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배움의 길에 발간 신호등은 없다

2007.03.19 06:59

이수홍 조회 수:98 추천:15

배움의 길에 빨간 신호등은 없다       - 나의 고등학교 시절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이수홍 나는 1953년 4월 1일 구례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농과와 임과 등 두 개 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름만 구별했을 뿐이었다. 중학교 졸업자 중 대학까지 갈 사람들은 순천이나 광주, 여수로 진학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구례농고로 진학했다. 45명씩 2개 반이었는데 1개 반은 여학생이 10명이나 있었다. 여학생도 광주나 순천으로 진학하지 않은 학생들이 구례농고에 진학한 것이다. 농업학교라 농업시간에 삽을 들고 꼬박꼬박 실습을 하였지만 물리나 화학 선생님은 아예 없었고 수학선생님도 공석일 때가 있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배구부로 활동했고 포지션은 전위센터였다. 학교 형편상 공식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팀을 양성하지는 않아 교내에서만 활동을 했다. 기계체조 평행봉과 철봉도 열심히 했다. 나는 평행봉을 좋아했다. 평행봉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많은 남녀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평행봉에서 물구나무서기는 고희가 넘은 지금도 거뜬히 할 수 있어 막둥이를 감탄케 하기도 한다. 최재식이란 친구와 자취생활을 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 때는 1년 선배였지만 졸업은 같이 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1년 후배가 된 친구다. 그 친구의 집은 해마다 산수유축제가 열리는 구례군 산동면 중동에 있었다. 나는 그 집을 자주 찾아갔고 그의 부모는 나를 아들처럼 여겨 주셨다. 중학교 때 친했던 윤택근 군은 나와 함께 자기 집에 가기를 좋아했다. 그 집에 가면 나 때문에 반찬도 걸게 장만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윤택근 군과는 계속 친하게 지냈다. 그의 친구인 내 1년 선배 김종복은 나를 좋아해서 나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자기가 입던 교복을 나에게 주기도 했다. 집이 부자였고 그때부터 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 말[馬]을 두 마리나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가 앞으로 큰 부자가 되면 집 두 채를 나란히 지어서 나와 함께 살자고 했었다. 나와 같은 반이며 가징 친한 친구는 박해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학교 서무과에 근무했고 부자였다. 나보다 두 살 위였다. 나는 그때 자취를 하였는데 쌀이 모자라 점심을 거를 때가 많았다. 친구가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면 운동장에 나가 운동을 하였다. 그 친구는 내가 점심을 못 먹는 것을 알고 학교 옆 둑에서 아주머니가 파는 빵을 사서 내게 주기도 했었다. 1년 후배이면서 친하게 지낸 양학주 군은 열심히 기타를 연습하기도 하였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였기에 기타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가요를 많이 연주했고 나는 그에게 대중가요를 배웠다. 구례군내 콩쿠르에 그 친구의 권유로 출전해서 ‘꿈에 본 내 고향’을 불렀다. 이 곡은 지금도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다. 군복무 때 서울 종로에서 ‘자니음악학원’을 경영하는 그와 다시 만났던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장가 간 사람도 두 사람이나 있었다. 전통혼례식장에 참석한 우리는 막걸리도 마셨다. 학생은 극장 출입을 못하게 했지만 여학생 친구까지 데리고 몰래 영화도 보았다. 그때 영화는 영사기가 한 대라 필름이 다 돌아가면 필름을 갈아 끼울 동안 장내에 불을 밝혔다. 도둑영화를 본 우리는 불이 켜지면 임검석 밑에 숨었다가 불이 꺼지면 다시 나와 보았다. 운동하고, 노래 부르며, 막걸리를 마시고, 도둑영화도 보며 잘도 놀았던 시절이다. 대학진학을 포기했지만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막상 공부를 하려니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지 않아 문제였다. 딴 과목은 혼자서 독학도 가능했지만 수학은 지도가 필요했다. 의형인 김종복이 수학 잘하는 사람을 가정교사로 주선해 주어 매일 밤 수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박해수와 문홍식이란 친구와 세 사람이 천은사 도계암에 들어가서 공부도 했다. 지금은 지리산 노고단 순환도로가 생겨 도계암까지 가는 도로가 뚫렸지만 그때는 깊은 산속이었다. 새벽 4시 반, 목탁소리에 잠이 깨어 공부를 할 때는 ‘어느 시험인들 못 볼 소냐!’ 자신감이 생겼다. 밤이 깊어지면 산짐승 소리가 들렸다. 그때 절에서 먹던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절을 좋아하고 절에 가면 숙연해진다. 광주에 가서 대학시험보다 먼저 있는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박해수 군과  함께 응시했다. 두 사람 다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그 당시 구례농고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 시절에 졸업할 때 서로 잊지 말자고 교환하는 사인장이 유행이었다. 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받지 않고 제일 친한 남녀학생 한 사람씩만 혈서로 받기로 작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분명 괴팍스런 일이다. 함께 해군사관학교 시험을 보러 갔던 친구와  李 YH라는 여학생에게 제의를 했다. 두 사람 다 쾌히 찬성하여 나의 자취방에서 내가 준비한 면도날로 무명지를 찔러 붉은 피로 ‘영원한 우정’이라고 썼다. 내 손가락에는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지만 그 사인장을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변치말자 맹서한 벗들! 4회 졸업장을 손에 쥐고 언제 어떻게 만날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이렇게 ‘내 학창 시절’이란 배움의 길 앞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그러나 배움의 길에 빨간 신호등은 없었다.                                                   [2007.3.13.화]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
어제:
46
전체:
215,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