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스트랜드의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

2007.10.03 08:53

임혜신 조회 수:584 추천:65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
마크 스트랜드

구름을 뚫고 빛이 세상으로 쏟아져 내릴 때 우리는 알았지,
위대한 시인이 등장하리란 것을. 그래. 그랬어. 그가 도착했어.  
흰 바퀴가 달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창을 장식한 리무진에서 내려
그는 침착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성큼 성큼
홀 안으로 걸어들어 왔지. 사람들은 숨을 죽였어. 그의 날개는
커다랗고 넥타이 넓이나 양복의 스타일등, 차림새는 유행에
뒤져있었어. 그가 말을 하면 상상의 울음으로 하여 허공이 하얗게
변하는 듯 했고 욕망의 벌레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났고
눈엔 눈물이 고였지. 그 위대한 사람은 정말 멋졌으니까.
"서둘 필요가 없답니다." 낭송을 마치며 그는 말했어.
"세상의 끝은 그저 세상의 끝일뿐이지요. 당신들이 이미 알듯이."  
아, 얼마나 그다운 말이던가, 그렇게 그는 떠났어. 세상은 텅 비고
공기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바람조차도 멈추었지.
말해 줘, 거기 있는 당신들, 도대체 시가 뭐야?
  시를 조금도 품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사람, 혹시 있어?



시인을 만나면 우리는 묻는다,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왜 시를 쓰는가? 라고. 그 누구는 시를 영혼의 역사라고 대답한다. 그 누구는 시는 아름다운 것에의 찬가라 한다. 그 누구는 시가 전체를 향한 개인의 저항이라 하며 그 누구는 시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누구는 시는 사람을 타락케 한다고 한다. 그 누구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고 하고 그 누구는 시를 버리겠다고 한다. 삶의 양태 만큼이다 다양한 대답 중 마땅한 정답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질문은 시가 있는 어디서나 되풀이되어왔다. 왜 시를 쓰는가, 한 잔의 마실 수 있는 물도 되지 못하는 시, 한 장의 따뜻이 덮을 수 있는 담요도 되지 못하는 시, 한 알의 감기약도 못되는 시, 상처를 깨우고 아픔을 되살리는 시를 왜,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에 관해 고뇌하지 않을 수 있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시를 쓰는 누구나 품고 있는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함정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시의 가치는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시인과 시인 아닌 모두에게 시비 거리였으며 늘 존재의 위기에 있어왔다. 그러나 요즘보다 더 심각하게 그 위기가 논해지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급격한 과학문명의 발전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드디어 이 세상의 마지막 세대로 밀어내고 있다. 나날이 진보하는 정보통신기술은 점점 더 개인의 자유공간을 허락하지 않으며 유전공학은 이미 인간의 고뇌를 병으로 간주하고 평범의 범주를 벗어나는 상상력을 과도한 두뇌활동으로 해석한다. 과학이 병이라 부르는 사람 혹은 사회의 이러한 구조적 맹점을 치료하기 위해 과학기술은 촌음을 다툰다. 고뇌 없는 세상, 건강하고 흠 없는 세상을 향해 가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머지않아 기계와 사람은 부작용 없이 몸을 섞을 것이며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감정들과 정보들을 담은 살처럼 부드러운 미세한 컴퓨터를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을 거라 한다. 우리는 감정인간에서 두려움 없는 기능인간으로 바뀔 것이라 한다. 그 때가 되면 고통은 선택의 문제가 될지언정 운명은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의 우리의 시'는 없을 것이며 '불치병과도 같은 예술'도 없을 것이라 한다. 예술은 '유희적 경험'으로서만 존재하게 될지 모른다한다.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없을 것이며 나누어 질 수 없는 짐도 없을 것이며 밤을 새우게 하는 연민도 그리움 없을 것이며 채워 질 수 없는 욕망도 없을 것이라 한다. 그것들이 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 살아온 우리들의 고통받지 않으려는 본능이 불러낸 우리들의 자신의 산물이라 한다. 때로는 명백했고 또 은근했던 그 탈출과 치유에의 노력의 결과라 한다. 아침마다 햇살과 푸른 초원대?신문이나 뉴스 속의 두려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우리들은 아닌게 아니라 위기의 세대다. 그렇다, 우리는 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이들이며, 위기와 더불어 여전히 시를  쓰고 시의 가치에 고뇌하는 바로 그 위기의 어머니가 아닌가.
마크 스트랜드가 1998년 퓰리쳐상을 받은 시집 '눈보라'에서 발췌한 시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를 소개하면서 먼저 시의 가치와 위기를 얘기하는 이유는 이 시 전체가 시란 무엇인가? 왜 시를 쓰는가? 에 대한 물음이며 답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이라고 직접 말하는 대신 위대한 시인과 청중이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속의 화자는 위대한 시인이 연사로 나오는 모임에 나간다. 그 시인은 마치 선지자처럼 등장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하늘에 구멍이 열리고 강렬하고도 온화한 햇살이 내리비친다. 그런 신화적 징조 뒤에 구식 옷차림을 한 신과 같은 위엄과 고귀함과 평안함을 지닌 위대한 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시를 읽고 시에 대해 말해주러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나타난다. 교회의 창처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검은 리무진에서 내려 거침없이 실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그, 그 위대한 시인은 마치 사제처럼 단 위에 서서 시를 읽고 시를 이야기한다. 그가 어떤 시를 읽었는지 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화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그 내용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시인의 만나기 위해 모여 기다렸던 청중들이 감동했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시인이 그 무엇으로인지 세상을 상상의 울음으로 가득 찬 환각의 장소로 변화시켰으며 사람들의 가슴속에 다시금 뜨거운 욕망이라는 벌레가 자라게 했는지, 왜 울었는지, 어떤 욕망이 생겨났는지도 문제가 아니다. 청중들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는, 바로 그 '감동'이 바로 마크 스트랜드가 정의하는 시이다. 시속의 정보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 시인의 말을 통해 '위대한 시인'이라는 관념적 존재를 사랑하고 경외하게 되는 바로 그 행위가 이 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시의 가치이다. 우리의 몸 속에 그리움과 열망과 아픔의 거대한 꽃을 피고지게 하는  매혹적인 교감, 더 이상 무슨 구차한 설명이 필요할까.
이렇게 놀라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위대한 시인은 결국 청중을 떠나간다. 서둘지 말라고, 이 세상의 끝은 이 세상의 끝일뿐이며 다른 많은 세상들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 세상의 끝에 관해 괴로워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죽음과 상실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에게 그 것의 다른 의미를 쥐어주고 떠나는 시인.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것처럼 그 위대한 시인도 떠나간다. 순간일 수밖에 없는 시적 감동도 그때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길고 긴 일상의 공허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시인을 만났던 자들은 감동의 전율이 사라진 후, 더욱 깊어진 슬픔을 경험한다. 세상은 텅 비어지고 공기는 차겁게 식고 바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의문과 불안과 고독이 넘치는 현실만 남는다. 위대한 자도 위대한 말도 다 사라졌다. 이 즈음에서 그 누군가는 시와 시인의 무력함을 탓하고 그들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일시성, 과장, 환각, 어쩌면 중독성을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속의 화자는 깨질 듯이 검은 정적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묻는다. 얼어붙은 정적의 고독 속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묻는다. 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느냐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시 묻는다. 그럼 시를 전혀 품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달리 말해 시적인 아픔과 고뇌와 열망과 사랑과 후회 없이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역시 없다. 그러나 답 없는 두 질문이 바로 깊은 감동을 준 위대한 시인과 시와 청중이라는 우리들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재확인시켜준다. 시의 향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것, 순간적이든 영원하든 실재이던 환각이던 그 모든 것 이전에 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그의 시는 말해준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이 비록 위협받는 행위이더라고 당당한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위기에 처했건 위기로부터 멀리 있건 시는 우리 삶 속에서 자라나 우리와 함께 살고 고뇌하고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우리들 삶의 속성이다. 시가 탄생하게 되는 그 가장 깊은 곳의 욕망, 그 곳의 염원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을 바로 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시의 '위대한 시인'은 '성공한 세상'의 시인이라기보다 '시' 라는 우주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를 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울게 하고 후회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열망하게 하고 의문하게 하고 꿈꾸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는 그 어떤 우주적 힘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날마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일들의 깊은 내면공간이며 잠재력이며 그 공간의 넘치는 에너지이다. 이 활달하고 거침없는 힘이 어느 날 구름을 뚫고 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이 세상에 나타나 시를 보여주고 세상의 잠재력을 깨워 함께 교류한다. 그리고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이 위대한 시인은 다시 평화롭게 빛이 쏟아지는 어느 곳으로 천사처럼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떠나간다. 우리는 다시 홀로 남는다. 그러나 둘러보니 모든 이들 속에 시의 흔적, 감동의 흔적, 그 마력의 조각들이 묻어있지 않은가,
  시의 보편성을 멋지게 시화한 그의 시를 읽으며 나 또한 이렇게 감동한다. 그가 거침없이 외쳐대는 '위대한 시인'이란 말과 '욕망의 벌레'란 말과 '자유로움'이란 말과 '상상의 울음'이란 말과 '세상의 끝'이라는 말과 '시를 조금도 품지 않고 살다 죽을 수 있느냐?' 는 질문을 따라가 이 시속의 청중들처럼 웅장하고 비극적이며 당당한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시를 읽는 나의 행위를 당위시키는 이 시의 당당함이 든든하다. 존재론적 만족을 준다. 우리들은 우리가 헛되이 연연하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그러면서 수없이 후회하고 의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기의 어머니인 우리세대의 불안은 그래서 더욱 깊어간다. 그런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이런 당당함을 필요로 한다. 사색과 고뇌가 깊을 대로 깊어진 시인, 저 높은 곳에 선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들이 감동하거든 감동하게 내버려두라고. 당신들이 잠시 시의 환각에 빠지거든 빠지게 두라고, 당신들이 고뇌하거든 고뇌하게 두라고, 당신들이 위기를 걱정하게 되거든 걱정하게 두라고, 당신들이 한 잔의 물도 한 장의 담요도 한 알의 감기약도 못되는 시를 쓰고 읽거든 쓰고 읽게 내버려두라고, 위기의 시인을 위기의 시인이게 내버려두라고. 왜냐하면 시도 시의 위기도 아직 우리에게는  병이 아니라 사랑이므로.



시 원문
The Great Poet Returns

When the light poured down through a hole in the clouds,
We knew the great poet was going to show. And he did.
A limousine with all white tires and stained-glass windows
Dropped him off. And then, with a clear and soundless fluency,
He strode into the hall. There was a hush. His wings were big.
The cut of his suit, the width if his tie, were out of date.
When he spoke, the air seemed whitened by imagined cries.
The worm of desire bore into the heart of everyone there.
There were tears in their eyes. The great one was better than ever.
"No need to rush," he said at the close of the reading, " the end
Of the world is only the end of the world as you know it."
How like him, everyone thought. Then he was gone,
And the world was a blank. It was cold and the air was still.
Tell me, you people out there, what is poetry anyway?
       Can anyone die without even a li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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