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통 속의 비둘기

2005.03.10 09:22

김혜령 조회 수:697 추천:65

미국 이민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순수문학

김혜령의 소설을 읽어 가노라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게 있다.
‘작가 혼(魂)’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그녀가 쓰는 어휘 하나하나에, 문장 한 줄 한 줄에 그것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소설에는 허술한 데가 없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자기도
취 같은, 표현상의 실수도 보이지 않는다. 탄탄한 구성력이라 하겠지만, 거기에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감성으로 치장할 줄 아는 기량도 돋보인다.
물론 그것은 ‘치장’ 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작가적 품성, 또는 재능에 속할 터이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가지 욕심을 부리자면, 작품 전반의 색조가 조
금 밝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송상옥(소설가,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작품해설

일상에의 얽매임과 초극을 향한 열망
이동하(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 한글로 꾸준히 창작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는 소설가들을 우리는 보통 ‘재미 한인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재미 한인 소설가들의 창작활동이 처음 시작되었던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이제 그 역사도 어느덧 1세기의 연륜을 기록하게 된 셈이다.
이제 1세기의 연륜을 기록하게 된 재미 한인 소설의 역사는 크게 보아
1980년대 이전과 이후의 두 단계로 구분 지을 수 있다.
1980년대 이전까지의 경우, 재미 한인들 가운데에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참으로 희소하였다. 그나마 그들이 한글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도 미국 땅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만큼 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은 대부분 한국의 잡지만으로 한정되다시피 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이르자, 그 동안 꾸준하게 진행되어 온 재미 한인 사회의 팽창과 성숙이라는 여건의 변화에 힘입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소설을 쓰는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다수의 문학잡지들이 속속 창간되어, 소설가들에게 풍부한 지면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몇몇 고독한 예외자들만이 가끔씩 찾아드는 외딴 섬과도 같았던 재미 한인 소설의 세계는 이 때부터 활기 넘치는 하나의 신흥도시와 같은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이와 같은 변화의 물결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계속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새롭게 등장한 많은 소설가들이 빚어내고 있는 다양한 언어의 무늬들은 재미 한인 사회의 정신과 문화를 대표하는 존재의 하나로 그 의의를 확립해 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어로 창작되고 있는 문학 일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데에도 뜻있는 기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재미 한인 소설가들이 예외 없이 고른 문학
적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몇몇 사람의 작가가 그들 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만은 여기서
확실하게 해 둘 수가 있다.
김혜령은 바로 이처럼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가운데에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재미 한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1962년생인 김혜령이 미국에 건너간 것은 1980년의 일이거니와, 그의 창작활동은 1988년에 시작된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재미 한인 문학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초기의 주역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잡지로 그 당시 LA에서 간행된 '문학세계'가 있는데, 이 잡지의 신인 공모에 투고하여 당선된 것이 바로 그의 문학적 이력의 출발을 이루는 것이다. 그 후 그는 '한국일보' 미주판의 단편소설 공모에 다시 응모하여 당선하며, 1994년에는 중편 「두 개의 현을 위한 협주곡」으로 월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내기도 한다. 이처럼 재미 한인 문단과 한국 문단 양쪽에서 등단의 절차를 마친 그는 이후 지금까지 꾸준한 창작활동을 전개하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놓고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창작집 '환기통 속의 비둘기'는 바로 그 성과를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한글로 뛰어난 소설을 발표한 인물을 들어 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1963년부터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전개하면서 개성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확립하였던 김용익의 이름을 첫번째로 떠올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의 물음 앞에서 197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창작집 '날개소리'로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었던 박시정의 이름을 상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선보이는 김혜령의 창작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김용익이나 박시정의 작품들과 비교하면서 읽어 보면, 1980년대에 이르러 재미 한인 소설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넘어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단순한 양적확대의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느낄수 있다. 양적 확대의 측면보다도 더 중요한 어떤 본질적인 변화가 김용익-박시정의 시대와 김혜령의 시대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중략-
삶의 보편적인 문제 혹은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일컬어질 만한
주제들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면서 김혜령이 만만치 않은 수준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이 창작집에 실린 어떤 작품을 들추어 보아도 금방 확인된다. 예를 들어서 「가로수 사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한번 살펴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은 미국으로 건너와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연극과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우지만,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명수라는 이름의 한 남자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꿈과 투쟁, 그리고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김혜령은 소외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의 실존적 개인의 운명이라고 하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 자체도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실제로 소설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김혜령이 보여주는 범상치 아니한 형상화의 재능이다. 사라 반이라는 가수의 노래, 3장의 복권, 명수가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데려 온 늙은 개, "갓 블레스 유”라는 말과 “갓 프레스 유”라는 말 사이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복합적 관계, 명수가 대학 시절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에서 맡았던 기묘한 역할, 연극 '훼드라'의 사연… 등등, 실로 인상적인 장치들이 이 소설 속에는 자못 다채롭게 등장한다. 김혜령은 이처럼 인상적인 장치들을 다채롭게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치밀한 유기적 구성의 끈으로 얽어서 하나의 잘 짜여진 작품 공간 속에 통합시켜 들이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가 지닌 이런 양면적 재능 덕분에 「가로수 사이」는 다양한 이미지로 풍요로우면서도 탄탄한 통일적 구성을 지닌 작품이 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혜령은 이 작품 속에서 명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가지 중요한 장치를 더 만들어 낸다. 명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전체가 그의 단골 가게 여자라는, 사실상 그와 아무런 내면적 관계도 없는 타인의 눈에 의해 무심하게 비추어지다가 사라지는 자리에 놓이도록 만든다는 착상까지를 여기에 다시 추가함으로써, 명수의 이야기를 통해 탐구된 실존적 개인의 운명에 깃들여 있는 어둠의 색조를 자연스럽게 한 단계 더 강화시킨다고 하는, 색다른 성과를 거두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가로수 사이」를 읽어볼 때 우리는 김혜령이
만만치 않은 창작의 재능을 가진 작가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작품에서 확인되는 김혜령의 창작적 재능은 이 창작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재능이다.
이왕 「가로수 사이」가 언급된 김에,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 보기로 하자. 이 작품에서 기본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일상에의 얽매임과 그것의 초극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빚어지는 대립이다. 일상에 얽매인 삶의 운명을 초극하고자 하는 열망이 명수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게 하고, 연극과 영화에 대한 꿈을 놓지 못하게 하며, 아내와 딸을 버리게 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완강하게 잡아 묶는 일상의 힘은 그의 모든 시도를 좌절시키고, 마침내는 그가 자살로 일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처럼 선명한 두 힘의 대립 구도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가로수 사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명수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방금 말한 대립의 구도 위에서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 장소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그러면 미국은 이 소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나타나는가?
앞서 내가 1980년대 이래 재미 한인 작가들의 소설작품 전반이 보여주기 시작한 새로운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과 연관시켜 김혜령 소설의 위상을 언급했던 대목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물음에 대한 답이 어떻게 나올지 쉽게 짐작할 것이다.
미국은 물론 한국과 다른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 곳은 그렇게까지 특별한 공간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을 유난스러운 이질감이나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공간도 아니고, '가난한 내 나라 한국'에 대한 자의식으로 유난스럽게 괴로워하도록 만드는 공간도 아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명수는 한국에서 살 때 삶의 보편적인 문제 혹은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미국에 와서도 동일한 문제와 씨름하게 되는 것인데, 이 씨름의 상황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의 차이는 전혀 무의미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또 그렇게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공간이 「가로수 사이」 속에서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면모
는, 당연한 일이지만, 김혜령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일상에의 얽매임과 그것의 초극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빚어지는 대립의
무대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별들의 인사」에 나오는 ‘아버지’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고「그림의 못」에 나오는 ‘아버지’는 끝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지만, 그 두 아버지에게서 벌어지는 대립의 드라마는 적어도 그 심층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동일한 성격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상에의 얽매임과 그것의 초극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빚어지는 대립의 드라마를 자신의 운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한국인 혹
은 재미 한인으로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인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그런 사람은 있다. 예를 들면, 「그림의 못」에서 주인공 창호(아놀드)의 직장 동료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런 미국인들이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존재로 해서, 미국이라는 땅이 반드시 특별한 공간만은 아니며, 적어도 그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한국 혹은 또 다른 어떤 곳과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보편적인 삶의 무대라는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제 더욱 결정적인 진실로 굳어지게 된다.
-중략-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바와 마찬가지로 김혜령은 재미 한인 문단과 한
국 문단 양쪽에서 소설가로서의 등단 절차를 마친 사람이거니와, 또 한편으로 그는 역시 재미 한인 문단과 한국 문단 양쪽에서 시인으로서의 등단 절차를 마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로 활동하는 것과 나란히,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꾸준하게 지속해 왔다.
이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쓴 소설답게, 김혜령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섬세한 감수성과 서정적인 문체의 매력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소설작품들이 몇 개의 인상적인 이미지를 작품의 핵심부에 배치해 놓은 상태에서 전개되며 그 이미지를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독자들의 마음 속에 각인시키는가 하는 점을 중요한 승부처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시인이 쓴 소설’의 면모에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시인-소설가 김혜령은 이제 그의 첫번째 소설집을 출간함으로써 창작활동의 제1기를 결산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창작활동의 제1기를 결산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제2기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혜령 소설의 제1기를 결산하는 이번 창작집이 재미 한인 소설의 역사 속에서―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무대로 하여 전개되는 한글 표기 소설 전체의 역사 속에서―뜻있는 성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거니와, 지금부터 시작되는 제2기에는 그가 이제까지보다도 더욱 원숙한 작품들을 활발하게 선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목차

별들의 인사
산불
언덕 위의 집
엄마의 다락
두 개의 현을 위한 협주곡
반달
그림의 못
인 비트로

깃털
가로수 사이
신발 한 짝에 대한 명상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환기통 속의 비둘기 김혜령 2005.03.10 697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2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