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29,957


초자연적 사랑의 새로운 이해

이병주의 소설 <쥘부채>를 읽고

 

                                                                                            채영선

새삼스레 플래스틱으로 된 까만 부채를 만져본다. 친정어머니께서 바다 건너 온 딸에게 기념으로 주신 것이다. 그 이름이 쥘부채인 걸 오늘 알았다. 사이즈는 조금 크지만 이병주의 소설 <쥘부채>를 읽고 나니 가슴 한 귀퉁이가 저려온다.

 

이 소설은 작가의 전체적인 작품세계를 압축해 놓은 매뉴얼과도 같다고 문학평론가 김종회 교수는 그의 해설에서 밝힌 바 있다. 다른 작품을 많이 대해보지 못했지만 이 글을 보면서 또 다른 행운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배우고 가꾸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 생각한다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이 사랑을 주요 스토리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 인간의 감수성을 가장 깊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슬픔이라면 사랑도 슬픈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부모의 반대나 인습의 차이로 극복이 될 수 없는 사랑은 나태한 느낌을 준다. 그와는 달리 시대의 요청, 또는 범사회적인 문제의 발생으로 국가적인 격랑기에서 발생하는 미완성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동의와 찬사를 얻었는가.

 

이 소설의 중심 서사는 이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주인공 이동식은 문학도로서 불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A,B,C라고 일컬어지는 친구들과 함께 누항에 묻혀 지내는 유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신문로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씩, 수업이 없는 시기에는 세 번씩 모임을 가지고 불란서의 희곡을 읽으며 함께 연구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새벽 서대문 형무소 근처의 눈이 덮인 길 위에서 나비 모양의 검은 부채를 발견하게 된다. 손에 꼭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부채는 그 색깔이나 모양이 그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한 느낌을 그에게 전달하며 그의 마음에 파고 들어온다. 무엇인가 곡절이 담겨 있는 듯한 부채로 인해 그는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일마저 잊어버리고 골똘히 그 부채에 담긴 비밀을 찾아들어 간다.

 

이동식은 그가 다니던 대학의 대학원생이며 부잣집 딸인 세 살 위의 성녀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다. 그러나 성녀는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와 운명적인 하루의 처녀 총각을 바치는 밀회를 가진 후 소식을 끊어버린다. 두 달 후 그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는 중괌도에 있다는 편지를 성녀로부터 받는다.

 

유선생의 모임에서도 생각이 온통 부채에 가 있는 이동식이다. 설악산에서의 조난 사고 뉴스는 이동식을 비롯한 그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죽음에 대한 하나의 가상을 하게하는 기여제가 된다. 어떤 죽음이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인가. 최라고 불리는 다른 친구는 독특한 사람이다. 그의 논리는 1학년부터 시작된 데모의 대대적인 발생으로 학생회로부터 강제 동원되는 입장에 처한 학생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계기를 만들어준다.

무조건 함께 행동을 할 것인가. 무언가 자신의 미래 계획을 위하여 시간과 체력과 감정을 저축할 것인가. 대다수의 행동에 무조건 동조하지 않겠다고 역설하는 최라는 사람은 지리산 태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이동식이 말을 해주지 않은 사실도 다 꿰뚫고 있으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다. 다른 친구들 보다 그를 가까이 느끼는 이동식의 마음은 여전히 쥘부채를 따라가고 있다.

 

쥘부채에 나리 꽃모양이 새겨 있으며 아주 작게 ㅅㅁㅅ’ ‘ㄱㄷㄱ이라는 글자가 새겨있음을 발견한 그는 재소자들이 감옥에서 만든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는 형무관에게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발견하기 전날 신명숙이라는 여자 장기수가 죽었다는 것, 다음 날 새벽 가족에게 시신이 인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명숙의 시신을 인도해 간 가족의 집에 가보니 처녀로 죽은 그녀의 혼과 총각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혼을 맺어주는 영혼결혼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강덕기라는 사람의 동생이며 자기 형님이 사랑한 사람이 신명숙임을 밝히며 극구 영혼결혼식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의 형은 두 사람이 잡혔을 때 곧 사형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20세에 무기수로 감옥에 들어가 20년형으로 감형되어서 17년을 복역하고 3년을 남긴 시점에 병으로 옥에서 죽은 사람이 바로 신명숙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칫솔대로 부채를 만들어 몸에 지니고 두 사람이 이생에서 못 이룬 사랑을 꽃과 나비로 태어나 이루어보리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을 쥘부채를 이동식이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쥘부채의 주인이라고 밝히고 쥘부채를 만든 신명숙의 뜻을 그들에게 말하여 어긋난 영혼의 결혼식을 그만두게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다.

첫 문장을 읽으며 눈앞에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하얀 눈 위에 놓인 검은 나비 모양의 부채, 작가의 분신이며 주인공인 이동식은 서대문 교도소 부근에서 검은 쥘부채를 줍는다.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쉬지 않고 소원을 빌었음직한 노리개라고도 할 만한 물건이다. 요기마저 맴도는 그 물건은 다른 줄기의 이야기에 섞이지 않고 계속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오랜 세월 공을 들여 깎아 만든 것이라는 것을 근처의 교도 작품 직매소에서 확인을 한 그는 마침내 부채 안에 있는 비밀을 캐내어 간다.

 

그렇다면 그 쥘부채는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수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수인은 여자다. 동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마음의 흥분을 가라

앉히며 물었다.

그런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대강 어떤 사람들이죠?”

대부분이 장기수들입니다.”( <쥘부채> 바이북스 2009년 본문 39 )

인조 상아로 보이는 것이 실은 칫솔대라는 것, 그리고 여자 장기수라는 것, 부채에 새겨있는 나리 꽃, 여섯 개의 작은 글자는 두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라는 것을 추측한 이동식은 형무관에게 자기의 신분증을 보여주고 사인을 한 후 쥘부채를 발견한 바로 전날 한 여자 장기수가 병으로 사망했으며 다음날 새벽에 시신이 가족에게 인도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수감되어 무기형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후에 17년을 복역하다가 신병으로 죽은 여자의 이름은 신명숙이었다. 그녀의 시신을 인도해간 집에서 그녀가 죽기까지 사랑한 사람은 이미 사형이 집행된 강덕기라는 청년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나비와 꽃, 이것을 해명하긴 어렵지 않다. ‘당신은 죽어서 나비가 되고, 나는

죽어서 꽃이 되리라.‘ 고 이 나라에 전해 내려온 상문상사(想聞想思)의 노래

에 불행한 애인이 불행한 애인에게 애절한 사랑을 담아본 것일 게다.

(<쥘부채>, 본문 57)

 

쳐녀로 죽은 신명숙의 혼과 동네 총각으로 죽은 혼을 결혼시키는 장면을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은 극적인 해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준다. 그 자리에 나타난 강덕기의 동생은 극구 형님의 혼과 맺어주어야 한다고 그 영혼의 결혼을 반대한다.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이 장면에서 이동식은 쥘부채의 주인으로서 신명숙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줌으로써 부채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완수했다는 신념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 이병주는 작가의 길에 늦게 출발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설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1921년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중 학도병으로 중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서 암울한 그 시대에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묵언의 수행을 하며 수많은 질곡을 마음에 켜켜 잠겨 놓지 않았을까.

 

대학 강단에서, 또는 신문사 주필로서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하기에는 불편했을 작가는 소설을 통하여 그 동안 수행하며 담아둔 그만의 신념의 댐을 열어 놓고 사고의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설악산 등반 사고에 대한 곁줄기 이야기에서 그는 산으로 가라’(<쥘부채> 본문 11)고 말한다. 산은 신비한 곳이다. 그곳에는 정기가 있고 맑은 영혼이 있으며 계시를 받는 장소로 알려져 있어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산으로 들어간다. 또한 성경에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피난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생활의 주변엔 신비의 가능이 충만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충만한 신비의 가능을 외면하고 매일매일 평범한 회색으로 도말하고

있는 생활이란 불행하지 않은가. (<쥘부채> 본문 40)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주변에 가득 찬 신비를 만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다. 피었다 지는 작은 꽃이며 더 작은 들풀이며,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풀벌레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자연이 데리고 오는 신비를 언제나 눈치 챌 수 있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조물주의 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뜻으로서가 아니라, 전지전능하고 벌을 줄 놈에겐 벌을 주고 보상을

해야 할 자에겐 보상을 하는 신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쥘부채> 본문 86>

 

성경은 불공평한 재판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재판관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실패와 성공이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소시민은 어깨를 쪼그린 채 조용히 지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서 요청되는 신을 생각한 작가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배신당하는 사람과 조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의심을 받아 억지로 심문을 받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을 항변하면서 영웅보다 천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이 소설에 등장하지만 과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약자는 언제나 존재하며 가난한자도 언제나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인 관점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한때 약자인 사람도 강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강자가 될 것이며, 한때 가난한 사람도 자신이 부자의 위치에 놓일 때는 부자의 언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논리 아닐까. 학문으로도 문장력으로도 뛰어난 이 작가는 끝까지 살아남는 자야말로 위대하다고 마지막에 서술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나의 친정어머니와 태어나신 년도가 같아서 더욱 반가웠다. 지금도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어머니를 뵈면 때가 때이니 만큼 겪으신 일도 많으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같은 시대를 사신 작가 이병주는 원치 않는 긴 칼을 차고 대륙을 누비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생사가 눈앞에서 갈리는 시대의 증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그의 뇌리에 남아 있기에 그렇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만드셨을까 생각해 본다.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겪은 일이 많다는 것이니까. 돌 하나 묘비명 하나하나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장면을 떠올렸을까.

 

비는 마음에 몇 천억 년인들 어떠랴. 인간의 집념에 보람이 없다면

인간은 지금 살고 있는 영광마저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

(<췰부채> 본문 104 )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지혜의 시간,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쥘부채> 본문 105) 에 이동식은 쥘부채를 서대문 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태우는 의식을 치러 준다. 두 사람의 염원이 끝내 조우하기를 바라면서.

 

새삼스레 서대문 형무소 앞길을 떠올린다. 3년 동안 들락거리던 길이다. 다니던 신학교가 서대문 냉천동에 있어 그 길은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반짝거리는 길이고 동네지만 그 시절에는 허름하던 길 허름한 산동네였다. 가난이 구석구석 배인 길에서 라면으로 때우던 저녁, 그보다 더 원초적이었을 그 시대에 작가는 극히 인간적인 소망을 가지고 자신은 배신당한 사랑으로 돌이 박힌 마음이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못 먹을 감 찔러나 보자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쉬운 이 시대에 작가는 착한 사람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는데 한낱 부채에게서 하소연을 듣는 그의 영혼을 생각해본다. 작가 정신이란 이런 것인가. 만물이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보여주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싶다. 적어도 사랑을 주제로 논하고 싶다면 이 작가를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랑은 누구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누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가가 없어도

상관이 없어도

유익이 없어도

소통이 되는 그런...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과 인간이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로 맺어지기 원하는 작가의 소망이 작가가 떠난 이 시대에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채영선; 1953년 서울 출생, 1991년 도미, 서울대학교 국어과 졸업, 감리교 신학대학원 졸업, 배명 중 국어교사, 이대부중 성문 여중고 채플 인도, 2012년 미주문학 시 둥단, 창조문학 수필등단,미주문인협회 회원, 창조문학 운영이사, 예지문학 회원. 시집; ‘사랑한다면’(북인), ‘미안해’(창조문학사). 수필집; ‘영혼의 닻’(창조문학사) 동인 공저; ‘이병주를 읽는다’ (국학자료원)

미주문학 신인상,

이병주 국제문학상 공동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