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리 / 석정희

2012.02.02 04:34

석정희 조회 수:989 추천:234

어머니의 자리 / 석정희



사람은 역시 철들자 늙는가보다. 어머니 치마폭에서 꿈 많던 소녀시절을 보낼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내가 어머니가 된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머니가 세상을 훌쩍 떠나가 버린 뒤 그 자리에 지금 내가 들어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전에 나의 어머니가 나를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셨듯이, 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무남독녀가 있다. 어쩌면 그렇게도 나를 꼭 닮았는지 국화빵이다. 키울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제 길로 한 길 자라서 짝을 지어 떠내 보낼 때가 되니, 그제야 어머니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실감이 났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한 짐 잔뜩 지고 가파른 산을 넘어가듯 무게가 실려 왔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잽싸게 ‘나의 어머니도 지금의 나와 똑 같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켰겠지!’ 하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쳐갔다.

딸이 시집 간 그 이듬 해, 달덩이 같은 아들을 쑥 낳았다. 난생 처음으로 할머니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딸을 시집보낼 때와는 또 다른 실감이 났다. ‘내가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세월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자연의 순리 앞에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다소곳이 어머니의 자리에 나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딸은 아이를 낳더니 어머니의 치마폭이 그리운지 나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아직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만큼은 느낌이 다르다. 바라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처음에는 손자새끼 데리고 지내는 재미가 솔솔 났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아이가 보챌 때마다 아이에게 시달림을 당하다 보니 아이를 본다는 것이 중노동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절감하게 되었다.

언젠가 나와 똑 같은 상황에 놓인 어떤 사람이 푸념하듯 내 뱉은 말 한 마디가 기억났다. “오랜만에 새끼들이 다니러 오면 반가운데, 간다고 하면 뒷 모습을 바라보며 더 반갑더라.” 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위가 애리조나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딸이 이삿짐을 풀고 나르고 정리하는 일로 끙끙 댈 것이 안쓰러워서 딸네 집에 가서 이삿짐을 풀어 정리하며 아이를 돌보며 몇 주 동안 머물렀다.

얼마 후 이번에는 새 집을 장만하여 다시 이사한다는 소식이 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딸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른 새벽부터 꿈지럭거려도 끝이 없었다. 이삿짐 정리 하랴, 아이 보랴, 청소하랴, 때마다 음식 준비하랴, 부산하게 몸을 굴리다 보니 무리가 되었는지 몸살이 났다. 사위와 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끙끙거리며 애를 쓰면서 이른 아침에 새벽같이 출근하는 사위를 위하여 김밥을 만들어 매일같이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장모가 싸주는 김밥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장모님 음식 솜씨가 일품예요” 라는 사위의 말 한 마디가 없었다면, 아마도 어머니의 자리는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힘들었던 것을 감출 수 없다.

왜냐 하면, 장모가 싸주는 도시락을 사위가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비록 힘든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집에있는 우리들도 먹고 직장 동료들의 도시락까지 무려 30개가량을 싸주다 보니 손가락도 발바닥도 아프고 은근히 심상이 났다. 사위는 눈치도 없이 매일같이 힘겨운 일을 반복하는 장모의 노고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기쁨이 남아 있는 것은 예전에 그렇게 커보였던 어머니가 되어 이젠 내가 어엿한 어머니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어머니처럼 자녀를 위하여 궂은일도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딸네 집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은 날아갈듯 가벼웠다. 아내 없는 빈자리를 지켜준 남편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까지는 항상 어머니로 살아야 하고 그 자리를 한 순간도 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가를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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