 그리움의 깊이, 희망의 깊이, 욕망의 깊이 그리고 사람의 깊이, 풀잎의 깊이, 철학의 깊이, 시의 깊이를 열어봐야 직성이 풀릴 듯한 것. 두 권의 책 사이로 깊이의 저울추를 이리 저리 옮겨 놔 본다. 전자의 깊이, 후자의 깊이를 저울질한다. 오늘만큼은 기꺼이 후자의 깊이를 택하기로 한다. 그렇게 깊지는 않아 보이는 깊이, 그렇게 아플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깊이, 그런 깊이 없는 깊이를 택하기로 한다. 그래서 시인이 고른 좋은 시를 밀어두고 라디오 진행자가 내놓는 좋은 시를 내 앞으로 끌어당긴다.  
‘좋은 시선집’은 공영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의 하나인 ‘작가연람’의 저자이며 진행자인 게리슨 카일러가 그간 방송해온 시 가운데에서 간추려 엮은 책이다. 작가연람은 아침마다 5분간 시를 방송해 보낸다. 미전역, 대부분의 도시로 방송된다. 섭섭하지만 내가 사는 잭슨빌 공영방송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않는다. e메일로 받아볼 수는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편집자는 ’붙어 다니는‘이라는 말로 ’좋은‘이라는 말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듣는 이들의 가슴에 닿아서 금새 일부가 되어버리고 마는 그래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그것을 시의 가치와 관계 짓는다. 가슴에 닿는 것은 순식간에, 그러나 머무는 것은 오래인 그런 시가 좋은 시일 것이라 한다. ’좋은 시선집‘의 시들은 아무리 공영방송이라지만 방송용 시이므로 선별과정에서  최소한의 광고 같은 침투력과 시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침투력과 시사성은 오히려 좋은 시라는 자건거의 튼튼한 페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작가연람’의 청중은 문학인 컨퍼런스나 시인학교나 대학강의실에 앉아 있지 않다.  ‘작가연람’의 청중은 아침에 달걀을 후라이하거나, 소세지를 볶거나, 신문을 읽거나, 아마도 막히는 출근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생활인이다. 보통사람들이다. 그런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단 5분간에 빠르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 일상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어  ‘막무가내로 매달릴 수 있는 시’는 인공의 예술이기 이전에 따스한 우리의 살점일 것이다. 우리의 살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는 자연이고 공기이고 매연이고 점심도시락일 것이다. 오래된 기억처럼 편안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들어온 뉴스처럼 싱싱한 상처를 가진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 ‘매달려보고 싶게 하고’ 우리에게 ‘매달리는’ 우리들의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 소개하는 ‘ 완다와 폭설’은 노천광에서 일하던 막노동자의 완다에 관한 기억이다. 시인 폴 짐머는 종종 조금 모자라는 듯한 대상을 통해 조금은 어눌하고 쉬운 어투로 삶의 바닥을 뒤집어 보여준다. 이 시 또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쉽다. 배우지 못한 사람사이에서 쓰이는 구어체 그대로라서 원문은 문법도 맞지 않는다. 내용을 살펴보면 보면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또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완다라는 여자를 집에 두고 온 한 노동자가 조퇴를 하고 집으로 갈 생각을 한다. 십장에게는 암소들을 보러간다고 둘러댄다. 여기서 암소는 진짜 암소를 말할 수도 있고 아름답다기보다는 건강하고 튼튼한 암소 같은 여자를 말할 수도 있고 그 둘을 함께 구별 없이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 십장은 물론 진짜 암소로 알아들었으리다. 암소는 완다이고 완다는 암소이기도 하다. 아무튼 암소와 화자와 완다는 폭설에 갇혀 삼일을 보낸다. 흰 눈은 소목장의 담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내려 쌓인다. 눈 덮인 소목장에서 그들의 따스한 심장이 흰 눈을 녹일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암소를 잡을 먹을 생각에 이를 만큼 야성적이었던 며칠의 고립 뒤에 눈은 그치고 달이 떠오르고 마침내 바깥세상, 사회이며 규범이며 도덕의 세상으로 상징되는 제설차가 온다. 제설차는 암소를 잡아먹는 일에서는 구해주지만 그들은 슬펐고 그는 그것을 돌이키며 말한다. 이제 눈이 그렇게 내리지는 않는다고,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한 노동자에게 붙어 다니는 추억의 진솔한 기술이다.  
이 시속의 두 세계, 노천광과 소목장은, 폭설이라는 벽으로 완벽하게 나누어질 수 있었던 현실과 이상의 세계, 혹은 사회와 개인을 각각 상징한다. 심장의 따스함으로 눈을 녹일 만큼 행복했던 이상의 세계는 대폭설이라는 단절로 인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폭설이라는 상황의 설정으로 시인은 세상과 개인을 차단시키고 그 단절된 개인의 땅에 완다를 제공해 준다. 완다를 당당하게 부여받은 개인은 폭설의 튼튼한 보호아래서 마음껏 완다와 자신만의 자유를 누린다. 완다와 화자는 원초의 언덕을 뛰어 다니는 아담과 이브가 된다. 풍요의 동산에서 이브를 부여받은 아담의 고립은 더 이상 고독이 아니라 자유이며 완벽한 행복이다. 사회와 질서에 반하는 개인이라는 내부의 풍성한 즐거움은 폭설의 신에 의해 한 때 이처럼 보호받았던 것이다. 화자는 완다가 누구인지, 왜 그와 함께 있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다가 누구이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세상에 그들 둘만 있었다는 것, 그들은 웃었다는 것, 즐거웠다는 것, 암소라도 잡을 생각을 할만큼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 노동자의 기억 속의 방역(防疫)된 지대, 대폭설을 배경으로 완벽했던 기쁨의 세계, 그런 자급자족의 독립된 이코스피어(eco-sphere)에 대한 서술인 것이다.  한 노동자와 암소같이 건강하고 순하고 야성적인 여자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섰던 그 작은 사건에의 그리움이며, 그 사건이 은유하는 생명의 원초적인 유희에 대한 그리움이며, 생명의 원초적 권리에 대한 그리움이다. 애절하지도 간절하지도 않게 한 노동자가 폭설과 함께 떠올리는 그 일, 그것은 아마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붙어 다니는 그 빵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속의 이브, 완다는 노천광이라는 차거운, 거세된 현실의 이면에 숨어 기다리는 사과알 같은 즐거움의 상징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노역에서 한 남자를 풀어주고 보호해주었던 혹은 줄 수 있는 자의 상징이다. 세상으로부터 개인을 지키고 개인의 욕망을 보호해주는 자이다. 그런 완다의 역할은 오직 자연재해로 인해 가능해진다. 대폭설이라는 특별한 상황 없이는 완다/기쁨/웃음/이 원초적 아름다움으로 승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노동자가 암소와 같은 완다를 찾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억지로 세상과 그들을 차단했다고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며칠 간의 유희는 신화적이며 시적인 순간에서 사회적이며 소설적 순간으로 순식간에 바뀌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도시의 뒷골목쯤으로 쉽게 흘러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완다라는 빵은 우리가 생이라는 저울의 또 다른 한 쪽에 지키고 있는 질서라는 빵을 공격하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완다 같은 빵만 아니라 법도라는 또 다른 빵도 만들어 먹어야하는 우리의 노역(勞役)을 씁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상황과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한 폭설의 초자연적 힘으로 하여 그들의 삼일은 이 세상이라는 법정에 당당히 나서서 사회/외부세계라는 원고와 맞서는 개인/내면세계를 주장하는 튼튼한 피고인이 되는 것이다. 
‘완다와 폭설’은 설명이 필요 없는 벌거벗은 시이다. 사유의 긴 미로를 요구하지 않는 시이다. 시인의 품에 안겨있기 보다는 차라리 엿장수의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따라나서는 시이다. 야성을 지녔으나 독성이라 부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을 지닌 시이다. 게리슨 카일러의 말대로 좋은 시가 ‘붙어 다니는 시’라면 좋은 순간 혹은 아름다운 순간은 우리의 머리 속에 ‘붙어 다니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몸의 일부처럼 붙어 다니다가 문득 때때로 깨어나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하고 유혹하기도 하고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돌아보게도 하는 그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는 희망이라는 건강한 이름을 달고 우리 앞을 걸어가는 원초적이며 야성적인 본능의 추억인지 모른다. 붙어 다니게 된, 육화된, 동일화된, 떼어낼 수 없이 오랜 시원의 자취는 그러므로 우리를 밀어내는 희망이며 그리움이라는 생명의 방향키인지 모른다는 선후가 뒤바뀐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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