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사연

2016.08.31 00:59

Chuck 조회 수:1565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 시집『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1998) 

이 시는 1995년 제10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천양희 시인의 역작이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란 지점에서 
시인의 쓰라린 개인사적 비밀이 읽혀진다. 

시인은 우리나이 올해 일흔 셋으로 40년 전 4살짜리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인 정현종 시인과 갈라섰다. 
헤어진 아들과는 17년 만에 대학생이 된 아들과 겨우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보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환멸과 절망은 
실로 대단한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정현종 시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란 모름지기 그들만이 아는 일. 아니 그들조차도 모를 수 있는 일. 오랜 기간 혼자 살며 뒤통수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많이 들었겠고 남에게 그 진실의 내막을 틀어놓기는 더욱 쉽지 않았으리라. 
이혼 후 한동안 시도 쓰지 않고 모교인 이대 앞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며 혼자만의 생계를 유지하다 죽을 결심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부안의 내소사 근처 직소폭포를 찾은 후 그 ‘백색의 정토’ 앞에서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지를 곧추세워 한때는 하루에 한편씩 시를 쓸 정도로 맹렬하게 시에 매달렸다. 
생이 몹시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무엇엔가 죽도록 시달리던 마음을 간신히 추슬렀을 때 하루치의희망이라도 쓰자는 생각에서 매일 시를 쓴다고 한다.
시인은 1990년 어느 겨울, 외출하려고 옷을 입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을 뿐인데 옷 모양 전체가 망가져 버린 그 순간 마치 인생 전부가 흐트러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첫 단추의 실패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단추의 난감함이 이 시를 쓰게 했던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또 잘못을 저지르기란 얼마나 쉬운가. 중요한 것은 잘 못 채워진 첫 단추에 갇혀 스스로 송두리째 생을 말아먹느냐 세상과의 불화를 극복하고 빠져나올 수 있느냐이다.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아보며 관조하는 태도는 나에게도 숙연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잘 못 끼워진 단추 때문에 실의와 절망, 스스로 겪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오래도록 고통스런 세월이 있었다. 
이 시는 아주 사소한 단추 구멍 끼우는 일에서 삶의 비의와 시작의 중요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세상은 지퍼처럼 한꺼번에 채워지진 않는다. 
‘잘못 채운 첫단추’가 고장 난 지퍼처럼 망가진 건 아니다. ( 대구일보 제공 )

"https://www.youtube.com/embed/NG1_E3HQV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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