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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거르는 남자

2020.09.20 14:08

최상섭 조회 수: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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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거르는 남자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최 상 섭







아파트 앞에 토실토실하게 열린 감들이 아직 물이 덜 들었는데 간밤의 비바람에 몇 알 떨어져 아깝다. 그 앞에서 예쁜 곤줄박이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어 참으로 귀엽다. 가까이 가야 조금 앞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간밤에 임을 잃어버리고 아침에 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 같아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가을은 몸을 돌려 옆만 보아도 모두가 시린 서정이 가슴을 친다. 이렇게 좋은 시절에 왜 친구는 만리타향 객지에 살면서 돌아오지 않는지, 오늘 따라 그 친구가 한없이 보고 싶다.



이렇게 가을이 익어갈 때면 나는 술을 거른다. 6월에 담가 두었던 오디술의 뚜껑을 열고 술을 거르면 인생만사가 회오리친다. 여러 개의 항아리를 모두 열고 맛을 본다. 신맛과 떱떠름한 맛이 나는 항아리는 그대로 뚜껑을 덮고, 달고 향기 나는 술을 먼저 거른다. 속으로 혼자서 인생도 이렇게 잘 익어가야 하는 건데 하며 깔대기 위에 작은 용수를 얹고 그 위에다 검붉은 오디술을 부어 거르면서 나는 회안(懷安)의 미소를 담는다.



예로부터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떡과 술을 내놓아 손님을 대접했었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가며 술을 담그고 거르는 일을 수년째 계속하고 있다. 술에 약한 나는 오디에 붓는 알콜 농도가 가장 낮은 소주를 선택하고 설탕을 적당량 혼합하여 숙성시킨다. 이렇게 숙성된 술을 거르는 일은 큰 기쁨이다. 받는 사람은 술 한 병 할지 몰라도 내게는 정성과 사랑이 담긴 술이어서 크게 의미를 부여한다. 금년에는 40kg의 오디술을 담갔는데 항아리마다 맛이 다르다. 원인을 규명하여 달고 향긋한 술로 제조해야 하나 쉽지가 않다.



나는 술을 담그는 일부터 숙성시키는 일련의 과정에 심혈을 기울인다. 발효되는 며칠 과정에는 초파리가 웅성거린다. 집사람은 아예 실색하며 초파리를 쫒으라고 성화다. 사가에서는 초파리가 술을 매개하여 숙성시킨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초파리는 후각이 발달하여 먼 곳에서 날아와 초파리가 먼저 맛을 보는 셈이다. 이렇게 술을 거를 때면 나는 심훈의 '용수 쓴 얼굴'을 그려본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 일부, 심훈-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은 심훈 선생이 보통고등학교 4학년 생으로 3.1운동에 앞장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을 떼 어머님께 쓴 편지다. 심훈은 감옥에 갇혀서도 조국을 위해 투옥되었기에 ‘개선문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이다.(인터넷에서 퍼옴)



내 유년 시절 방안 아랫목에 술독을 앉혀두고 용수를 넣고 술을 거르시던 할머니 생각과 그 용수를 쓰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심훈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비대칭으로 떠오른다. 목숨을 두렵게 생각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 지조를 지켰던 옛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삶이 농익은 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기쁨을 동반하는 물질이요. 반가운 이를 대접하는 정성이 담긴 매개체이다. 또한 모두를 상실하는 핑계요 변명의 요물이 된다. 그러나 작시(作詩)하거나 수필을 쓰는 문학인에게는 평생의 반려자로서 얼큰한 술기운이 작품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수레바퀴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나는 용수를 쓴 심훈처럼 격조 높은 인생의 반려자로 술 거르기를 통해 술이 익어가는 모습을 늘 연출하고 싶다.

(2020.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