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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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에서 온 편지 (160514) 채영선

 

<  은반지  > 

               

사슴의 눈총을 피하여 그믈 망으로 만든 울타리 안에서 백합은 사십여 그루 사이좋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먼저 자란 꽃 몽우리를 다섯 송이나 따먹은 죄로 사슴은 꼼짝없이 구경만 하게 되었지요. 가지가지 색으로 피어날 백합꽃의 축제는 아마 6월이나 되어야 열릴 것입니다.

 

입이 비죽히 나온 놈이 계단을 올라오기에 이놈 했더니 옆집으로 가버렸어.’

남편은 오소리인지 마못인지 이름도 모르면서 손님을 쫒아 보내버렸습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걸 쫒으면 어떻게 해요, 언제든지 오라고 했는데...’ 안타깝지만 벌써 지나간 일입니다. 제발 빨리 잊어버리고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골짜기에 자란자란 자라난 풀이 있으니 사슴도 뜸해진 여름입니다.

 

대여섯 명이 한 번에 우루루 몰려다니던 오빠와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내주고 먹이셨던 어려운 시절의 어머니 덕분에 툭하면 버글대던 우리 집입니다. 그 어머니는 가족이나 손님이 드리는 새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간수하셨다가 이웃이나 찾아오는 성도님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드렸습니다.

 

목사인 손자와 손자사위도 여럿이건만 연배에 상관없이 목사님들에게 존중과 예우를 하신 어머니는 언제나 그들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남편에게도 늘 존댓말을 하시며 기도를 부탁하신 어머니와 남편은 한 마디로 기도의 동지라고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맑고 고운 웃음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를 위로하고 기도해주신 어머니의 사랑으로 마음과 몸을 치료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지금까지 목회 길과 삶의 길에서 축복을 받고 특별한 은총을 입고 지내온 걸 생각하면 갑자기 고아가 된 느낌에 마음이 추워집니다.

 

미국에 온 후 1년 간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기도로 아이들은 더욱 믿음의 생활 교육을 받았습니다. 검소한 생활과 예배생활의 모본을 보여주신 어머니, 아이들이 미국에 온 후에 천국 가신 아버지를 아이들이 떠나니 허전해서 병이 나셨나봐.’ 어머니는 말씀하셨지요.

 

그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의 뒤를 우리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작은 소원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어머니처럼 맑고 고운 웃음을 늘 지니고 살 수 있기를, 도움을 청하는 누구에게나 베푸는 손길이 될 수 있기를, 내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를요.

 

어머니의 웃음과 언제나 담담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감사로 늘 기도하시던 어머니, 세상이 아무리 사치와 허영에 물들어가도 늘 검약하시던 어머니, 보이지 않는 손길로 구제와 선교에 헌신하시던 어머니.

 

환한 얼굴로 천국에 가신 어머니는 마비되셨던 손과 온몸이 어린 아기의 몸처럼 부드러워지셨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신 어머니는 마음처럼 희고 고운 은반지 하나를 제 손에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낡아지지 않는 하늘 창고에 보물을 쌓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반가이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보물은 지금 어디에 쌓여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