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2013.08.20 06:35

이영숙 조회 수:290 추천:39

그 해라고 다를 리 없다. 이글거리며 내리쬐는 8월의 햇살은 내 피부를 태우려고 작정하고 덤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태양도 내가 늘 보아오던 한국의 그것과 같은 것일까. 유난히 멀리 보이는 해는, ‘내가 어찌 네가 이제껏 보아오던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따지듯 묻는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해도 새롭다. 같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어찌 해라고 한국의 것과 같기를 바랄까. 그냥 포기하는 게 맞다.
  괴나리봇짐 달랑 지고 일곱 살을 아직 다 못 채운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도착한 미국이다. 아무도 없다.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이 넓디넓은 미국 땅에 사돈의 팔촌도 없다. 힘 보태줄 친구 하나 없이 황무지를 개간하러 왔다. 의지가지없는 곳에 스스로 내려앉은 나를 남들은 용기 있다 말한다. 그러나 무식보다 더한 용기는 없다는 걸 그들은 알까? 미국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지도를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그냥 지구 어느 구석에 붙어있겠지, 맘 편히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부딪혀야 할 일들이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얼마나 많을지 알리가 없었다. 대구나 로스앤젤레스나 다를 게 없다고 굳게 믿었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들 같을 터이니.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가듯 짐을 꾸려 왔다.
  미국에서 살아가려면 ‘영주권’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가진 카드가 있어야 하는 것도 이곳에서 살아가며 배웠다. 얼마나 어이없이 멍청했는지. 더한 건, 그 영주권? 마음만 먹으면 난 가질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자신만만해 하는 그 ‘개도 물어가지 않는 플라스틱’카드가 없어서 고생하는지 알 리 없다. 오직 용기만을 가지고 과감하게 덤볐다. 내가 가지고 온 것 중엔 옷가지, 책 몇 권, 자질구레한 생활용품과 어떠한 상황이 와도 필히 이겨내리라는 ‘오기’도 함께 이민가방에 쑤셔 넣어 왔다.
  그랬음에도, 그 대단한, 용기를 넘어 오기를 가슴에 가득 담았음에도 미국은 나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영어도 못하면서, 지리도 모르면서, 아는 이도 없으면서 오기만으로 버티기가 어찌 쉬울 수 있을까. 구걸한다. 말이 되지 않을 때, 여기저기 구걸하며 다닌다. 친절한 사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주고, 냉정한, 아니 삶에 지쳐 바쁜 사람들은 부드럽게 거절한다. 몇 마디 말 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서운해 눈물을 훔친다. 거절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기위해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헤쳐 나가야 하는 모든 것에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하기를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인내’라 했다.
  어린 딸도 그 말의 의미를 알았을까? “빨리 육 개월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한다. “아이들은 여섯 달만 지나면 말하는 건 다 배울 수 있어. 어른이 문제지......”라는 말을 들은 게다. 손꼽아 가며 육 개월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딸이 가엾다. 어디 언어뿐인가. 삶이 피폐하다. 마켓에 가서 따지고 또 따져 꼭 필요한 물건만 산다. 맛이 있는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싼 것인가가 관건이다. 어린 딸이 처음 보는 미제 초콜릿과 과자가 먹고 싶어 카트에 담은 것을 얼른 꺼내 다시 진열장에 올려놓는다. 비정한 엄마가 돼야만 한다. 모든 걸 아껴야 했으니까. 한 달에 천 달러로 아파트 렌트비, 차 유지비, 생활비가 다 돼야 한다. 차는 중고로 구입했다. 스틱기어인, 자동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구석도 없는, 모든 게 매뉴얼인 차를 샀다.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는 “요즘도 유리문을 핸들을 돌려서 여는 차가 있구나.”고 신기해했다. 마침 중고시장에 싸게 나와 있는 그 차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가계부를 꼼꼼히 적는다. 한국에서 가져온 옷이 금방 작아진, 무럭무럭 자라는 딸의 옷은 중고가게(thrift store)에서 사 입힌다. 다른 생필품은 그 무렵 우리가 가장 애용한 곳인 99센트 스토아에서 산다.
  “미국 온 지 십 년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그 무렵이면 모든 게 안정 되겠지 생각했으니까. 영어도, 생활도, 신분도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생각처럼 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리가 있었겠나, 미국 하룻강아지인 나에게.
  폭풍우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몰려와도, 따가운 햇살이 피부를 태워도, 나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시간은 그냥 그렇게 계속 흘러간다. 육 개월이 지나 딸은 영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리를 익혀 어디로 가면 어떤 길이 있는지 대충 알게 된다. 더듬거리며 영어로 내 의사를 표시할 만큼은 된다. 생활도 얼마큼 안정을 찾았다. 물론 아직도 마켓에서 물건을 사기위해 망설인다. 영어로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해 엉뚱한 오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잘 아는 길이 공사나 사고로 막혀 있으면 '길치'인 나는 어떻게 돌아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십 년 안에 우리의 신분은 확실해 지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이만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거다.
  드디어 우리 신분에 변화가 생겼다. 딸은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 저소득층 아파트를 신청해 1,200대 90의 치열한 경쟁을 헤치고 입주했다. 마음에 안정도 있다. 큰 욕심 내지 않으니 이만해도 복 받은 거다. 이번 8월, 우리는 케이크를 하나 샀다. 초는 열네 개를 준비했다. 미국 온지 십사 년이 되는 날이다. 딸과 함께 감사 기도를 하고 케이크를 잘랐다.
  8월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힘든 선택을 한 날이다. 눈물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14년이 지난 이번 8월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날이다.
  8월은 내 삶에 윤택함을 베푼 날이다. 8월은 내 딸의 일생을 송두리체  바꿔놓은 날이다.

8/1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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