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의 문학서재






오늘:
11
어제:
21
전체:
46,622

이달의 작가

American Dream의 애환 (수필)

2018.03.07 07:24

양상훈 조회 수:68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에서 이루고자 하는 가치價値나 사회적 수준, 민주주의, 평등, 부의 축적 등 많은 사람들의

꿈을 싱징 하는 말이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로서 약 200여 민족이 언어, 칼러, 문화 습관이 다른 다양성 속의 통일이란 형태로, 마치 셀러드로 믹스하여 쟁반에 담은 사발(bowl)같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복합적인 문화의 융합이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 되어 강대국으로서 여러 면에서 위상을 높여 발전해왔고, 짧은 역사에서도 패권 국가로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도 희망과 기회의 땅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 들어오고 있다.

 

 

현재 3억 2천 3백 여만 명의 미국 인구 대열에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도 114년이란 이민 사 갖고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망국의 어둠이 짙어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연과 같은 가슴 아픈 애환을 지니고 있다.

190211월 조선 말 고종이 하와이  농장주들의 요청에 이민을 허락함으로써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190212월 22Gaelic호를 타고 신천지를 향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인천항을 기약 없이 떠난 게 첫 이민이다.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없어 일본 고베 항을 경유하게 되었다.1903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여 101명 중에 신체검사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만이 허가를 받아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한민족 최초의 한인 미국 이민으로 기록 되고 있다.

 

 

이때에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한인 노동자 대부분이 남자들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 여성이 거의 없어 결혼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동양인과 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 혼 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고 ,결혼하려 한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거리와 비용 탓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별을 봐야 뽕을 따지 않은가! 그래서 궁여지책窮餘之策에 생겨난 것이 사진 결혼 이었다.서로가 사진을 중매쟁이를 통하여 주고받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자를 만나려 하와이로 건너오는 방법인데 이런 식으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에 건너오게 되었다.

사진만 보고 결혼 하다 보니 우습기 도하고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가 참으로 많았고 문제도 적지 않았다. 노동 이민 온 총각들은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0-15년 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늙은 신랑과 어린 신부가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 분홍 빛 희망, 금의환향 錦衣還鄕 의 꿈보다는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들 이었다.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사탕 수수 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삯 바느질을 하여 오로지 자식과 자식 교육에 온 힘을 다하여, 하와이를 우리 민족 사에 이민 종가로 이름 부친 분들이다. 부모들의 희생으로 후손들이 대부분 성공하여 미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들도 많이 나왔던 현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후 일제 식민 통치에서 이민 허용은 불가능 했고, 해방의 혼란 기와 정부 수립 후 6.25전쟁 전후 간간히 미군의 인연으로 미국에 입국한 경우는 있었지만 미 미 하였다. 그러다가 미국 이민의 본격적인 물결은 이민 문호 개방과 더불어 1970년대에 들어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국의 가난과 어려운 환경 현실을 탈피하여 풍요로움과 기회의 땅 신대륙에 몰려오기 시작 때였다. 여건과 기회가 되면 너도 나도 미국으로 이주하기를 원했고, 사회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숨김없는 사실이다.

물 밀 듯이 밀려 든 이민 물결이 증가 추세였던 패턴이 1980년을 접어들어 주춤하기 시작하여 그 후론 감소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막연히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신대륙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깨 닫기 시작 하던 때였다.

그러나 여러 형태로 미국을 향한 입국 물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동안 저마다 더 높은 이상과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키 위하여 미 대륙에 상륙한 한인들은 이질 문화의 갈등과 어려운 장벽을 잘 극복하면서, 짧은 이민 사에 비해 근면 한 민족으로 뿌리를 내려 성공적인 이민 모델을 창출한 민족으로 비쳐지는 점은 모두 인정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젠 거의 2백만의 한인들이 미국 땅에 정착하여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안에서 없거나 부족한 것을 밖에서 발견하고 안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밖에서 이뤄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결국 애국의 길이요 국력 신장의 길로 조국 발전에 크게 공헌 해 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변 이민세대들에게 왜 이 땅에 왔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녀 교육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하나로, 솔직한 면도 있지만, 필자를 포함한 자기 합리화를 위한 언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녀들을 보다 좋은 환경에 성장 시켜 더 훌륭한 교육 시스템에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고 기회의 나라에서 주류 사회에 그들의 꿈을 펼 수 있도록 하는 소망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란 자유분방해서 아이들 개성이 지나치게 존중되어 있다. 울타리 없는 공간에 언제든지 정상 레일을 벗어날 수 있다는 우려와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도 사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 항상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조바심으로 경계를 갖게 되곤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민을 왔기 때문에 아이들을 버렸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모이면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한인 부모들의 심신 풀인데, 자녀들의 비행으로 말 못하고 멍든 가슴을 안고 있는 결손 가정을 보면 부모로서 마음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민 역사가 길어지고 그 뿌리도 정착됨에 따라 청소년들의 비행과 범죄도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이민자 모두 아픔이요 고통이며 책임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곳 토양에 적절히 혼합 시켜 미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자세를 바람직하게 생각하며, 또한 차세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사는 곳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뿌리내려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유태인의< 탈무드>는 그들의 인생 철학이며 생활 교본 이라고 볼 수 있다.자녀들에게 많은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교육 원칙이 늘 회자 하고 있다. 한인 부모의  자녀 교육은 유태인 못지않게 열정이 있어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아직도 미 대륙은 매력의 땅으로 각광 받고 있는 듯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다.

따라서 태평양을 건너오는 한민족의 이민 물결 역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짧은 역사에 족보도 없는 나라이면서도 소프트 하드웨어로 치밀하게 짜여진 사회, 백만장자도 극빈 자도 차별 없이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는 민주주의 동 등의 나라, 누가 정치를 해도 굴러 가는 이상한 나라, 기독교적인 양심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그래도 약자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는 사회, 정의와 인도주의가 살아 있다는 나라, 다수와 소수,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이 부단히 싸우고 있는 사회...

한인들은 초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언젠가 성공해서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 막상 떠날 수 없는 유혹의 땅인지 모른다. 우리 주변엔 수 십 년 이상 미국에 살면서 시민권자이면서도 마음은 늘 한국에 있어 아직도 도봉산 설악산, 명동, 청진동 해장국 골목을 헤매며 그리워하고 있다. 고향에 곧 돌아간다 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국이 좋아 지금까지 꾸준히 살고 있는 것이다. 황혼의 언덕에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상정 人間之常情이리라. 언젠가 돌아간다는 그 푸념이 

이민 생활의 촉진제가 되고 있는지 모른다.

 

 

이민세대들은 아메리칸 드림의 날개를 달고, 바다를 날라 온 이상 귀중하게 간직해온 고향의 토양을 버리지 않고 여기서 후손들에게 새로운 둥지를 함께 튼튼히 설정해주는 일이 과제이고 보람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주인 의식을 확고히 하여 미 방방곡곡에 한민족 물결이 뻗어나가도록 해야 할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나 인생은 언제 어디에서 살만하며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 희망과 보람을 갖고 행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신념으로 채워 나갈 때 누구나 가능할 것 이리라. 어떠한 역경과 불우한 처지에 있어도 차분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여건 속에 최선을 다하는 동안에, 언젠 가는 수평선 넘어 여명의 동이 트일 것이다. 특히 미 대륙은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공정한 룰의 사회가 아닌가.

황금을 위하여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질주 해온 사람들도 그동안 값진 많은 것도 흘리며 달려오지 않았는지 이제 잠시 뒤돌아 봐야 할 때이다.

 밤이 새도록 돈을 헤아리는 손가락보다 시 한 줄을 쓰는 손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행복은 부와 재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바탕으로 보람찬 평범한 생활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 한다. 워즈.워스도‘Plain living and highly thinking. 이 행복의 요건이라고 하였듯이 평범한 생활과 고상한 사고, 이것이 이민 생활의 철학이었으면 한다. 소유의 최대화, 명예의 최고 화 , 향락의 극대화가 이민 생활의 성공일 수 없고, 더구나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고르는 임종을 맞이하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당신의 문을 노크할 때 무엇을 그에게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나는 나의 생명이 충만한 광 주 리를 그 손님 앞에 내어 놓겠습니다.나는 절대로 그를 빈손으로 돌려 보낼 수 는 없습니다.’

우리는 떠날 때 무엇이라도 값진 것을 남겨 놓고 떠나야 하겠으며, 죄악과 오 욕으로 점철된 누더기를 광 주 리에 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아름다운 유산을 생명의 광 주 리에 남겨 놓고 가야 할 것이다.

 

보람을 위해서 살고, 보람 있는 인생으로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이것이 행복의 열쇠라고 정리하고 싶다. 경제적 가치 기준에 치중하던 아메리카드림 이란 것도 이제는 삶의 질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보람 된 생활이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으로 재고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