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자의 시 읽기
2020.09.20 18:58
- 어느 독자의 詩 읽기
손님이 없어 죽을 지경이라는 옷가게 선배
장례식장에 근무한다는 내 귀에 대고
목 매달 때 사용했다는 끈말이야
그 끈이 가게에 있으면 그렇게 장사가 잘된다고 하네
나 그것 좀 구해주면 안될까?
매스컴의 자살은 기사화된 단, 몇 건에 불과할 뿐
장례식장에 들어오는 사인은 절반이 자살
독거노인의 음독은 자식들이 쉿, 쉿
우울증의 죽음은 형제들이 쉿, 쉿
성적 비관의 투신에는 부모들이 쉿, 쉿
목맸던 끈 가게에 두면 불티나게 팔린다는 말
\맞는 말 같네요.
저 끈으로 목을 매달리라!는 심정으로 일을 하면
성공 못할 일 뭐가 있을까요
쉿, 쉿
- 천지경 시집 <울음 바이러스> 중 「끈이 필요해요」 전문
삶이 詩가 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경험치만 詩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삶을 뛰어넘는 초월성까지 포함한다.
천지경은 등단한지 11년 된 묵은 詩人이다.
그런데도 <울음 바이러스>가 첫 시집이다.
詩人에게 詩는 삶이고 죽음이며 때로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한다.
詩人은 진주 중앙병원 장례식장 급식부에 근무한다.
산 자를 위한 밥을 하고 죽은 자를 위한 제상을 차리는 게 그녀의 직업이다.
그녀의 일상은 죽음을 접대하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어떤 말로 치장해도 일상의 죽음은 남루하고 삶은 칡뿌리처럼 질기다.
새벽 5시면 출근하는 종합병원 급식소 여자들은 / 장화를 신는다/ 커다란 강철 솥이 쿵쾅대고 노란 카레 물이 용암처럼 끓어/ 순식간에 설거지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곳, 그곳에/ 집에서 살림만 살던 여자 한 명이 입소했다/ 설거지 쪽에서 하루를 견딘 여자는/화장실에 앞치마와 장화를 벗어놓고 사라졌다/장화를 신는 곳에서는 일을 못하겠다고 했단다
- 「장화를 신은 여자들」 중 1연
급식소에서 장화를 신고 일하는 그녀의 노동은 고되다.
그녀의 중노동은 급식소 25년차 큰언니의 입을 빌려 직설적으로 말한다.
‘씨발년, 그라모 집구석에서 가랑이나 벌려주지 머할라고 여기 와서 염장을 지르고 가노.'
노동의 숭고함이나 권리나 보다나은 대우에 대한 주장도 없다.
삶도 죽음도 유순하게 받아들인다.
고단한 삶으로 죽음을 접대하는 그녀의 인사를 보자.
눈 뜨면 귀신 밥 차리고 물리고/예쁜 옷 입고 귀신 집 드나들며/귀신 옆에서 밥도 커피도 마신다/애틋한 눈길로 귀신을 바라본다/고요히 누운 모습에 종종 목이 멘다/몇 번을 까무라치는 어머니 앞에 벌떡 일어나고 싶은 아들귀신/따돌림 당하다 고층에서 뛰어내린 여고생 귀신/홀로 살다 웅크린 채 얼어 죽은 할배 귀신/목 맨 귀신, 약먹은 귀신, 물 젖은 귀신/아내 따라 저승도 같이 간 남편 귀신까지/귀신의 집에 내가 산다/다정한 귀신들이 나를 먹여 살린다
- 「다정한 귀신 」전문
詩人이 선택한 언어는 은유나 미적 조어가 없는 진솔함이다.
현실의 언어는 치장이 필요 없다.
힘들고 고단한 중노동의 삶에 비속의 욕설은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염을 하는 시신에 애도의 말을 건네고 모든 억울한 죽음에 다정한 눈길을 보낸다.
소망병원 장례식장 조리실은 나의 일터
詩人은 진주 중앙병원 장례식장 급식부에 근무한다.
산 자를 위한 밥을 하고 죽은 자를 위한 제상을 차리는 게 그녀의 직업이다.
그녀의 일상은 죽음을 접대하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어떤 말로 치장해도 일상의 죽음은 남루하고 삶은 칡뿌리처럼 질기다.
새벽 5시면 출근하는 종합병원 급식소 여자들은 / 장화를 신는다/ 커다란 강철 솥이 쿵쾅대고 노란 카레 물이 용암처럼 끓어/ 순식간에 설거지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곳, 그곳에/ 집에서 살림만 살던 여자 한 명이 입소했다/ 설거지 쪽에서 하루를 견딘 여자는/화장실에 앞치마와 장화를 벗어놓고 사라졌다/장화를 신는 곳에서는 일을 못하겠다고 했단다
- 「장화를 신은 여자들」 중 1연
급식소에서 장화를 신고 일하는 그녀의 노동은 고되다.
그녀의 중노동은 급식소 25년차 큰언니의 입을 빌려 직설적으로 말한다.
‘씨발년, 그라모 집구석에서 가랑이나 벌리고 있지. 머하러 와서 염장을 지르고 가노. ’
노동의 숭고함이나 권리나 보다나은 대우에 대한 주장도 없다
삶도 죽음도 유순하게 받아들인다.
고단한 삶으로 죽음을 접대하는 그녀의 인사를 보자.
눈 뜨면 귀신 밥 차리고 물리고/예쁜 옷 입고 귀신 집 드나들며/귀신 옆에서 밥도 커피도 마신다/애틋한 눈길로 귀신을 바라본다/고요히 누운 모습에 종종 목이 멘다/몇 번을 까무라치는 어머니 앞에 벌떡 일어나고 싶은 아들귀신/따돌림 당하다 고층에서 뛰어내린 여고생 귀신/홀로 살다 웅크린 채 얼어 죽은 할배 귀신/목 맨 귀신, 약먹은 귀신, 물 젖은 귀신/아내 따라 저승도 같이 간 남편 귀신까지/귀신의 집에 내가 산다/다정한 귀신들이 나를 먹여 살린다
- 「다정한 귀신 」전문
詩人이 선택한 언어는 은유나 미적 조어가 없는 진솔함이다.
현실의 언어는 치장이 필요 없다.
힘들고 고단한 중노동의 삶에 비속의 욕설은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염을 하는 시신에 애도의 말을 건네고 모든 억울한 죽음에 다정한 눈길을 보낸다.
소망병원 장례식장 조리실은 나의 일터/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즈바라 프라바를 타야 훔/
십여 년 내가 올린 제삿밥 받아먹은 영혼들이여/ 내 아이들 앞날을 환하게 밝혀 주소서
- 「광명진언」 전문
詩人의 삶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며 삶에 대한 영속성이다.
자식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내 자식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는 한 나는 죽지 않는 것이며 삶은 계속된다.
천지경 詩人 그녀가 노래하는 것은 결국 삶의 영속성이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詩人인 세상이다.
쉽게 쓰인 詩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안다.
시의 언어와 철학의 언어에 굳이 공통점이 있다면 추상성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추상성의 내포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시의 언어는 하나의 맥락을 그러니까 하나의 세계만 포함되지 않는다. 이질적이고, 모순적이기도 한 세계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게 시의 언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학 언어와는 다르게 시의 언어는 구체성을 가지고 그것들을 모두 표현하려고 한다. 극한을 향해서. 시의 난해성은 여기에서 파생된다. 심지어 시는 음악까지 가져야 한다. 음악이 빠지면 시는 산문이거나 어떤 경우는 관념의 나열이 되기도 한다.
동시에 이미지를 통해 음악이 표현하기 힘든 시각적 실감도 겨냥한다. 이래서 시가 오래된 말로 하자면 언어의 정수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세계의 뒷면이 궁금하다. 하지만 이 뒷면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끔 나타나는 광기는 시 자체의 속성 때문이라기보다 이 뒷면 때문이다.
거기에는 구렁이가 있을 수도 있고 악마가 있을 수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가 범상해졌다면 그것은 누구나 느끼고 알 수 있는 앞면에만 천착해서 벌어진
일일이지도. 이 현상은 급진성을
가장한 정치시에도, 언어의 토대가
자아에 있다고 보는 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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