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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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배추를 씻으며

2015.10.27 17:17

채영선 조회 수:348

배추를 씻으며


늙을수록 는다는 그 고집이 내게도 자라고 있나 보다. 그제 시카고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 팔뚝만한 강아지 해피를 두고 가서 영 마음에 걸렸지만 모임이 끝나고 나니 밤 열시 반, 그이나 나나 피곤해서 출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예의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우리 강아지 해피가 부르는 소리. ‘으-, 으-’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전에는 ‘음마-’하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은 으으 하고 울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벌써 네 번째다. 떨어질 때마다 나는 영락없이 해피의 엄마가 되어 아기의 소리를 듣고 있다. 부지런히 돌아오니 뛰고 소리 지르고 신경질을 내고 하더니, 이젠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든다. 지금 배추를 씻는 내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핏줄 같은 동물인데 사람은 오죽할까. 자식을 떼어 놓은 엄마도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키우신 어머니를 무 싹둑 자르듯이 돌아서서, 만난 지 몇 년 안 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아니 시집을 온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일지 이런 생각은 하나도 하지도 않고 그냥 모든 게 좋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중에도 먹는 풍습이나 습관이 다르다면 얼마나 복잡한 일이 발생할지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이 결혼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용감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친정 부모님은 고향인 강원도 이천을 떠나 해방 후에 서울로 내려오셨고, 두 분이 멀지 않은 거리의 휴전선 북쪽 강원도 태생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북쪽의 음식에 길들어 자랐고 맵지 않고 짜지 않은 것, 조금은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신 부모님은 집에 늘 누런 갱엿을 두고 드셨다. 특히 아버지는 아주 단 것을 좋아하셨다.


시부모님도 함경도 청진에서 내려오신 분이셔서 맏며느리인 나는 당연히 시어머니의 음식을 그대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 그렇듯이 친정에서 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친정어머니와 아버지가 해주신 것을 먹고만 다녔을 뿐 아무 것도 만들 줄 몰랐는데 신혼 시절 지냈던 논산에서의 몇 달 동안 남편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한심했던 기억뿐이다. 부엌일이 얼마나 서툴렀는지 결혼한 지 두 주도 안 되어 깨트린 접시에 손바닥을 베어 여덟 바늘을 꿰맨 정도니까.


그 후 시집에서 사는 동안 말씀이 없으신 시어머니는 음식이 맛이 없다는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

으셨다. 하여튼 내 마음대로 만든 것이 그런대로 통한 이유에는 두 가정이 삼팔선 북쪽에 고향을 두어서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니신 시어머니는 달콤한 조림식 반찬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꼭 친정아버지의 입맛과 같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두 어머니가 생선을 좋아하신 것도 내게는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니면 우리에게는 음식 때문에 불편한 일이 종종 생겼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도 상관을 안 하신 시어머니께서 걷어 부치고 나서서 하시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김장하는 일이었다. 중고등 학교 시절 학교가 멀다는 이유로, 또 대학 입시 준비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김장하는 일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교회 식구나 이웃 사람이 도와주어서 그런지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친정어머니는 공부나 하라고 제쳐 놓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배추를 사 들여오면 절이는 일부터 밤에 들추어 뒤집어 놓는 일, 김치 담을 항아리를 씻어 준비하는 일 모두 키가 작으신 시어머니 담당이셨다. 시누이와 나는 말씀하시는 대로 옆에서 거들어 무를 썰고, 배추를 나르고. 함경도 토박이 식으로 만들어진 김장 김치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첫아기가 생겨서 입덧을 할 때도 김장 김치 덕분에 힘든 시기를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낼 수가 있었다. 하얀 속살이 시원한 국물에 잠겨 있던 배추김치와 사이에 박혀 있던 무의 맛,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친정에서 시집으로 또 다시 미국으로 육십년, 내 핏속에, 살 속에 뼈마디마다 김치 맛이 배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 맛을 잊어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모든 것이 쉽고 편리해져서 마트에만 가면 쉽게 살 수 있는데, 앉아서 전화 한 통화면 집으로 득달같이 보내준다는데 나는 그것을 왜 못하는지.


그제도 시카고에서 제일 크다는 마트에 들러 서리태 콩이며 고구마, 필요한 것을 다 샀는데 빠트릴 수 없는 게 배추였다. 이번에는 꼭 사가지고 가야지. 진열된 냉장고 안에는 유리병 안에 가지가지 종류대로 먹음직한 김치가 그득하다. 그런데도 난 기어코 배추를 한 박스 사가지고 온 것이다.


별로 튼실하지 못한 몸이라 어제 저녁은 피곤해서 꼼짝 못하고 아침에야 배추를 절였다. 다듬으면서 보니 봄배추라 겉잎이 푸른 것이 속은 많이 차지 않았지만 고소하게 생겨서 마음에 든다. 생강도 넉넉히 넣고, 갓도 넣고 양파를 넣어보니 쉽게 시어지지 않던데, 새로 갈은 마늘, 고춧가루를 조금만 넣어서 시원한 부모님 고향 김치를 만들어야지, 그러려면 멸치를 잘 대려서 국물을 부어야 해.


매운 것을 못 먹는 우리 식구는 마트에서 파는 김치를 먹는 것이 힘이 든다. 방법은 물에 씻어 먹는 것이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시어지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하고 이래저래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있는 동안은 만들어 먹기로 했다.


김치를 담그려면 두 사람이 분업을 해야 한다. 마늘 꼭지 다듬기나 생강 까는 것은 남편의 일이다. 쓰레기 모아 버리는 것부터 그릇 옮기는 것, 양념 병뚜껑 열기, 김치 통 닦아내고 뚜껑 닫기, 잔 일이 많다. 왜냐하면 나는 양념이 잔뜩 묻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있으니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하다못해 고춧가루 봉투 여는 것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제일 답답했던 일은 집안에 하수구 구멍이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 수가 있을까. 방 두 칸 아파트 안에는 하수구가 없었다. 화장실 안에는 욕조 안에만 물 나가는 구멍이 있으니까. 걸레를 빨고 난 후 발에 찔끔 물을 붓던 그 버릇을 어떻게 고치지? 이젠 그 버릇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김치를 담을 때 싱크대에서만 하기에는 힘이 드는데 다행히 집안 창고 안에 물 나가는 하수구와 온수 냉수 수도꼭지가 있어 김치 담그는 것이 어렵지 않아서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이젠 버무린 양념을 살짝 절은 배추에 슬쩍슬쩍 옷 입혀서 김치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기만 하면 된다. 하루 재운 뒤 내일은 멸치를 푹 고아서 적당히 간을 한 국물을 배추가 잠기게 부어넣으면 끝이다. 조그맣고 납작한 돌멩이도 몇 개 홍천 강에서 가지고 왔다. 구덩이에 묻은 김장 김치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친정어머니랑 천국에 계신 시어머니가 보셔도 괜찮다고 하실 것만 같다.


이젠 한국의 김치가 국제적으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의 김치를 흉내 내고 싶어 안달인 나라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흉내 내고 싶어도 대대로 전해져서 내려오는 우리의 입맛에 맞는 진짜 김치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멀리 바다 건너에서 살고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조상의 그 후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