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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3:18

은혜의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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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이 원고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발간되는 신앙 월간지 ‘새 하늘 새 땅’의 청탁으로
쓰여진 것이며 이것은 2011년 10월호(통권 제110 호)에 표지 인물사진과 함께 수록된 것임.
(필자)
………………………………………………………………………………………………...

= 오정방의 자전적 에세이 =
           은혜의 잔이 넘치나이다!

오정방



40대 중반에 나름의 꿈을 안고 처남 가족과 태평양을 건넌 날은 주일이었다.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인척들과 친구들, 그리고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국의 김포비행장을 떠난 것은 1987년 9월 27일이었고 벌써 4반세기가 가까워 온다. 미국이 선진국이요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한국을 따르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보다 날자를 더 빨리 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착한 날도 같은 날인 주일이었는데 이미 떠나기 전에 미국에서의 출석교회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삿짐을 풀지도 않고 교회를 찾아 가보니 그 교회는 숙소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포틀랜드한인성결교회’였다. 지금은 포틀랜드 지역에 같은 교단 지교회가 다섯이나 있지만 그 당시 성결교단교회는 그것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달리 교회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곳에 도착하여 처음 살았던 아파트에서 4년쯤 지나 지금의 주택으로 옮겨와서 현재까지  포틀랜드 한 곳에서만 살고 있는 오레고니언인데 처제의 초청으로 아내와 딸, 아들 남매를 데리고 가족 넷이서 미국이민을 왔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모두 결혼하고 자녀들 사이에 2세들이 생기면서 직계 식구는 우리 내외를 포함해 11명으로 늘어 났다. 사위와 외손녀가
둘, 며느리와 친손녀가 둘에 올 9월 학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막내 친손자가 있으며 딸은 워싱턴 주 켈소에, 아들은 오레곤 주 비벌턴에서 각각 살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운데 효도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올해 고희를 넘긴 뒤 내년으로 망팔(望八)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지난 날을 한 번 조용히 돌아 보니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너무나 넘쳤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순간순간 하나님 인도의 연속뿐이었음을 새삼 깨닫고 감사드린다.

*강남성결교회에서 온누리성결교회까지  

60년 전, 소학교 때인 열 살에 친구를 따라 고향 울진에서 처음으로 감리교회를 출석하였고 17살에 출향하여 학창생활, 군병영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내 나이 불혹이 되기까지는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지냈다. 1979년 9월, 세계산악연맹 제14차 정기총회에 회장님을 수행하여 총회장인 뉴햄프셔까지 왔다가 뉴욕, 워싱턴 디씨, 엘에이 그리고 이곳 포틀랜드를 돌아서 10월에 귀국한 뒤에 내가 결정한 것 중 하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어느교회든 선택하여 교적을 가지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출석할 교회를 찾던 끝에 40살이 되던 해 첫 달 첫 주부터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강남성결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당시 담임은 부흥사인 강달희 목사님이셨다.
미국 와서 처음으로 만난 목사님은 이창규, 이대규 형제 목사님으로 우리는 출석 그 다음주
부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였고 딸아이는 반주자로 섬길 수 있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딸은 포틀랜드주립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지금은 자기 집 근처에 있는 미국교회의 반주자로 , 중학생이던 아들은 불혹을 눈앞에 두고 우리 교회 찬양인도자로 봉사하고 있다.
이민와서 근 4년이 그렇게 흐른 뒤에 미주기독성결교회 총회장을 지내신 김석규 목사님을 만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데 동참하니 이 교회가 지금의 ‘오레곤제일교회’이며 여기서
안수집사로 봉사하다가 그 교회의 적극 지원아래 전도사로 있던, 태평양을 함께 건너온 처남이자 지금은 브라질 쌍파울로에 위치한 대한교회 담임인 이수명 목사님과 전혀 연고가 없는 다리 건너 워싱턴 주 밴쿠버 시에 ‘밴쿠버한인성결교회’란 이름으로 교회문을 열게 되었다. 매일 새벽기도와 공예배에 다리를 건너 다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첫해부터 많은 성도들을 보내주셔서 하반기부터는 자립할 수 있었고 5년 뒤에는 자체 예배당을 구입하여 포틀랜드 사우스  이스트 현재의 위치로 예배 처소를 옮기면서 교회를 ‘온누리성결교회’로 개명했다.
교회설립 후 15년간 시무장로로 섬기다가 2010년 5월, 은퇴하면서 원로장로로 추대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교회는5년전 제3대 강재원 목사님이 부임한 이래로 일취월장 부흥하여 주일 1부, 2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가운데 공간의 부족으로 교육관을 새로 짓게 되어 현재 한창 건축중이며 오는 연말쯤 준공을 앞두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랴.
장로 은퇴 후에는 3년 전에 설립된 ‘온누리세종한국학교’ 책임을 아직 맡고 있으며 또한 ‘할렐루야 찬양대’에서 대원으로 봉사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된다. 필자는 금년으로 31년차 성결교인으로 교단적으로는  ‘성결교회역사와문학연구회’의 해외 멤버이기도 해서 ‘성결교회인물전’ 집필자의 한 사람으로 위촉받아 제9집에 이 지역에서 목회하다 소천되신 ‘고 김석규 목사편’을 집필하여 수록 한 바 있다.

* 일반사회단체 참여활동

8. 15 해방후에 가장 먼저 발족된 사회단체는 진단학회였고 그 다음이 1945년 9월 15일에 창립된 ‘한국산악회’이다.  ‘60년대 말,  등산에 취미를 붙여 이 단체에서 조직적인 산행을 하게 되었다. 주말이면 배낭 메고 산에 가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는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국내의 이름있는 산은 거의 다 섭렵하였고 일본의 북알프스 외에 극동의 최고봉인 대만의 옥산(3,997m)에도 1980년9월 등반대를 이끌고 다녀왔다. 적어도 ‘79년 말까지는 산이 우선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분이 산악회 이사였으며 월간 ‘등산’이란 잡지도 발행했던 관계로 하나의 직업의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국토의 막내인 독도를 1969년 9월에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이 훗날까지 좋은 경험담으로, 또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여 오늘 현재 50여편의 독도시를 남기게끔 되었다.
그러다가1980년 배낭을 내려 놓고 주일엔 무조건 교회에 출석하게 되니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으나 성경안에서  에덴동산을 비롯하여 갈보리 산까지 수많은 산을 만나면서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 졌는데 교회를 정하고 출석 한 뒤 첫 1년간이 지금 생각하니 가장 은혜가 충만한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마음 먹고 출석하던 첫 해 추수감사절 절기 때 목사님이 감사문을 성도들에게 다 쓰게 하셨다. 나는 감사의 조건 120항목을 써서 제출했고 이것을 읽으신 담임 목사님이 감동을 받았는지 대예배 때 직접 낭송까지 하게 하셨으니 말이다.

그 다음은 ‘한국에스페란토협회’이다. 국제어 Esperanto는 1민족 2언어주의를 제창한 폴란드 안과의사 루도비코 자멘호프 박사( Dr. Ludoviko Lazaro Zamenhof /1859-1917)가 1887년에 창제 발표한 국제어이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는 자기나라 말을, 다른나라 사람들 끼리는 이 언어를 누구나 배워서 사용하자는 것인데 지금까지 발표된 수많은 인조어 가운데 가장 수명이 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동지들이 많이 있어서 여행이나 취미활동, 문학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가능하며 섹스피어 문집은 물론 논어, 맹자, 손오공까지 다 번역되어 있다.
필자는 대학 초년 시절에 이것을 접하고 그 뜻이 너무 좋아 이 언어를 습득하였으며 실제로
해마다 개최되는 에스페란토세계대회 중 항가리 부다페스트(’83)와 중국의 북경(’86) 대회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장충식 단대총장, 김현욱 국회의원(현 민주평화통일자문희의 수석 부의장)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국제 회의는 동시통역이 아닌 이상 몇개 국어로 그 때 그 때 통역을 하느라 시간이 몇배나 들지만 이 언어는 모두가 배워서 참가하기 때문에 통역없이 직접 한 언어로 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이 여간 이점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분쟁은 서로 이해가 부족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언어의 소통은 분쟁 해소에 첩경이 아닐 수 없기에 창안자도 이 점을 뼈저리게 느껴 이 언어를 창제하고 이 언어로 인한 향후 모든 권리와 이득을 포기하고 인류에게 바친 것이다. 정말 장한 일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관련된 단체가 조국 대한민국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희의’이다. 2009년 제14기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금년 7, 제 15기에 연임되기까지 조국에 대한 조그만 봉사의 기회라도 될 것이라 생각하고 수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작년 4월에는 해외자문위원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민 20여년을 넘겨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었다. 비록 공식일정 4일간을 포함하여 9일밖에 고국에 머물지 못했지만 10여편 이상의 시 작품도 건질 수 있는 유익한 방문이기도 했으며 그리운 친척, 친구들을 간만에 만나본 귀한 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의 길은 아직 요원하고  좌파 종북 세력들이 고국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버젓이 활개치고  있는 실정이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역사를 올바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 토대 위에 더 든든히 세워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국가로 반드시 지켜 주실것이고 우리나라를 들어 세계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실줄을 확실히 믿는다.

*나의 문학인생

한학자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소년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군복무시에 만난 동기생의 아버지로 민족시인인 가고파의 작가 이은상 선생님을 뵌 후 제대후 문하에서 사서로, 개인비서로 인연이 된 것이 나중에 조카사위가 되는 인척의
연을 맺게 되었고 또 늦깎기였지만 글쟁이가 된 단초가 되었다면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  미국에 이민와서 우리 부부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100일 앞두고 문득 무슨 선물로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주지? 하는 생각으로 구상한 것이 아내 몰래 책을 만들어 주자고 한 것인바 그것이 바로 나의 시문선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대를 선택하리’였다. 책이 발간되고 나서 기독신문에서 3단짜리 서평이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자극되었다면서 기독신문 김종호 사장, 라디오 한국 서정자 사장 등이 뜻을 모아 다음 해, 1999년 12월에 함께 발족시킨 단체가 ‘서북미문학인협회’였다. 초대 김종호 , 2대 박숙희 회장에 이어 3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한달에 한 번 씩 시애틀을 왕래하면서 함께한 권태성 시인 등과 함께 2002년 6월에 창립한 것이 오늘의 ‘오레곤문학회’인데 이는 실로 오레곤 주에 한인이 발을 처음 들여놓은지 89년 째 만의 일이었다. 등단도 하지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있고 나니 한국에서 목회를 하시던 박기완 목사님이 등단을 권유하게 되어 시 작품 5편을 한국에 보내 놓고 미국에서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를 써서 응모한 결과 2000년 1월에 양쪽에서 모두 기회를 주어서 정식으로 한국과 미국 문단에 데뷔하여 작품활동을 하는 중에 2005년 수필로도 한국에서 등단하게 되니 문재가 둔하기는 해도 글쟁이가 아니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동안 쓴 작품은 시, 시조, 수필 등 총 1천500여편이 되며 대부분 인터넷에 띄우게 되었는데 지금도 검색창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돌아다니는 작품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애초에 소망했던 대로 신앙시를 많이 쓰지는 못했으나 그 가운데 ‘나 때문에’(백경환 작곡)등 여러편이 미주찬송가공회를 통해 곡이 붙었으며 ‘바람이 부는 까닭은’ 등 다수의 작품이 가곡으로 탄생하기도 했다.

*글을 마치며

편집자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여기까지 지난날을 잠시 돌아보면서 글을 마치려 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보다 얼마나 당신의 뜻에 맞게, 당신을 기쁘게 할만한 삶을 살았느냐를 더 중히 여기심을 모르지 않는다.  
2000년에 오레곤한인교회장로회를 조직하고 다음해에 제2대 회장을 맡았으며 2004년에 창립한 오레곤장로찬양단의 단장을 지금 맡아서 ‘제8회 찬양의 밤’ 정기공연을 10월 1일에 포트랜드중앙교회에서 가졌다. 그리고 오레곤한인기독실업인회장을 역임(2000년)한 뒤에도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 CBMC 조찬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지만 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보다 더 하나님 자녀로 합당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교단교파를 초월한 연합사역을 위하여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다.
한없이 부족하고 미천하지만43년 전 좋은 배우자를 짝지어 주심과 이 시간까지 허락하신 건강에도 감사하며 좋은 이웃과 성도들을 만나게 하심도 감사하며 섬기는 교회가 날로 부흥됨을 또한 감사하는 등 항상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받은 복이 적지 않았음에도 더 충성하지 못하고  더 바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던 삶을 항상 뉘우친다. 하나뿐인 ‘나는 목숨을 네게 주었건만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구원의 은총을 늘 감격하는 가운데 신천신지(新天新地)를 소망하며….

끝으로 출생 25,567일만이 되는 지난 5월, 70회 생일 때 발표한 졸시(시조) ‘내가 맞은 고희(古稀)’ 1편 (10수)을 적어 글을 마무리 한다.


암울한 왜정시대 신사년 오월 초에
경상북도 울진에서 이 세상에 출생하여
주님의 보살핌으로 칠십 고희 맞이했네

해방도 맛보았고 전쟁도 겪었으며
사일구와 오일륙도 서울에서 치뤘을 제
역사의 소용돌이에 현기증도 났었다네

십칠년 살던 고장 청운의 꿈에 실어
학업으로 결혼으로 객지생활 몸에 베니
고향을 그릴지언정 만족하고 행복했네

국내외 아름다운 명산을 올라보고
대자연의 기를 받아 새 건강을 유지하며
산처럼 의연하고자 노력하며 지냈다네

선물로 주신 남매 정성껏 키우다가
한창 때인 사십 중반 미국으로 이민와서
서북미 오레곤에서 이십 사년 살고있네

꿈많던 문학청년 늦깎이 시인으로
글쟁이가 되었건만 남보기엔 부끄럽고
셈하니 천오백여편 인터넷에 떠다니네

죄뿐인 부족한 것 장로로 세움받아
십오년을 시무하다 대과없이 은퇴하니
열심히 더 못한것만 새록새록 기억나네

소망은 하늘나라  땅의 것 뒤로하고
말씀 중심 교회 중심 기뻐하실 삶을 살면
야훼는 예비하시리 영원하고 좋은 집을

두 남매 짝을 지워 다복한 가정 보며
친 외손녀 네 명에다 친손자 대를 잇고
놀라운 하나님 은혜 마음 깊이 감사하네

내자와 사십 삼년 꿈같이 보냈지만
허락하신 귀한 생명 부르시는 그날까지
큰 축복 감격하면서 사랑하며 해로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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