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참칼 겨루기

2009.04.06 06:22

백남규 조회 수:629 추천:46


                   글쓰기의 참칼 겨룸과 나의 나됨 찾기
                                         정현기(문학평론가, 우리말로 학문하기 회장)

   1. 글쓰기로 참됨을 찾는 이들

   글을 쓴다는 것은 뭔가를 찾는 일도 된다. 살면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들 모두를 써서 남에게 나도 그런 것들을  보았으며 들었고 또 그래서 뭔가를 좀은 알고 있노라, 는 글로 나를 남기려고 한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나를 남기려는 어떤 뜻에 이어져 나온 일일 터이다. 그 글쓰기란 철학적인 종류이거나 역사 틀 글 본새 그리고 문학적 글쓰기로 나를 증거해 보일 좋은 길 찾기일 터이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 있음 꼴은 어떻게 풀이해야 ‘나임 본새’와 ‘나됨’으로 나아가는 태깔을 내보일 수 있는가? 이런 글쓰기 일의 문제들은 이어서 나를 괴롭힌다. 많은 사람들이 글로 자기들 나를 남겼고, 그들이 스스로의 나됨을 찾아내는 동안 겪은 외로움이나 아픔 따위들이 나를 질리게 한다.  
   내 머릿속에는 여러 잡다한 생각들이 거미줄처럼, 아니, 여름날 썩어빠진 나무등걸 속에 핀 곰팡이 그물처럼, 뽀얗게 피어있다. 나를 질리게 만든 참칼 겨룸꾼들은(진검승부眞劍勝負라는 말이 그럴듯하지만 너무 일본냄새가 나서 바꾼다.)서양인이냐 동양인이냐를 가리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좀 옛적 사람이냐 지금 사람이냐를 가리지도 않은 채 머릿속 기억 실줄 속에는, 아침 거미줄에 이슬 맺히듯 조롱조롱 매달려 반짝인다. 그게 내 삶이다. 첫 번 째 떠오르는 사람, 프란츠 카프카. 그는 법학박사에다가 노동자들을 위한 변호사, 그리고는 끝끝내 당대 자기 삶을 둘러 친 세계를 싫어하였고, 그 당대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어 꿈꾼 사람. 체코 거주 유대인, 반유대주의자들이 쳐놓은 포위그물 관념, 모든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부딪침, 일체 타협을 모르는 고집투사였다. 푸줏간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할아버지 때부터 그는 자기 삶의 끔찍한 외로움과 아픔, 호젓함에서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자기 있음의 속 땅 굴을 파면서 빛나는 햇볕이나 깜깜한 어둠조차도 내팽개쳐 버리고 끔찍 나의 나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였던 사람이었고 글 쓰는 일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글들과 그가 쓴 나기 속 얼굴에 들이대던 참칼의 날카로운 번뜩임이 때때로 내 눈을 찌른다. 지금도 나는 그가 쓰던 참칼인 말글에 대해 생각한다. 내 머릿속은 그의 세상 읽기의 칼질로 반짝이는 생각이 꽈리를 튼 채 꼿꼿한 태깔로 앉아 있다. 왜 그럴까? 그가 진짜 예술가라고 믿고 싶어서일까? 이이야말로 글쓰기의 진짜 참칼 겨룸꾼이었다고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어둠을 꿰뚫어 읽을 줄 알았고 그가 읽었던 세상이 아주 더러운 꼬임들로 뒤틀려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됨을 찾는 길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지를 글로 썼던 것이다. 누군가 거대한 규모의 서점에 가서 두리번거리다가 매번 절망하곤 하는 이유가 다 그런 글쓰기의 참칼 번뜩임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 것인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다 진짜 참칼로 자기 생애와 겨루지는 않는다. 외로울까봐 두려워서 그런 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사람은 데카르트. 나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 자꾸 더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알고 싶은 것만 알면 되니까! 내가 아는 건 단지 그의 초기 저서 󰡔방법 서설󰡕이다. 그 시기에 갈리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당시 권력집단이었던 교황청의 엄포그물, 법령 따위에 반하는 학설ㄹ을 내세웠다고 해서 유죄판결을 맏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바른 과학적 앎의 틀을 내세운 훌륭한 과학자였다. 당대 지식독점 세력은 교황청이었고 그들이 믿어 그 믿음으로 사람들을 찍어 누르던 ‘천동설’에 반하는 지동설을 내세우는 글쓰기로 나섰다가, 당대 권력자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었고, 궐석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침 교황이 그의 옛 친구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되, 건강을 이유로 투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당대 지식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짐작되는 사건이었다. 우리도 한 때 독재자 박 정권 당시 멀쩡하던 친구가 남몰래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슬그머니 돌아와서는 길을 가다가도 주저앉아 아파하던 모습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폭력의 사슬이 얼마나 지식인들을 기죽이는 지를 잘 안다. 부라퀴들이 한 집단을 움켜쥐었을 때 그들이 내지르는 무작스럽고 냉혹한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떨게 하는지 모른다. 누구나 지닌 이런 두려움! 겁! 예술가나 문인, 학자들에게 이 두려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조건이다. 억누름이나 버림받게 만듦은 권력자들이 늘 써 먹는 낡은 무기이고 지식인 누구나 대체로 이 무기 앞에 눈을 사팔뜨기로 뜨기 쉽다.
   이런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한 생각하는 사람(철학자)이 나타나 글을 썼다. 그가 쓴 글은 내가 읽기에 프랑스 말이라는 참 칼질이었다. 당대에 글 쓰던 모든 이들이, 유럽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쓰던 그 때에, 데카르트 그는 프랑스말로, 나를 감동시킨 책, 󰡔방법 서설󰡕을 썼다. 프랑스 말글이 있었음에도 당대 권력이 퍼뜨려놓았던 공용어 라틴어로 글쓰기에 버릇 들었던 유럽 지식사회에서, 그는 철학하기의 진짜 참됨 찾기를 자기 말글쓰기로 저질러 놓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깊이 생각하는 철학 글쓰기라는 참칼 겨루기를 하여 공용어 라틴 말은 말할 것도 없고, 있음의 덫인 폭력 구름을 통쾌하게 이겼다. 그랬기에 이렇게 3백 오십 여 년 전 그의 글쓰기가 오늘날 멀리 떨어진 내게까지, 그가 진짜 글쓰기 참 칼잡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가 만약 라틴 말로 그런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그의 ‘나는 생각하니까 여기 있다.’는 투의 말을 쓸 수 있었을까? 대나무 칼이나 나무 칼로 글을 쓰는 이들보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진짜 참칼을 들고 나섰던 것으로 내겐 보인다. 대나무 칼이나 나무 칼로 글을 썼더라면 그가 ‘나와 내 앞에 펼쳐져 보이는 세계라는 텍스트 외의 모든 텍스트를 버리겠다.’는 투의 과감한 나됨 찾기 길로는 들어서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로 떠오르는 사람은 죠나단 스위프트이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라는 유명한 책으로 세계인의 머리 속에 남겨진 사람이다. 그의 짧은 글 「책들의 전쟁」 이야기는 재미있게도 도서관 책들 주인공들이 나와서 말 쌈 붙는 이야기이다. 18세기 이전의 책들 속에 든 주인공들과 18세기 이후의 주인공들이 도서관에서 말로 싸움 붙는 이야기였다. 글쓰기라는 말의 꿀을 진짜 삶 판 속에서 따다가 벌집을 만들어 꿀을 저장하는 글쓰기 꾼 글쟁이들은 꿀벌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부터 글쓰는 패들은 칼질은 거미들의 칼질이라는 투였다. 거미줄을 쳐놓고 남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다가 걸려들면 달려들어 물어 나르는 흉내쟁이(패러디)패들! 꿀벌과 거미! 자기 앞의 삶을 꿰뚫어 읽으면서 그 삶 판 속에서 꿀을 따다가 자기 집을 쌓아 짓는 벌꿀에 비해 남의 것을 베끼거나 흉내 내어 글로 쓰는 것은 참칼질은 아니라고 나는 읽는다. 대나무 칼질이거나 나무 칼질로 글쓰기!  
   다음은 한국 지식사회 마당의 몇 가지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첫째가 세종임금! 그는 유능한 독재 정치가였고 왕권을 누린 사람이었다. 그는 고리 적에 무신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권력을 정중부에게 빼앗겨 실권을 놓친 이의방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그는 그들 할아버지들을 모두 사해에 내린 용들로 비유 정권탈취의 정당성을 󰡔용비어천가󰡕라는 웅장한 과장법 글쓰기로 완성하여, 500년 왕권의 기틀을 마련해 놓은 사람이었다. 그의 정치가로 또 왕으로 한 엄청난 일들은 간단한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글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가지고 직접 시를 썼다. 그의 글쓰기가 빛나는 점은 그가 직접 만들어 퍼뜨린「훈민정음」으로 첫 시 󰡔월인천강지곡󰡕을 썼다는 것이었다. 왕이면서 왕 지위를 버리고 집을 떠나는 사람 샤키아모니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그가 만들어 퍼뜨리려고 한 「훈민정음」으로 하였다. 그는 자기의 나됨을 왕으로서만 보는 것에서 꽤 벗어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틀림없이 그는 글쓰기의 참칼 겨룸꾼이었고, 그 겨룸에서 빛나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한자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그것이 대나무 칼임을 깨우쳐  참칼로서의 「훈민정음」을 만들어 시를 지어 삶의 진짜 본새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그와는 정 반대로 다음에 떠오르는 이들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생각하는 사람들이(철학자)들이다. 그의 저술에 대해서, 또 엄청난 그의 철학적 생각 틀에 대해 나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또 마음도 크게 쓰이지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의 글쓰기가 ‘참칼 겨룸꾼’으로는 뭔가 뒤가 칙칙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아니 이런 생각 또한 자기 스스로 자기의 같은 뿌리 윗대의 사람들이 그 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삶 판을 못보고 내리 깎는 못된 버릇의 탓으로도 읽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버릇으로 다른 나라 것들만 높여 읽고 이 나라 앎의 울타리를 낮추어 보는(사대모화事大慕華)못된 버릇에 젖어 있다는 나무람도 있어 막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마음의 너비나 생각의 깊이가 그처럼 깨끗하였고 정신 쓰기가 밝았던 그들 또한 글쓰고 가르쳤던 칼들이 모두 대나무 칼이었거나 나무 칼, 또는 연습용 칼이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당대에 자기의 나됨을 만들어 가는 ‘나됨 찾기’를 깃동 한자로 된 생각의 본새만이 배워 앎의 틀이라는 굳은 믿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조금도 찾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좀 부끄럽다.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 수는 있다. 만일 그분들이 우리말글로 자기위 나됨을 찾아 썼더라면 동아시아 전역의 두툼한 앎 패들로부터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이 아니냐 하는 말 말이다.  
   글쓰기 참칼 겨룸에 대한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좀 더 깊이 갈아봐야 할 터이다. 적어도 요즘 내게 고려대학교의 이승환 교수로 대표되는 우리들 사는 일 깊이 생각하기(동양철학 東洋哲學)에 마음 쓰는 분들에게 퇴계나 이이 선생들께서는 큰 빚을 지고 떠난 것이다. 가령 그들의, 그 때 해왔던 글쓰기 칼부림 칼을, 뒤집어 보이면 어떨까? 그것은 바로 이렇다. 만일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선생들이, 비록 중국 철학이었다 할지라도, 주자나 양명학의 이론적 말 틀을, 우리글이었던 훈민정음 말법에 맞게, 빌어다가 갈고 닦아 만드는 힘겨운 씨름을 마다하지  않았더라면, 그 끝, 열매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분명 세종 임금께서 만들어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그들 철학자들이나 앎꾼(지식계급)들은 여전히 한자로만 글을 써왔고, 그것을 나라 백성들 모두(?)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였을까? 앎이란 본시 어려워야 하고 그것은 뜻이 겹쳐들어 있는 한자로만 세상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참 앎꾼은 그가 사는 때에 펼쳐져 있는 앎패들의 울타리로부터 샛길 찾기에 힘을 쓰지 않으면 참 된 글쓰기 겨룸 꾼으로 읽히기는 어렵다. 만일 그들께서 그렇게 한글 글쓰기로 그들의 밝고 맑은 배움의 속 알들을 갈고 닦아 남겨주었더라면, 틀림없이 그 엄청난 빛이 우리의 큰 앎 판세에 빛나는 귀중한  보물들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사는 생각법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무게로 우리를 떨게 할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무척 아쉬운,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모자랄, 믿음의 한 갈래일 터이다.
   기독교 믿음 틀이 오늘날 이렇게 이 나라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 이스라엘 왕이라 불리던 예수를 우리들의 왕이 되도록 믿게 한 힘 샘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믿음 틀인 예수의 말씀들을, 알림 꾼들이 우리말글로 옮겨, 퍼뜨리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기독교 믿음 틀을 들여오던 알림 꿈들은 우리 말글로 이 생각법들을 옮겨놓는 힘겨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 한글 참칼이 알리고 가르치며 배우는 글쓰기와 퍼뜨리는 부림으로 되면서 바로 오늘날 기독교 믿는 사람들의 넘치는 광주리 속의 열매가 된 것이다.
   참된 생각의 칼 겨룸(철학)이란 남 얘기 배움(의견학)과는 다른 것이다. 남의 뜻을 자기 것인 듯 빌어다가 자기 말글본새에서 꽤나 벌어져 있던, 한자말글로 생각을 펼쳤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우리들 삶의 문제를 따져 보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따짐 결과이다. 이것은 나의 뒤틀린 내 생각일까? 어떻든 조선조 중간 참에서 생각을 일한 그들은 참칼 쓰기(진검승부)를 두려워한 글쓰기 겨룸꾼들이었다는 것이 나의 아쉽고도 분한 생각이다. 그나마 중국학자들의 학설인 의견학을 들여다가 열심히 배워 익히고 그것으로 자기 느낌이나 생각인 것처럼 적바림하는 글쓰기에 나섰던 사람들은 역시 돈푼깨나 지녔던 양반 피붙이들 아니면 어려웠을 터이다. 이 퇴계선생이나 이 율곡 선생이 얼마나 물건을 아끼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기 비움을 몸소 지켰었는지를 내가 모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배워 왔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참칼 겨룸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들이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양반계급에다 가진 이들이 지닌 겁과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자기가 지닌 그것을 잃을까 늘 조바심치는 마음 때문에 그들께서 참칼 겨루기에는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바꾸어 말해도 이 문제는 같은 길로 나아간다. 유교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5-6경 읽기와 그것을 알아 지키기 따위는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일수록 그 높이에서 더욱 마음과 몸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우리말로 그런 자기의 나됨을 가르치고 적바림하였어야 한다는 것이 내 뜻이다. 그랬다면 얼마나 기막힌 말글 부자로 우리가 누릴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이제 그것이 우리들 일로 남겨졌고, 바로 나의 나됨 만들기로 떠 밀려온 셈이라는 데 있다.    
   세 번 째로 떠오르는 사람은 18세기 문학인, 󰡔열하일기󰡕라는 글로 이름을 세운 박지원이다. 그는 엄청난 내공의 힘으로 당대 권력에 맞서 자신의 뜻을 글쓰기로 펼쳤던 300여년 전 우리 지성사에 빛나는 지성인 가운데 우뚝한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론이나 청빈론, 울음설, 운명에 도전하는 한 방식으로 세상 버리기, 세상읽기에 관한 한 그는 도도하고도 당당한 눈뜨기를 지녔던 사람이었다. 그는 일세를 넘나드는 울림과 당대 삶 판을 꿰뚫어 읽는 눈총기가 뛰어났던 분임에 틀림이 없다. 아아 그런데! 그 또한 자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아쉬운 나무 칼 겨룸꾼이었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찌른다. 그가 참칼로 글쓰기나 가르침 겨룸에 나섰더라면 그는 마땅히 우리말글이었던, 훈민정음으로 글을 썼어야 옳았다. 왜 그런가? 그는 그가 살던 정조 왕때 묵묵히 살아가던 삶 패들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찬양하였던 귀한 사람들은 모두 똥 퍼 나르는 사람, 저잣거리의 떠도는 거지들, 정조 왕과 거기 붙어살던  권력패들이 승인하기를 꺼렸던 지사들, 은둔자들, 혼외(?)정사로 나온 아들 딸들, 권력 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었던 조각 지식인들 모두를 그는 추키야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백탑파 문인들로 알려진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정철조 등의 친구들 사이에, 서얼이라 불리며 버림받았던 양반 첩 자식들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고, 그들의 재주를 높이 쳐주곤 하였었다. 그가 쓴 여행 글쓰기인 「열하일기」속에 든 밝은 배움 길과 역사 사실, 문학 길 찾기의 보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고도 짱짱하였는지를 지금 읽어도 쉽게 알 수가 있다. 저절로, 그의 옮겨진 글을 보고도, 우리들 고개는 숙여진다. 하지만 만일 그가 그렇게 참뜻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을 높여주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하였다면 뭔가, 그가 그런 믿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려고 하였다면, 마땅히 우리말글이었던 한글로 글을 썼어야 옳았다. 그렇게 그는 더 험한 길로 나섰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한글을 몰랐다고 한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써오던 그 글자를 그가 몰랐다고? 도무지 그 속을 헤아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쉽고 아쉬운 일이다. 그는 참칼 겨루어 쓰기를 두려워하였거나 진짜 겨룸꾼의 겨룸을 피했던 글쓰기의 대나무 칼 겨룸꾼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앞에서 든 사람들 가운데 세종임금을 빼고 다른 지식인들은,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이 동아시아 삶 판의 너비로 눈길 뜨기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궤변자들의 주장과도 맥을 잇는, 어떤 이들과 통할 수 있다. 오늘날 태평양 연안을 아우르는 세력 판도 속의 한국인 삶 판 눈 넓히기 이야기와도 통하는 궤변!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일부 앎 패들 끼리 나누어 끼리끼리 중얼거리는 이익 나누기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2. 오늘날 글쓰기의 참칼 겨룸꾼 이야기

   철학이나 역사학 또는 문학 글 쓰기에 나선 사람들이 오늘날 쓰는 말글은 거의 다 우리말글이다. 게다가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이제 한글로 글쓰기는, 조선 정조 때처럼 한문으로 된 경전 읽고 쓰기를 지키도록 하는 명령과 거기 반하는 글쓰기를 못하게 하던 문체반정 정책 투의 그런 억압으로부터는, 아주 많이 자유스러워졌다. 하지만 2007년도에 입학하는 대학원생들이 써야 할 글은 영어로 의무화한다고 공문을 내 보낸 내 옛 직장이었던 연세대학교 대학원생들이 어떻게 그 일을 잘 치루어 나가게 될지 나는 그 끝을 모르겠다. 1939년도에 한국에는 우리말을 쓰거나 가르치지도 못하도록 일본 육군성이었나 해군성이었나 하는 곳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칙령을 조선총독부가 발표하여 우리 말글을 쓰는 사람은 아예 하층민으로 만들어 버리는 동화정책을 썼었다. 그 다음 해에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갈아치우는 강공책으로 한국인들의 기를 죽였던 일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제는 영어제국주의가 이 나라에 들어와 누군지도 모르게 영어몰입 교육 어쩌구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도대체 누구 짓인가? 분명 이것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정치패들이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그 정치패들 옆에서 부추기고 그런 뜻을 세워주는 대학교 앎 판의 교수 출신이거나 누군가 수상한 낌새가 분명 어딘가에 있다.   그런 어둡고 칙칙한 낌새를 거느린 사람들의 무슨 꿍꿍이속이 이 나라에는 엉큼한 속셈을 가지고 서서히 안개 퍼지듯 번져나가고 있다. 미국대사관이나 미 국무성, 또는 펜타곤 어느 부처에서 은밀하게 한국의 한국말 쓰기 날개를 부러뜨리려는 영어 교육을 깊이 하라는 지령이 내려졌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글쓰고 말하기의 참칼을 빼앗는 짓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빤하다.
   나는 요즘 읽고 쓰는 일의 두려움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커다란 차일을 친 문학판 그늘 속에서조차 도시의 쇠 냄새는 진동한다. 그것의 근원지는 서양식 생각법에 기댄 대나무 칼잡이들의 섣부른 말 쓰기라는 생각이다. 내 속에 든 이런 말 버릇이나 글 버릇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또 정말 우리가 사는 이 때를 어떻게 읽고 뭔가 그 속에 사는 나의 나됨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늘 두렵다. 요즘 시골 땅에 발 붙여 농사와 글쓰기로 삶을 꾸리며, 뭔가 글쓰기 참칼 겨루기를 걸고 있는, 김상렬의 창작집 󰡔그리운 쪽빛󰡕을 읽었다. 먹을거리 풀들을 기르는 일은 사람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 긴장을 끌어 모은다. 배추와 무, 파나 고추를 기르며 그것을 가꾸는 이들이 지켜보는 온기와 습기, 배추나 무 잎에 달려드는 다른 꿈틀이, 날치들, 이를테면 민달팽이라든지, 배추흰나비 애벌레라든지, 콩새, 비둘기는 그냥 울음소리나 듣던 때와는 아예 딴 짓이나 하는 겨룸꾼들로, 모진 찬바람과 함께 농꾼들을 애먹인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든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밀이나 보리, 벼를 쓰러뜨린다든지 눈이 너무 일찍 내려 과일 열매 익는 일을 훼방 놓는다든지 하는 것들이나, 가믐에 메마른 땅이나 너무 질척거리는 흙,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을 긴장케 하는 맞섬 패들이다. 시골에 둥지를 튼 작가 그는 그의 호두 거둠을 망치는 청설모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주인공의 마음상태를 곱게 묘사해 놓고 있다. 나는 전화로 그에게 물었다. 그 청설모를 먹기도 하느냐고? 먹지는 않는다는 담담한 대답! 번쩍이는 이 문명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림에 길든 탓에 지구가 이상한 기온과 증상들을 우리 머리위에 내리 누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화석연료를 마음 놓고 쓰고 있는 동안, 지구는 몸살을 앓고 앓다가, 우리가 감당해 마주쳐야 할 두려운 일들을 벌이고 있다. 촘촘하게 다가서는 속절없음, 두려운 기후의 징후들! 작가란 누구인가?    
   뭔가 우리들 삶 판에, 어떤 욕심 사나운 패거리들이 쳐놓은 커다란 함정그물에 대항하는, 그래서 그런 대항의 몸짓이 사람을 떨게 하고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얼어붙은 도덕의 바닥을=필자) 깨는 도끼,’ 로 글쓰기의 진검승부를 벌였던 카프카(박홍규의『카프카, 권력과 싸우다』에서 박홍규가 옮겨놓은 바겐바하의「카프카」에서)식 말 타령을 그는 진작 터득한 작가였다. 우선 이런 시대에 시골로 훌쩍 떠나간 그의 발걸음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는 자기를 덮어씌우고 있는 고약한 눈길에 대해서 꿈틀거린다. 나로 살아 있음 꼴에 대한 고식적 눈들이 너무 아니꼽다. 그래서 그는 농촌으로 내려갔지만 그곳 생활이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삶의 아름다운 본을 찾아 참칼 글쓰기에 힘을 쏟는다. 이번에 그는 자기 아비에게 죽음을 당한 서도세자의 마지막 삶 날 일곱 날을 살펴 나선 장편소설 󰡔목숨󰡕을 썼다. 그가 쓰는 참칼 문학에 대해 이 글에서는 줄이기로 한다. 글쓰기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그는 묻는다.    
   좋은 문학적 글쓰기란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읽을거리 만들기인가? 행복이란 정말 어떤 것인가?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행복에 대한 대답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너무 뚜렷하게 내려져 있다는 데 있다. 아니 예전부터 동과 서를 통틀어 이 정답이 없었던 적은 없다. 적당한 재물을 지녔고 병들지 않고, 잘 먹고 마시며,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걸 우리는 행복이라 불러 틀림이 없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왜 사람이 아픔을 일부러 사서 아파해야 할 것인가? 아픔은 우리가 피해야 할 삶의 걸림돌이다. 아픔이란 어디로부터 오는가? 노가리 살을 바르다가 가시에 찔려 겪는 쓰라림의 수억 배 쯤 되는 몸의 아픔이면 정말 아픔 것일까? 이런 몸통이 겪어야 할 아픔이란 마음이 겪어야 하는 쓰림이나 아림을 내대 보이는 어떤 것일 터이다. 이렇게 마음에까지 닿는 아픔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픔은 반 행복인가?
   외로움이나 슬픔은 또 무엇인가? 막막한 어둠으로 앞이 안 보일 때 겪는 기죽음은? 글쓰기의 참칼 겨룸은 바로 이런 막막한 앞길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나는 고집스럽게 믿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해, 김원일이 마음을 짜 글쓰기로 참칼 겨룸으로 낸 작품집 󰡔푸른 혼󰡕을 읽었다. ‘푸른’ 혼이라는 제목 자체가 한국 산야에 뒤덮여 사람들을 을씨년스럽게 옥죄었고, 힘겨운 목 졸림에 눌려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핍박하는, 붉은 빛에 맞서는 빛깔이다. 붉은 빛은 한 때 우리에게 사람들 목을 죄는 밧줄이었다. 이 밧줄에 걸리기만 하면 그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벌벌 떨면서 숨죽여 살아야 하였다. 자아 나를 찾아 나섰던 인물들은 때로 몹쓸 권력에 걸리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곤 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정적들을 찍어 누를 때, 여덟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유신헌법 올가미에 걸려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법이 아니고 폭력 그 자체였다. 중진 작가 김원일은 1970년대에 우리를 덮어씌우고 있던, 정치 부라퀴들이 저질러 세상을 뽀얗게 어둡히던, 폭력들을 찾아, 있음의 낱낱이 지니고 있던 영혼과 정신을 되밝혀 그의 그 됨을 찾아주던, 그런 글쓰기의 참된 참칼 겨룸을 읽으면서 몹시 떨었다. 이런 글쓰기를 나는 글의 용틀임이라고 부른다. ‘민청학련’, ‘인혁당사건’이라는 역사의 한 살이 흐름 복판에 놓여 있었고 거기서 죄 없이 죽어간 여덟 명(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의  죄 없음과 그들을 죽인 이들의 부라퀴와 죄악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야말로 김원일이야말로 참칼잡이 글 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정 찬이 오래 전에 써 발표한 「두 생애」가 묻는 물음 가운데 나는 우리 시대에 또 한 참칼 겨룸 꾼의 글쓰기를 본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필생을 두고 견딘 아픔 내용과 우리 시대 한국에서 벌어졌던 한 아이와 그의 트럭행상꾼 아버지, 동생이 겪어야 했던 아픔 이야기였는데 그는 생생한 꿀과 벌집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위의 슬픔이나 아픔 속에서 따다가 짓는다. 김원일과 마찬가지로 정찬 그도 참칼 겨룸 꾼으로 나는 읽는다. 아침 행상 길 트럭을 뒤로 빼다가 어린 딸을 치어 죽였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놀라자빠졌던 어린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퍼지는 가족 모두의 견뎌내기 어려운 아픔 내용은 독자 모두에게 칼날처럼 다가선다. 이들 한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아픔과 슬픔, 외로움을 그는 한 켠 벽에 세워두고 또 다른 아픔의 벽을 우리 앞에 세운다. 그는 번쩍이는 교황 옷차림을 한, 예수 후계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다. 중세기 때부터 이제까지 폴란드 출신이라고는 처음으로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 그가 신의 이름으로, 예수를 대신하여 겪었던 아픔 은 예수를 아는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겪음이었다. 늙은 나이에 불편한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세계 각국을 돌면서 퍼뜨리던 사랑의 빛 또한 엄청난 고행의 길이었다.
   그런 종교지도자의 고행 앞에 세워놓은 한 가난한 가족의 아픔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누구는 하느님의 뜻으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고 어떤 누구는 그런 커다란 신의 뜻도 없이 아파야 하는 것인지 작가는 겁 없이 대놓고 묻는다. 하느님은 누구에겐 아버지나 어머니로 나타나 따뜻하게 잘 보살피고 이름없는 한 생명의 아픔에는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말아도 되는 것이, 우리들 사람 사이에 가려 뽑히고 가려 뽑히지 않은 이들의 있음 꼴인가? 그는 정말 우리를 만들어 준 그 분인가? 하느님의 권세에 대한 이런 물음은, 아직도 이 세상에 엄청난 폭력의 그림자로 둥둥 떠서 무서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부라퀴들의 손길을 돌아보게 하는 작가적 맞장 뜨기임에 틀림없다. 신의 이름으로 아픔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렁찬 소리들에 대해서 그는 정면에서 맞장 뜨는 글쓰기로 참칼을 휘둘렀다고 나는 읽는다.
   1980년 5월 18일 한국, 전남 광주에서,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그따위 더러운 총질로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부라퀴들은 침묵한다. 무서운 부라퀴들에 대한 심문은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결코 멈추지 않을 이야기 샘이다. 폭력과 악의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멈추어 서서 기웃거리고, 그렇게 일어났던 폭력의 냄새를 사람들은 결코 잊지 못한다. 정찬 그가 쓴 「완전한 영혼」과 「슬픔의 노래」, 이 작품은 장편소설 󰡔광야󰡕의 또 다른 이야기 꼭지들이다. 전남 광주에서 벌이던 살육전에서 죽이는 이들 편인 진압군 명목의 군인 쪽에 서서 겪는 아픔과 거기 맞섰다가 겪게 된 이의 아픔과 슬픔의 문제를 이들 작품에서 집요하게 따라가 묻고 답한다. 그 죽임과 죽음의 속살이 어떤 것인지, 600만 명을 죽이고 죽었던 아이슈비츠 이야기와 맞물게 하여 작가는 또 다른 아픔과 슬픔의 강물을 찾아 나섰다. 이 아픔과 슬픔을 견뎌 넘기는 길에 대한 절묘한 말 다루기에서 우리는 그의 글쓰기 칼이 그냥 대나무나 나무칼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는 전에 보여주었던 󰡔빌라도위 예수󰡕를 통해서 이미 여호와 하느님이라는 이름의 권력과 정치 부라퀴들이 내는 폭발음에 대한 참칼 겨룸을 겁내지 않았던 훌륭한 참칼 겨룸 꾼이었다. 아픔이 있었고 있는 곳에 그의 마음은 늘 가 있다. 그야말로 글쓰기 참칼 겨루기 꾼다운 작가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우리 이 시대, 우리 모두 겪었고 또 겪을지도 모를 조악한 살풍경들은 앞으로도 더욱 큰 덩치로 불어나 뒤뚱거리며 다른 꼴로 우리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 태안 바닷가가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여 수많은 주민들이 절망하여 죽음을 생각하면서 갈팡질팡하는 데 이어 어이없이도 숭례문이 속절없이 불타버렸다. 백만여 사람들이 기름 묻은 돌과 모래를 닦아 내었으나 그 바닷가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기름을 바다에 퍼뜨린 주인은 막상 묵묵히 입 다물고 조용하다. 어이없는 일들이 우리 앞 뒤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영어로 말하고 글쓰는 일을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이뤄내야 할 삶의 빛이라도 되는 듯이 떠들고 나대는 사람들이 권좌의 뜰에 줄을 이어 서 있다. 저들이 언제 어떤 어둠을 몰고 올 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두렵고 두려울 뿐이다.
   나는 재작년 봄부터 여기 광주 시골에 와 살면서 배추와 무, 상치, 파, 쑥갓, 생강 따위 온갖 종류의 식품들을 키우면서 유유하게 떠도는 구름을 보았고, 그 하늘 위에 꽝꽝 꽝꽝 울리며 평택 미국기지를 향해 날아다니는 미국산 헬리콥터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의 어느 작가 시인이 참칼 겨룸으로 자기 글쓰기의 초롱대는 눈을 내리깔고 자기 마음의 칼날을 벼리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고 있다. 아니 정말로는 나의 나됨을 찾는 숨결 고르기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울림과 때론 몇 권 책이나 몇 편 조각글들을 읽으면서, 거기 누군가 어떤 위안을 주려하고 있는지, 우리 시대가 짊어진 외로움과 슬픔, 아픔을 제대로 읽어 참칼 겨루기로 글쓰기를 저지르는지, 내 삶의 안과 바깥을 곰곰 읽고 되새기며 깊이 생각한다. 진정한 삶 판의 행복 찾기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나는 이 삶 판의 한 복판에 누워있으되 삶 판 그 바깥에도 마음을 누여 떠돌게 한다.
                                      끝 2008년 2월 21일(74장)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 어느 독자의 시 읽기 [1] 백남규 2020.09.20 17
9 하계 여행지 Chuck 2016.07.23 13
8 L O L Chuck 2016.07.23 9
7 Out Look Chuck 2016.07.22 9
6 서울 역사 기행 Chuck 2016.07.22 7
5 백남규 2010.06.07 219
4 당신때문입니다 썬파워 2010.04.13 230
3 그대와 나 썬파워 2009.09.04 267
2 장대비 썬파워 2009.07.25 255
» 글쓰기의 참칼 겨루기 백남규 2009.04.06 629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17,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