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시대 / 전지은

2003.08.04 22:37

徙義 조회 수:279 추천:13


♧ 장애인 시대 / 전지은(소설가)


"비밀번호 입력하세요."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컴퓨터가 시작됩니다. 엔터,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화면 가득 뜨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 이미 선택되어 있던 즐겨 찾기의 목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씩 클릭하고 대충 훑어보기라도 한다면 나의 한나절은 한자세로 요지부동이다. 식은 블랙커피의 향도 사라져 쓰고 차가운 한약 같은 맛이 들 때 다시 뜨거운 것으로 바꾸려 부엌으로 내려가는 딱 한번 말고는 석고상처럼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다. 오직 움직이는 것은 아직도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합이 6개인 양 손가락들뿐.

지난여름 몸의 어느 부분이 허리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체형이 바뀌어 가는 것을 측은한 눈으로 쳐다보던 남편이 준비해 준 트레이드 밀은 좁은 차고의 금싸라기 같은 공간만 차지 한 채 무용지물로 변하고 말았다.

운동기구를 처음 준비했던 얼마동안은 비디오 테이프까지 틀어가며 살신성인의 도를 닦는 것처럼 시간을 할애하고 땀을 흘렸어도 변해주지 않는 몸매와 궁금한 것들이 산재한 아침은 몇 달 버티지 못했다. 전신운동보다는 손가락 운동이 내겐 더 적격이라는 생각도 우선되었다.

우리 나라의 인터넷 사용 율은 세계 삼위, 미국은 일 위이고 그 두 개의 나라에서 정보의 널뛰기와 그네뛰기를 잘하고 있는 나도 그들의 이용률의 올리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의 내 일과를 아는 남편은 가끔씩 나의 한나절을 방해하기 위한 전화를 걸어온다. "뭐하냐?" "뭐하지. 그만 끊어"얼마든지 상냥한 목소리로 받을 수 있는데 퉁명스런 목소리가 먼저 나가는 것은 내 시간의 훼방꾼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곤 다시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시류에 떠밀려 시작한 아직 너무도 어수룩한 홈페이지. 가끔씩 올라온 글들이 있을 땐 답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홈도 들려보고 쓸데없는 일들을 간섭하며 몇 자 적고, 혹 어제 남긴 글에 리플이라도 달려 있지 않나 또 다시 들어가 보며,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홈페이지이니 올라 온 새 글은 없는지 살핀다. 동영상으로 뜨는 작품들은 음악 들으랴, 시 읽으랴, 그림 보랴, 475세대로선 이젠 지력뿐만 아니라 시력도 극도로 떨어져 넘치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하여 소화시키는 것 또한 힘겨운 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인터넷 한국일보의 주요뉴스에 의하면 한국에선 초, 중, 고 생이 모두 5명중 1명 꼴로 "인터넷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정부의 정보통신부에서 '한국형 인터넷 자가진단 척도 프로그램'이란 것을 만들어, 무료 보급키로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정도가 중증을 넘고 있다는 것이 자가 진단이고 보면 한번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 자가진단을 해봐야겠다. 더 이상 허리의 구분이 안되고 눈은 안보이고 어깨가 굽은 중증 장애아가 되기 전에.

일을 하는 날은 출근 후 각 부서에서 보내온 이메일을 첵크한다. "스텝 전원에게 의무교육 실시" 그런 제목으로 시작되었던 병원 전산화의 꿈은 지난여름 시작되었다. PC가 없었던 직원들에게는 싼 이자로 융자까지 해 줘 가며 병원 전산화를 시도했지만 인력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곳에서 정보와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8 시간의 의무교육 시간인 8시간의 세 곱절을 하고도 모자라 벌써 몇 번째의 그룹 재교육과 원하는 사람들의 개인 재교육을 실행했다. 300 파운드의 거구를 들거나 움직이는 일 때는 끄덕 없던 허리와 어깨가 긴장된 자세로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할 땐 손목뿐만 아니라 무릎까지 아프단다. 꽤 부리기에 이력이 나있는 몇몇 동료들의 억지 같은 엄살이기는 하지만 이젠, 원하지 않아도 365일 같은 자세로, 같은 것들과 실랑이를 벌려야 하는 장애인시대.

그 안의 나는 오늘도 뒤척이며 나쁜 꿈을 꾼다. "Yahoo, BOA, lloveschool, 산호세한인천주교회, 미주문학서재.1234, 475, ikorea. hotmail.com"이어지는 단어와 숫자들. 바람을 타고 어지럽게 흩어지며 깨어지며 돈다.

(한국일보, 2003년5월15일, 목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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