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地空)

2007.12.06 02:54

김동찬 조회 수:1042 추천:77

선생님 뵈면 눈물납니다.

성도 이름도 쌀도 풀도 나무도
모조리 빼앗겨버린 땅에서 태어나셨죠.

이념의 깃발을 들고 미쳐 날뛰는
전쟁터에서 부모님을 잃고
울면서 울면서 유년기를 보내셨다구요.

보릿고개 위에서
혁명에 휩쓸려가는 학문을
그저 내려다보던
지학(志學)

껍질만 남은 꿈을 추스르며
배고픔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세운
이립(而立)

소주와 뽕짝을 섞어 마시고
블혹(不惑)의 거리를 흔들흔들
흔들리지 않고 걸어 오셨습니다

선생님의 피와 땀. 칼슘, 위장, 폐
때로는 양심까지도 바쳐야만 했던 날들이
종이에 손을 벤 것처럼 아립니다.

하지만 처자식 해외여행 다니는 걸 보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 말도
목숨을 이어주신 하늘의 뜻도
이제는 알아들을 것 같다던
지천명(知天命)

길 아닌 길을 굽이굽이 넘으며
절벽에서 형이 동생을 밀어뜨리던 것도 보았고
왼 뺨을 맞으며 오른 뺨을 내밀었던 적도 많았다구요.
그러다보니
웬만한 일에는 화내지 않고
적당히 에누리해서 알아듣는 이순(耳順)을 얻으셨습니다.

드디어, 만 65 세
땅 위에서 빈 마음을 가진 자,
지공(地空)에 이르셨습니다.

지하철 공짜로 타셔도 되겠습니다.

-- <문학나무>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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