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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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2013.05.28 00:11

채영선 조회 수:342 추천:111

발가락





어디에서 날아왔을까

잘 다듬은 길가 정원 빈 자리, 잡초 사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는 봉숭아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어린 이파리들을

몽당몽당 잘라 누가 볼까 검은 봉지에 담아 가지고 왔다

미안해 얘들아, 이렇게 자르는 나도 마음이 아프단다

하지만 어쩌니, 서방님 아픈 발가락이 먼저 아니겠니

백반을 사다가 자근자근 식칼 손잡이로 두드렸지

진이 나서 백반이 적시도록

여린 잎에서 연두 물이 나와 배었지

현미밥 담는 통에 담아 꽁꽁 얼려 놓았다

태평양을 건너가서 서방님 발톱을 올해도 예쁘게 만들어 주려므나

지난 여름 소꿉친구가 말해주었다

봉숭아물을 들이면 주부 습진이 낫는다고, 손톱이 예뻐진다고

친정 엄마 사시는 집 아래 골목에서 봉숭아를 보았다

스티로폼 박스에 봉숭아를 키워 대문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차마 뜯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꽃을 가꾸는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 봉숭아

그 흔하던 봉숭아는 어디 있을까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언니집 근처 길가에서 만난 봉숭아는 선물이었다

같이 사는 삼십오 년 동안, 양말 속에 얌전히 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남편의 발

수십 년 이고 다닌 무게 때문에 비틀어진 발가락, 못생긴 발톱을 처음 만져보았다

바라보기만 하던 새끼발가락

신발 끄트머리에서 숨도 못쉬고 갇혀 지내던 엄지 발가락

곱게 짓이겨서 얼리고 다시 녹인 봉숭아를 발끝에 얹고 싸매주었다

아주까리 잎 대신 야들야들 잘 붙는 얇은 비닐로

이불 꿰매는 실 대신 일회용 반찬고로

일고 여덟 번 봉숭아물이 든 그의 발가락엔 이른 봄까지 도장이 찍혀 있다

발가락까지 몽땅 누구꺼라고





시집 '사랑한다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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