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간이나 장소에 관한 수필 - 엄마의 채마밭

 

    어머니가 사시는 노인 아파트에는 자그마한 채마밭이 있다. 칸칸이 나누어진 채마밭은 주인의 개성에 따라 꾸밈새가 다르고 심은 채소 종류도 조금씩 다르다. 어머니는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쑥갓, 오이, 호박 등을 주로 심으셨다. 그렇게 넓은 땅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드시고도 딸 셋 가족과 친구 할머니들에게 나누어주실 정도로 수확량은 넉넉했다.

    원래 꽃 가꾸기가 취미인 어머니는 틈만 있으면 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밭에서 돌아오실 때면 어머니는 이야기 거리도 풍성하여 수다스럽다할 정도로 보고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땅 한 귀퉁이를 떼 내어 무료한 할머니들을 위해 채마밭을 만들어준 마음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주가 바뀌고 아파트는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노인 아파트가 시나 정부 소유가 아니고 개인 소유인 것을 처음 알았다. 새 건물주는 한국 사람으로 부동산 업자라고 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했고 많은 돈을 들여 멋있게 수리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차장 부족으로 이제는 채마밭을 가꿀 수 없다는 거다. 사실, 설날이나 추석, 어머니날 등 일 년 중 이 세 날만 빼면 주차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차는 몇 대 되지 않고, 바쁜 자식들이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들은 웅성웅성했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가꾸어오던 채마밭이었다. 어디, 먹기 위해서 가꾸어 오던 밭이던가. 그야말로 소일거리로 가꾸었고, 가꾸다보니 내 새끼 같이 애착이 갔을 뿐이다. 자식이 찾아오지 않으면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말 할 벗이 없으면 말동무로 마음을 주고받던 채마밭이었다. 그러나 법이 그렇다 하니 따를 수밖에.

    새 주인은 수도에 연결된 호스도 빼버렸다. 아직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채소들은 시들시들 말라서 죽어갔다. 손길을 놓아버린 채마밭은 어느새 잡초로 뒤덮여 흉물스런 공터로 변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며 먼 길로 돌아다니셨다. 주인은 금방이라도 주차장을 만들 듯하더니, 몇 달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은 물 값 아끼려고 밭을 없앴나 보다며 수근거렸다.

    여름과 가을이 다녀가고 겨울마저 다녀가더니 어느새 봄기운이 대지를 적셨다. 춘풍이 불자, 채마밭이 어머니의 마음을 스물 스물 동하게 했다. 에둘러 다녔던 길을 가지 않고 오랜만에 채마밭 쪽으로 갔던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잡초로 흉물스럽게 변한 어머니의 채마밭 한 귀퉁이에 여린 떡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호박잎이었다. 물도 주지 않은 그 메마른 땅에서 모진 겨울까지 이겨내고 고개를 내민 호박잎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호박잎에 물을 주기 시작하셨다. 허리 디스크로 수술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세지만, 산 생명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호스를 빼버려 빈 우유 통에 물을 받아 적셔주었다. 그것도 물 나오는 수도꼭지는 멀리 있어 절뚝거리며 그 길을 몇 번이나 오고 가야만 했다. 한번 갔다 와서 쉬고, 또 한 번 갔다 와서 쉬면서도 물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시샘인지 뭔지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 말라는 것 한다고. 주인이 알면 큰일 난다고. 잔디를 깎던 멕시칸 정원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밭을 밀어버린다고 엄포를 주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오케이!” 하면서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정말 신이 나서 호박을 가꾸셨다. 주말마다 방문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영상을 펼치듯 호박의 성장 과정과 이웃들의 시샘어린 한마디를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 끝에는 항상 이런 말을 덧붙이시곤 했다.

    “희선아, 도산 안창호 선생 말마따나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끼데이.” 도산 안창호 선생 이름만 틀렸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신 어머니가 훌륭한 말씀은 골라가면서 잘도 하셨다. 스피노자를 모르면 어떤가. 나는 어머니의 긍정적 삶의 자세가 좋았다. 리액션 좋은 나의 맞장구에 어머니도 좋아라 박장대소하셨다.

    호박은 무럭무럭 자라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머니와 나는 호박쌈도 먹고 호박나물, 호박전도 해먹으며 한 여름을 잘 보냈다. 한마디씩 거들던 사람들도 애호박 하나씩을 건네받고는 빈정대던 말들을 싹 거두었다.

    가을로 접어들자, 호박잎은 누렇게 시들어가고 마지막 열매도 다 땄다. 어머니는 마지막 호박을 어루만지며 이리 굴러보고 저리 굴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느 때 같으면, 호박전을 붙여 어서 먹어 보라고 권할 어머니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함께 먹먹했다. 여린 호박 떡잎의 삶이 마치 당신 것인 양 여기던 어머니.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호박은 봄부터 가을까지 그토록 큰 기쁨을 주고 자기소임을 다 한 듯 마지막 목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비록 누렇게 시들어 죽은 호박넝쿨이지만 당신 손으로 차마 거두지 못하시겠다며 그대로 두셨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그러셨단다. 호박 수확이 끝난 어머니의 채마밭도 서서히 잡초로 덮혀 갔다. 어머니는 다시 그 채마밭을 돌아 먼 길로 다니기 시작하셨다.

    호박 가꾸던 낙이 없어지자, 어머니의 얼굴은 생기가 없어지고 신나게 보고할 거리도 없어졌다. 나 역시, 계절 따라 영상처럼 펼쳐주었던 호박 이야기가 끝나니 못내 아쉬웠다. 나는 어머니께 호박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부추겼다. 글이라도 남기면 어머니의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줄 것 같아서였다.

    여든 셋의 할머니, 그것도 일제시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어머니가 선뜻 글 쓸 마음을 내기는 어려울 터. 나는 또 문법 타령과 맞춤법 타령을 할 줄 알면서도 딸 앞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냐며 계속 졸랐다.

    하루는 조용해서 방안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가 상을 갖다 놓고 무언가 열심히 쓰고 계셨다. 마침내! 어머니는 고마운 나의 호박나무라는 제목으로 난생 처음 를 쓰셨다. ‘나의 그리움을 흘려버릴 수 없어 글로 표현해 본다라는 부제까지 붙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봄에 예쁘게 자란 호박나무/ 여름에는 열매를 매저준 호박/ 예쁜 호박을 친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먹게 한 고마운 호박/ 가을에는 더문더문 매저준 호박/ 그러나 줄기마는 싱싱한 호박나무/ 지금은 초겨울인데도/ 아침 저녁 즐겁게 바라본 귀여운 호박/ 세월은 거슬리 수 없는 듯 군대군대/ 시들어 가는 호박잎/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 아마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할 거야 -

 

    글 끝에는 11-9-2011 향년 팔십 셋 지수연이라고 적혀있었다. 아직도 멀쩡하신데 향년이라니. '향년'이란 말이 잠깐 마음을 어둡게 했으나, 솔직 담백한 내용은 그 어느 명작보다 나를 감동시켰다. 군데군데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어머니가 육필로 쓴 마음의 글이 아닌가.

    특히,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라는 표현에서는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라 침을 삼켜야 했다. 어머니가 유독 채마밭 가꾸기를 즐기시고, 잡초더미에서 발견한 호박잎에 그토록 연연했던 것은 기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 당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호박을 동일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호박이 떠나고 잡초더미 수북한 빈들에 스산한 겨울바람이 지나갔다. 하지만, 주차장 공사는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봄이 되자, 어머니는 땅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본격적으로 채마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오이, 호박 등 남은 씨앗을 골고루 뿌리셨다.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며 1갤런 짜리 빈 우유 통에 물을 담아 부지런히 날랐다. 좀 피곤해도 자라나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보기 좋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올 3, 어머니는 유난히 피곤하고 배가 더부룩하니 아프다며 호소하셨다. 매달 가는 주치의도 자꾸만 소화제만 준다며 불만을 토로하셨다. 불만을 모르던 어머니가 짜증까지 내시는 걸로 봐서 좀 심각한 것 같아 전문의에게 내시경 검사를 받게 했다.

    간까지 전이된 위암 말기였다. 수술은 불가하다고 했다. 주치의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께 소화  제 처방만 해준 주치의가 잠시 섭섭했지만 어머니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 죽을 때는 '이름 하나 받아가는 거'라고. 이제 암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1차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날에도 밭에 물을 주러 가셨다. 쑥갓을 못 심었다며 쑥갓 씨를 사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 찬바람을 쐰 탓일까. 결국, 이틀 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폐렴이라고 했다. 십 여 년 간 정들었던 채마밭과도 그 날로 영이별이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밭에 물 줄 걱정만 하고 계셨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밭에 물을 주러 갔다. 1갤런 우유 통 두 개를 들고도 내 성한 걸음으로 열 번을 왕래해야 하는 거리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즐기시는 일이라는 생각만 하고 방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었지, 같이 밭에 내려가 볼 생각은 못했다.

    성치 못한 다리를 끌며 3층에서 1층까지 오르내렸던 어머니.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날이면 걸어서라도 내려가셨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결국,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당신이 시 말미에 쓰신 대로 향년 팔십 셋'이었다. 시를 쓰신 지 꼭 6개월만이었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차마 당신 손으로 버리지 못한 호박 넝쿨처럼 어머니도 우정 수목장을 원하셨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밭에 지금은 내가 물을 주러 간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은 가야하는 거리인데도 시간만 나면 꼭 물을 주고 온다. 내가 못 갈 때에는 어머니와 가장 친했던 친구 할머니가 주신다. 심은 사람은 가고, 따 먹는 사람은 다 다른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도산 안창호 선생말씀을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도 잘 따르고 가셨다. 어머니의 채마밭에서는 각종 채소들이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저희들을 그토록 사랑해 준 주인이 떠난 줄도 모르고, 마치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듯이.

    이번 채소 농사가 끝나면 나도 어머니의 채마밭을 찾아갈 일이 없겠지. 심을 사람도, 키울 채소도 없는 빈 채마밭이 불쌍하다. 내년에는 그 밭에 누가 씨를 뿌려 주려나. 그토록 채마밭을 사랑하던 어머니는 이제 대지의 딸로 되돌아가고 없으니-

 

    <작품 후기>

 

2012<미주 문학> 가을 호에 게재되었던 <엄마의 채마밭>은 내게 각별한 작품이다. 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던 지상에서의 마지막 교감이요 에피소드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고 퇴고하는 가운데,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생명 존중과 삶의 철학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손수 심으신 채소 수확이 끝난 뒤로 난 어머니가 사셨던 이승의 마지막 집인 스완 노인 아파트를 가 본 적이 없다. 잡초로 뒤덮인 채마밭을 어머니가 에돌아 갔듯이, 나 또한 잡초로 뒤덮여 있을 어머니의 채마밭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어느 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육필로 꾹꾹 써 보여준 유작 시는 지금도 내게 가장 소중한 유품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가고 없어도 봄이 오면 잡초 비집고 민들레는 기어이 피어날 것이고 그 위로 한가로이 흰 나비는 날고 있으리라. 삶은 모질어도 생명은 이토록 존귀하다. 이 땅에 살며 주고받았던 살뜰한 정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머잖은 날, 나 또한 대지의 딸로 되돌아가면 어머니랑 다시 한 번 채마밭 이야기로 꽃 피우고 싶다. 그때는 리액션도 더 잘 해 주며,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박장대소하게 하리라.

 

2) 특별한 물건에 관한 수필 - <구리 풍경>

 

    요즈음 나의 하루는, 처마 끝에 달린 구리 풍경과 함께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다. 유타주에 있는 구리산에 들렀다가 여행 기념으로 사 온 풍경인데 단돈 사십 불에 산 놈 치고는 제 값 이상이다.

   방안을 기웃대며 사랑의 교신을 보내오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산사나이가 산을 향해 달려가듯, 뱃사나이가 푸른 해원을 향해 돛을 올리듯 내 마음은 구리 풍경으로 부풀어 오른다.

    우선, 모양새가 시중에 나도는 알루미늄 풍경같이 얄팍하지 않고, 구리의 중후한 멋을 지니고 있어 마음에 든다. 게다가, 그 청아한 목소리라니. 추처럼 가운데 드리워진 삼각형 나무 원판을 중심으로 길고 가는 여섯 개의 몸체가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실로 천상의 음색이다.

    속을 비웠기 때문일까. 사운대는 잎의 속삭임 같이 크진 않으나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 때로는 댓잎의 노래로, 더러는 갈잎의 속삭임으로 촉촉이 가슴을 적셔온다. 귓가에 날아와 여울지며 흐르는 풍경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름답다 못해 애닯기까지 하다.

    새벽에 듣는 소리가 다르고, 한 밤중에 듣는 소리가 다르다. 전자가 전깃줄에 팔분음표를 찍고 있는 명랑한 아침 참새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길 떠나는 철새를 연상 시킨다. 계절 속에 흐르는 풍경소리도 제 각각이다. 가을엔 바이올린 현의 떨림 같이 애상에 젖게 하고, 겨울엔 칼바람을 맞고 선 겨울나무처럼 묵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다가 바람 자는 날에는 여섯 개의 몸체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침묵에 빠져 사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 날의 풍경은 나보다 먼저 침묵의 무게와 값을 익혀버린 듯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살며시 띄워 보낸 눈웃음 하나가 얼마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지, 높은 웃음소리보다 눈가에 어룽어룽 맺히던 눈물이 또 얼마나 가슴을 파고 드는지 풍경은 잘 알고 있다.

    조용히 침묵하고 선 풍경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어깨에 잠시 내려앉았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던 첫눈의 잔상을 떠올리곤 한다. ‘멀리 있는 사람, 멀리 두고 그리워하자하고 단단히 다짐하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풍경. 만날 수 없음에도 그리움이 깊어갈 때면 나도 그런 모진 결심을 할 때가 있다. 즐거운 나날 사이사이 슬픔이 비칠 때, 차라리 체념의 미덕을 익히는 거다.

    나와 아침 저녁으로 교감하고 있는 풍경을 보면, 때로 창조주가 된 기분이다. 창조주가 흙에 숨을 불어 넣어 한 생명을 만들었듯이, 무생물에도 사랑을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생명이 된다. 처마 끝에 걸려 끊임없이 사랑의 교신을 보내오는 구리 풍경은 더 이상 차가운 금속이 아니다. 푸른 혈맥 속에 더운 피가 흐르는 생명체다.

    장닭이 긴 울음 우는 한갖진 오후엔 , 풍경도 거들어 소식 알 길 없는 옛님 생각으로 상념에 잠기게 한다. 설레임 안고 만났다가 아쉬움 안고 돌아서던 나날들. 그 때는 무슨 설움 그리 많아 울 일도 많았던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오히려 실컷 울라며 기다려 주었다. 기다려준다는 것. 그 때는 그것이 그가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미국 떠나오기 전 날. 서른 즈음의 우린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한 사람은 머뭇거리다 행운의 일곱 번 째 택시를 타고 떠나 와야 했고, 또 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지극히 유아적인 나를 큰 사람으로 성숙시켜 주었음에도 그는 해 준 게 하나도 없다며 마음 아파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러야 이루어지는 사랑을 애써 외면하며 지역적 거리감을 위해 공간 이동을 결심했을 때,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갈등과 위기의 절정이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리던 그 날. 그 날 따라 창밖엔 왜 그리도 바람이 자지러지게 불던지. 내 마음 속에 댕그랑거리며 금속성 울음을 울던 그 풍경이, 여기까지 따라와 조석으로 날 불러낼 줄이야.

    할 수만 있다면, 한번쯤은 다시 만나 유아적인 내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받기만 했던 큰 사랑에 대해 감사해야 마음의 빚을 덜 것같다. 바람 따라 조석으로 울리는 저 풍경도 마음의 무게로 남아 있는 내 사랑의 미션을 일깨워 줌이라 믿고 싶다.

    이른 새벽엔 아련한 봄비로 찾아와 날 깨워주고 깊은 밤엔 불 꺼진 창 밖에서 홀로 밤을 지켜주는 나의 구리 풍경. 내가 배반하지 않는 한, 결코 먼저 배반할 리 없는 든든한 님이다. 영원을 다짐하지 않아도 영원으로 이어질 그런 사랑을 나의 풍경은 지니고 있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는다지만, 다시 한 번 영원한 사랑에 대해 로망을 가져보는 거다. 멈추는 날 올지라도, 아름다운 사랑의 꿈 잃지 말라고 일러주는 저 풍경의 잠언. 가슴에 깊이 담아야 할까 보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바람 자면 바람 자는 대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사는 모습이 큰 선생을 얻은 듯 귀하다. 때로는 큰 스님 법문으로 다가와 옷깃을 여미게 하고, 더러는 자연의 설법으로 일렁이는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기도 하는 구리 풍경. 금처럼 찬란하진 못해도, 은처럼 빛나진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푸르를 구리 풍경을 보며 나는 이런 서툰 노래를 바치기도 했다.

 

네 마음 수초처럼 바람에 흔들릴 때

내 마음 사랑 병에 이 밤을 앓고 있다

삶이란 요람 속 아기처럼 흔들리며 커는 것

 

    지금도 눈 감으면 구리 광산의 그 거대한 모습이 떨림으로 다가온다. 한 인간의 도전 정신이 빚어놓은 그 웅장한 역사.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성은 무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화산 분화구 같이 뻥 뚫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산 무더기.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몸을 틀고 앉은 듯, 지하 수 천 피터를 뱅글뱅글 돌아 파내려간 길. 그 뱀띠 길로 개미처럼 기어 오르며 광석을 실어내던 수 백 대의 트럭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로마의 원형 극장 같던 분화구에 서면 우린 한 점 점으로도 찍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의 감격이 구리 풍경을 보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 어두운 광맥 깊숙이 묻혀 천 년을 넘게 기다리다가, 어느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세상 구경을 하게 된 구리 풍경. 그 기다림도 모자랐는지 다시 바람에 흔들리며 긴 날과 밤을 지새운 뒤에야, 이 작은 동양 여행객의 손에 닿았으니 그 끈적한 인연의 고리만 생각해도 예사 인연이 아니다. 유독 인연설에 목 매는 나. 그래서 더욱 구리 풍경에 정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은 날도 그와 더불어 끊임없는 사랑의 교신을 나누며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싶다. 청아한 목소리로 내 삶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구리 풍경이 그러했듯이 긴 기다림의 자세로 마음 비우는 작업부터 해야 할까 보다. 욕심 같아서는, 구리 풍경같이 수더분한 친구도 한 두 엇 두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동으로 푸르를 그런 우정을 키우고 싶다.

    댕그랑 댕댕. 풍경이 울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삶도 바람이 불어야 노래가 된다. 처마 끝 구리 풍경이 서로 살 부비며 내는 노랫소리에 내밀한 음성 들려오는 듯하다.

 

<작품 후기>

 

작품 <구리 풍경>1999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이다. 구리 풍경은 유타 주 엘로우 스톤 여행을 하던 중 구리산에 들려 사온 여행 기념품이다. ‘구리가 주는 어감은 금이나 은이 주는 어감과 또 다른 친근미가 있다. 금이나 은처럼 각광 받는 스타들보다는 늘 아웃사이더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딱 맞는 물건이다. 옐로우 스톤 여행의 백미라 할 만치 구리 풍경의 원산지인 구리산은 거대함으로 나를 압도했다.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광석들이 트럭에 실려 꼬불꼬불 뱀띠 길을 따라 올라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원석이 제련되어 우리 집 처마 끝에 풍경으로 달려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게다가, 그 청아한 노랫소리는 귓가에 여울지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니 수필 한 편 절로 나온다. 뿐인가. 그의 침묵까지도 내 사유의 벗이 된다. 눈 뜨면 가장 먼저 들려오는 풍경 소리. 나는 <풍경 소리고>란 제목으로 13편의 단시조를 써서 1999<현대 시조>에 등단하기도 했다. 단돈 $40에 사 온 구리 풍경은 신춘문예 수필 당선과 시조 등단의 기쁨을 동시에 선사한 고마운 친구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다면, 보쌈이라도 해 와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 창 밖에 '풍경' 하나 걸어 보세요. 여러분 마음에도 아름다운 풍경 소리 울릴 겁니다.

 

3) 동물에 관한 수필 - 산책하는 기러기

 

    기러기 떼를 보았다. 나르는 기러기가 아니라, 공원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하고 있는 기러기였다.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만 보던 내가 소요학파처럼 공원에서 유유히 거닐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는 건 처음이다.

    뚝방에서 새벽 달리기 연습을 하고 돌아오던 공원 초입. 오리 뗀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던 내게 옆 친구가 기러기라고 했다. 너무 신기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먹이를 찾아 잔디밭을 쪼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녀석도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녀석들을 보며, 기러기는 홀로 나르는 고립의 새가 아니라, 역시 함께 나르는 군집의 아름다운 새라는 생각을 했다.

    보다 쾌적한 환경을 찾아 떼 지어 나를 때도 그 나름의 규칙을 정해 V자 대오를 지어 나른다고 한다. 장장 40000 킬로미터를 날아가야 하는 장거리 여행. ‘빨리 갈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갈려면 함께 가라는 교훈을 몸소 보이며 수없이 나래짓 친다.

앞   서 가는 기러기는 리더로서 온 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으며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또한, 뒤따라오는 동료 기러기들은 끊임없이 끼럭대며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준다. 이로 인해, 뒤 따라 오는 기러기들은 71%로의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한다. 서로 돕고 상생하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더 기러기가 지치면 자리바꿈을 하며 잠시 편안하게 나를 수 있도록 숨쉬기 시간을 준다. 이런 따뜻한 마음 씀은 현명함을 넘어 감동을 준다. 동료 중에 무슨 변고라도 생겨 대오에서 이탈하게 되면 꼭 두 마리가 함께 남아 돌보아 준단다. 절대 홀로 버려두지 않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다 숨을 거두면 그때 다시 빠른 날갯짓으로 자기들 무리로 찾아간다고 한다.

    한참을 서서 지켜 보다 보니, 나도 우리 팀 대오를 이탈한 기러기가 되었다. 우리 팀을 찾아 빛의 속도로달려갔다. 숲 속 그늘 저 멀리 우리 해피 러너스 팀이 보였다. 붉고 노란 유니폼을 입고 모여 있는 우리 팀 대원들이 마치 기러기 떼처럼 보였다.

    온몸으로 거센 바람 홀로 맞고 가는 리더 기러기, 윤장균 회장님의 뒷모습이 제일 크게 보인다. 몸풀기 운동을 가르쳐 줄 때면 팍팍 각이 서는 모습도 보기 좋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온유한 표정도 정스럽다.

    난 똑똑하고 칼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보다 언제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를 선호한다. 9인조 배구 경기에 비유한다면, 스파이크를 때리는 스타 공격수보다는 좋은 위치로 공을 보급해 주는 센터 역할이 리더의 소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나 나나 우리 모두 티가 있는 진짜 옥이란 점에서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거다. 그러노라면, 자연히 불만도 줄게 되고 어지간한 건 수용하게 된다. 무언가 마무리 말을 하고 있는 윤회장의 뒷모습과 다소곳이 경청하고 있는 우리 회원들의 모습이 자못 다사로왔다.

그래, 바로 이 모습이야! 우리가 독불장군으로 홀로 날지 않고 팀을 이루어 함께 날아갈 때, 우리는 더 멀리 쉽게 날아갈 수 있는 기러기 팀이 되는 거야!’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며, 회장님과 봉사 위원을 위시한 모든 임원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우리는 이 분들의 수고로 71% 의 에너지를 아끼며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바로 눈앞에서 기러기 떼를 보고 온 때문일까. 늘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오늘 따라 그 마음이 더욱 진하다.

나도 끊임없이 끼룩대며 응원을 보내주는 후방의 한 마리 기러기가 되리라 다짐해 본다. 다음 주에 있을 크리스탈 레이크 캠핑장 야유회가 무척 기대 된다. 그때 쯤이면, 산책하던 기러기도 떼 지어 날아가고 없으려나.

 

<작품 후기>

 

수필 <산책하는 기러기>는 미 발표작으로 얼마 전에 쓴 작품이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포토 에세이 식으로 쓴 글이다. 나르는 기러기 떼는 보았어도 산책하는 기러기는 처음 보았다. 일요 새벽 달리기 연습을 하고 모임 장소로 되돌아오던 세리토스 공원에서의 일이다. 바로 눈앞에서 공원을 유유히 산책하고 있는 기러기를 보니 정말 신기했다. 처음에는 오린가 싶었는데 모양이 조금 달랐다. 그때 누군가가 기러기라고 귀띔 해 주었다. 요즘 유행이 낯설게 하기라더니, 산책하는 기러기야말로 낯설게 하기를 몸소 보여 준다. 기러기는 우리들의 정서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지혜로운 공동생활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현명한 리더와 순종하며 따르는 기러기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무리에서 처지는 동료를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돌봐준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것으로 퍽 감동적이다. 기러기는 사람들과 꽤나 친화적 동물인지, 가까이 가서 봐도 날아가거나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미소 지으며 보고 왔다. 저 멀리 숲속 그늘 아래 또 한 무리의 인간 기러기 떼가 보였다. 우리 해피 러너스 클럽 멤버들이었다. “멀리 갈려면 함께 가라와 딱 어울리는 마라톤 클럽이다.

 

4) 직업이나 생업 체험에 관한 수필 - 아름다운 선물

 

세상의 모든 선물은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뭘까.

아마도 애틋한 마음을 담은 사랑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탐스런 머릿결을 지닌 금발 아가씨 안젤리카가 오랜만에 가게에 들렀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천사 아가씨다.

언제나 생글생글 눈웃음 짓는 안젤리카를 볼 때마다 덩달아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데 그토록 머릿결이 곱고 숱이 많아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긴 생머리를 싹뚝 자른 모습이다.

얼마 전에 대학 졸업을 하더니, 뭔가 마음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짧게 자른 모습도 생경하거니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그 이유가 더 궁금했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그 긴 금발 머리, 아까워서 어찌 잘랐을까?”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아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도네이션 했어요!”

? 도네이션?”

예상외의 대답에 난 깜짝 놀랐다.

그 정도 결이 곱고 풍성한 머리카락이라면 돈으로 쳐도 고가의 최상품이다.

! 벌써 네 번 째 도네이션하는 거에요?”

, 그래? 어디에 도네이션 했는데?”

“Pantene이라고 비영리 단체에요.”

몇몇 비영리 단체 이름은 알지만 Pantene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거긴 뭐 하는 곳인데 머리칼 도네이션을 받아?”

, . 머리카락 도네이션 받아 가발 만들어서 필요한 암환자에게 나누어 주는 단체에요. 주로 어린이 암환자에게 준대요!”

호오, 그래? 안젤리카가 착한 건 알지만 그 정도인지는 정말 몰랐네? 퍽 자랑스럽구나!”

나는 안젤리카를 힘차게 안아 주었다.

안젤리카가 머리카락 도네이션을 처음 한 것은 열 살 때부터라고 한다.

소프트 볼 선수였던 안젤리카는 매번 풍성한 머리카락 덕분에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엄마를 닮아 머리숱도 많고 빨리 자라, 처치 곤란이었다.

엄마는 간편한 머리카락 관리와 필요한 사람에게 도네이션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안젤리카를 설득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땀은 범벅이 되는데 머리카락까지 무거워 귀찮던 안젤리카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단서가 딱 하나 붙었다.

도네이션 하려면, 절대로 하이라이트나 염색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예민한 암환자에게는 모든 게 자연산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는 덧붙여 설명해 주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때만 해도 멋모르던 안젤리카는 두 말 없이 승락했다.

머리카락은 3년마다 잘라 도네이션했다.

열 살, 그리고 중학교 졸업 후와 고등학교 졸업 후.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잘랐으니, 4년 만에 잘랐다 한다.

길이는 약 17인치 정도로 보통 사람은 한 번들(묶음 단위) 정도 나오는데 안젤리카 머리카락은 늘 두 번들이 나왔다.

어린이 가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4번들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한 사람의 암환자를 위해 보통 사람 열 네 명이 3년이나 4년 머리카락을 곱게 길러 도네이션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열 네 명은, 3,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하이라이트나 염색, 헤어 커트 등 일체의 여성적 패션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선물인가.

여성의 멋은 헤어스타일에서 거의 50% 이상이 나온다.

샤핑몰 치고 미용실 하나 없는 곳은 없다.

오죽하면, 머리카락이 빠진 암환자들을 위한 패션 용품 비지니스가 성황을 이루고 있겠는가.

각종 패션 가발은 물론, 모자와 스카프에 이르기까지.

내 머리를 잘라 도네이션 한다는 것은 희생을 딛고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의 꽃, 진정어린 마음의 선물이다.

언젠가, 남가주 미스 하이틴에 선발된 여고생이 가게에 왔는데 길게 기른 검은 생머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결 고운 머리카락이 조그만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온갖 법석을 뜨는 십대들을 많이 보아 온 터라, 하이라이트 하나 없는 그녀의 생머리가 천연 기념물을 보는 듯 신기했다.

어쩌면, 이렇게 머리를 예쁘게 잘 길렀느냐고 물었더니, 항암 치료로 머리칼이 다 빠진 할머니 가발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기른다고 했다.

어릴 때 사랑으로 키워준 할머니께 보답하려고 자기 여동생도 같이 기르고 있단다.

이제는 자기들이 받은 사랑을 되돌려 줄 때라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잊었다.

나도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

내가 선물을 받는 듯 가슴이 먹먹해 왔다.

담쟁이 넝쿨처럼 뻗어 나가는 러브 체인.

사랑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잎을 피워 나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거야말로 신명나는 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닌가.

팍팍한 사막 같은 삶에도 어딘가 샘은 숨어 있고 푸른 풀 자라는 오아시스가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있어, 우리도 사막을 가로 지르는 대상처럼 먼 길 마다 않고 떠날 수 있는 거 아닐까.

오늘, 안젤리카를 통해 다시 한 번 살 만한 세상을 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머리를 곱게 길러 도네이션 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아이들.

그 마음 그대로 곱게 자라길 진심으로 빈다.

 

<작품 후기>

 

작품 <아름다운 선물>은 미 발표작으로 갓 대학을 졸업한 안젤리카가 전해주고 간 미담을 주제로 쓴 글이다. 우리 가게는 샵 인 샵 형태로 이루어진 토탈 비유티 살롱이다. 비유티 제품 판매와 함께 머리부터 발끝까지 총체적인 아름다움을 가꾸어 주는 살롱이다. 일 하는 사람들도 많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풀어 놓고 가는 삶의 이야기만 건져도 모두 수필 감이다. 그야말로 황금어장이다. 1984, <올림픽 에세이> 섹션을 맡아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가 어느 날 비유티 필드로 직업을 바꾸어 버린 것도 내 글쓰기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이민 온 지 일 이년 정도 되자, 코리아 타운에서만 맴돌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왕 미국에 왔으니, 미 주류 사람들을 만나 영어도 배우고 삶의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은 탁월했다. 손님이 오면 일하고, 가고 나면 책을 읽거나 글쓰기 딱 좋았다. 베벌리 힐스 쪽에서 일하면서 리즈 테일러를 비롯하여 많은 월드 스타들을 만났다.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도 내 수필감으로 재탄생 되리라. , 남다른 호기심과 친화력으로 손님들과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오늘 쓴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안젤리카와 예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곱게 자라길 충심으로 빈다.

 

5) 이민 생활 체험 수필 - 눈물은 성수입니다

 

    오늘은 싱글 엄마 성경 모임인 임마누엘소구역 모임이 있는 날이다. 사별한 사람, 이혼한 사람, 외국인과 결혼해 또 하나의 고독에 절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눔의 시간을 갖는 모임이다. 저마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정도 각별해 늘 모임이 기다려진다.

    405 프리웨이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찬 겨울비가 시야를 뿌옇게 흐려 놓는다. 이런 날의 과속은 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15마일로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느려지니, 마음도 느긋해진다.

    라디오를 틀었다.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라디오 코리아에서 김종찬의 당신은 울고 있네요가 흘러나온다. 노래의 가사도 가사지만, 축축한 그의 목소리가 왠지 우수에 젖게 한다. 비 오는 날의 노래는 흑인 영가나 샹송이 제격이다.

    하지만, 김종찬의 목소리도 이런 날의 노래론 손색이 없다. 산그리메가 마을을 덮고 저녁 연기가 실실이 피어오르다 자취를 감춰버리는 그런 목소리. 김종찬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고향집의 아랫목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는 듯 아늑해진다. 가만가만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 당신도 울고 있네요......”

    가사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아는 여인의 한 많은 삶이 떠올라서인가. 나직이 따라 부르는 내 시야에 나도 모르게 뿌연 물안개가 인다. 그 물안개를 헤집고 한 여인이 걸어 나온다.

    ‘피코의 마마.’ 남편의 배신에 한이 맺혔으면서도,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총 고백성사를 하고 함께 영성체를 하고 싶다는 그녀. 가슴에 눈물을 담고 살아온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물먹은 선인장을 연상하곤 했다.

    그녀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를 피코의 마마라고 불렀다. 그녀는 늘 빈민자의 거리인 피코 길에 실비 식당을 차리고 싶어 했다. 그녀 집 근처 피코 길은 쓰레기도, 홈 리스 피플도 한 통속이 되어 뒹구는 거리였다. 거기에 실비집을 차려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고 싶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먹여주고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해 아이들을 앞세우고 마암!” 하고 들어선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거란다. 음식 잘 하고 배포 유한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녀의 꿈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뜨거운 오븐 앞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 있는 그녀 모습을 보면 누군들 그녀의 꿈을 믿지 않으랴

     그러나 이 꿈은 4.29 폭동이 앗아가 버렸다. 벌몬트와 2가 쇼핑몰에 차린 식당은 몫이 좋아 장사도 잘 됐었는데, 흑인들에 의한 폭동으로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 곳 가게를 정리하고 피코 길에 새 가게를 차리려고 에스크로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즈음의 일이었다.

    “출출하지예? 오다가다 한번 들려 주이소, ?” 하던 그녀의 구수한 광고 목소리도 그날 이후 뚝 끊겼다. 끊긴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의기도 꺾여버렸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그 날 저녁, 우리는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 허허 웃으며 맏언니 역할을 해 왔던 우리 모임의 수장한테 그토록 큰 아픔이 있을 줄이야. 수녀가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었다는 것도 그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비극적 소설이었다. 수녀복도 마다하고 맺어진 사랑이었기에 남편과의 만남은 그만큼 뜨겁고 애틋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했던 사랑은 채 십 년을 넘기지 못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올망졸망한 아이를 키우며 이민 초기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가실 즈음, 뜻밖에도 남편이 어느 젊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사람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친척 벌 여자라 충격이 컸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혼만은 막으려고 했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천주교 신자여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정만은 꼭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을 빼앗겨 버린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며 폭력의 강도를 높여 갔다. 기도를 바치고 시를 읊던 고상한 그의 입에서 망언과 욕설이 앞다투어 나왔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어린 딸이 울면서 막아섰다. ", 아빠 욕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래도 우리 엄마에요! 때리지 마세요!" 딸아이가 야무지게 말했다. 하지만, 사랑에 눈 먼 아빠란 사람은 울면서 가로막는 딸도 아랑곳없이 덥석 들어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쓰라린 배신감과 어린 두 자식뿐이었다. 찔레꽃이 갸웃거리던 어느 초여름의 일이었다. 아픈 세월 속에서도 꽃은 피고 꽃은 졌다.

    회억하는 그녀의 희미한 눈빛 속으로 세월의 강물이 출렁였다. 시간은 정말 돌아오지 않는 강물일까.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마릴린 몬로가 아득한 눈빛을 띠고 기타를 치면서 “No return, No return......”하고 반복해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라디오에선 더욱 애절한 목소리로 내 마음에 물을 뿌린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 그 누가 알았던가요......”

    그녀가 남편을 다시 만난 건,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였다. 어린 날 내동댕이쳐졌던 딸이 동생 고교 졸업식에 아버지를 초대한 것이다. 떠날 때는 채 걷지도 못하던 아들이었기에 그는 무대에 서 있는 아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딸이 울먹이며 아빠에게 일러주었다.

아빠! 우리 진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 저어기 왼쪽에서 두 번 째 서 있는 녀석이 바로 아빠 아들이야.” 그때사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알아보고,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피코의 마마도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아비가 제 아들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게 서럽고, 새까맣던 그의 귀밑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앉은 것도 서러웠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은 더더욱 섧었다. 졸업식이 끝나자, 그는 다시 뒷모습만 남긴 채 자기의 둥지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딸은 엄마의 손을 잡고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엄마! 아빠 이제 용서해줘. 엄마는 우리를 가졌지만, 아빠는 아무도 없잖아......” 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빠로부터 내동댕이쳐졌던 그 딸은 아빠를 용서해줄 정도로 훌쩍 커 있었다. 시간은 잔인했지만, 또 한편 너그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남편에게 배반을 당하고 싱글 엄마가 되어 살아온 그 잔인했던 날들이 얼마나 길고 깊었던가를. 차창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라디오에서는 애틋한 가사가 흘러나와 나의 상상을 끝없이 부추긴다.

    "찻잔에 어리는 추억을 보며 / 당신도 울고 있네요......”

    가사를 음미하며, 먼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를 그들의 재회를 한번 상상해 본다. 나의 작가적 상상은 소설을 쓰며 날개를 단다.

 

........ 어느 날, 길을 가다 두 사람이 마주친다. 너무나 뜻밖이라 말문마저 막힌다. 덥석 두 손 더우잡고 불리워야 할 이름들이 목젖 아래로 깔아 앉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찻집을 향한다. 남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욱하고 슬픔을 치밀어 올린다.

바보 같은 양반.’ 그녀의 눈시울이 더워 온다. 붉은 벽돌로 장식된 찻집의 벽난로는 따스하다. 장작불이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진항 커피향이 두 사람을 감싼다.

그러나 그들은 시선을 내리깐 채 오랫동안 말이 없다. 흐르는 침묵은 세월의 강만큼이나 넓고 깊다.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든다. , 그때 그녀의 눈에 비친 남편의 눈물! 굳게 감은 두 눈을 비집고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는 눈물, 눈물, 눈물. 그의 눈물은 소리 없는 말이 되어 그녀에게 건네어진다.

여보, 미안하오. 용서해주구려.’

이십 년, 아니면 삼십 년 뒤에야 눈물로 용서를 청하는 이 한 마디. 이 한 마디가 그토록 어려워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가. 어느 새 그녀의 두 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쏴아 쏴- 높아진 빗소리가 나의 상상을 깨운다. 핸들을 잡은 손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흐려진 나의 눈앞엔 담배 연기를 뿜으며 들려주던 그녀의 한숨 섞인 이야기가 떠돈다. 그녀는 그 날, 관절염으로 툭툭 불거진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미칠 듯한 밤이면 식칼을 들고 달려가, 새벽이 희부염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의 아파트 불빛을 보며 어둠 속에 떨었다는 그녀. 후딱 정신을 차려보면, 손에 든 칼은 어느 새 휘어져 있고 몸은 흥건히 땀에 젖어 있었다. 한기에 떨고, 배신감에 떨며 이슬에 함뿍 젖어 돌아오던 그 숱한 나날들. 이제는 바쁜 나날 속에 눈물마저 잊었단다.

    깨진 사랑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이 세상에 있을까. 소설 같은 나의 상상적 삽화가 그녀에게 현실이 될 수는 없을까. 절규하듯 높아지는 음에 내 마음은 더 먹먹해진다.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 당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 나 혼자 방황했었죠......”

    방황이라면 그녀만큼 많이 한 여인도 없으리라. 어둑한 방을 박차고 밤이면 밤마다 산타 모니카 바다로 달려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파도는 그녀의 절규를 삼켰다 뱉었다 하며 말없이 철썩였다. 검은 밤바다를 비추고 있는 은빛 달빛도 그녀에겐 한줄기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성당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영성체조차 못하는 그녀에겐 영성체 후 묵상 시간이 오히려 고문 받는 듯 괴로웠다. 모든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 그 시간.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는 통증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 그녀는 감격스럽게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못 오면 내가 가마.” 그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사방 좌우를 훑어보아도 고요히 묵상에 잠긴 교우들의 모습뿐이다.

    갑자기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무엇이 치밀고 올라 왔다. 그 순간,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여태껏 원망했던 주님인데, 주님은 역시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날 이후, 그녀의 아픔은 씻은 듯 사라지고 긴 방황도 끝났다. 하느님의 치유는 완전하셨다. 그녀는 바로 그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부활을 맛보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오로지 용서와 화해, 그리고 봉사의 삶뿐이었다. 그것만이 주님 은총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꿈은 하나뿐이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주 대전에나가 옛 남편과 함께 영성체를 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완전한 용서와 회개의 완성이라는 생각에서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어 오듯이 그녀는 오늘도 이 소망 하나 지니고 산다.

    ‘피코의 마마가 되고 싶다던 첫 번째 꿈은 4.29 폭동이 앗아 갔지만, 두 번째 꿈은 꼭 이루어졌으면 싶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간과 주님의 은총 속에 맡길 수밖에 없으리라.

나의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도 깨진 사랑의 회복이다. 우리가 지상에서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그것뿐이란 생각이 든다. 비단 부부의 사랑뿐이랴. 자식과의 관계도 그렇고,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사람들, 긴 세월 '웬수목록에 올라 도저히 용서 못 할 것 같은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더 늦기 전에 손을 내밀어 지난날을 용서 받고 화해하는 복된 시간이 왔으면 싶다. 더욱이, 여기는 고달픈 이민의 땅. 너나없이 다 외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 당신도 울고 있네요.”

    창밖엔 비가 오고 계절은 더욱 깊어 간다. 안개 속과도 같이 뿌연 405 프리웨이 빗속을 달리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눈물은 성수라고 말한 섹스피어의 말도 이제사 알 듯하다. 정녕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 오늘 우리 모임을 위해 국을 끓이고 있을 피코의 마마를 보면 와락 끌어안고 울 것만 같다.

 

<작품 후기>

 

이 글은 1998년에 최초로 쓴 뒤, 2000년 대희년 때 성 그레 고리 성당 회지 <기리에>에 발표한 작품이다. 오늘, 다시 꺼내어 읽어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랫동안 소식 끊겼던 '피코의 마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인가. 기적이 일어났다. '피코의 마마'로부터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글 속에 순전히 내 상상으로 그려 넣은 소설적 삽화가 실제로일어났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걸로 설정한 내 구성과는 달리, 전남편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35년만의 일이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그는 도저히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단다. 눈물로 용서를 청하는 그에게 피코의 마마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제 와서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마음의 짐을 훌훌 벗고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화해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마음에 맺힌 게 있다면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했으면 좋겠다. 깨진 사랑을 회복하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지 싶다. 전화를 끊기 전에, 피코의 마마는 이렇게 말했다. "요안나! 이제 나는 마음의 부자야! 억만금을 줘도 안 바꾸는 마음의 부자!” 그녀의 들뜬 음성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지펴왔다.

 

<< 자전적 작가 소개 >>

 

창밖엔 칼바람 몰아치고 시절은 육이오 사변으로 흉흉하던 하필 그 해 ,나는 1951년 음력 섣달 스무 여드렛날 겨울 토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경남 고성군 외할머니 댁이었으나 정작 고향은 경남 마산이다. 24녀 중, 언니와 오빠에 이어 서열은 세 번 째요 딸로서는 둘째 딸이었다. 자칫했으면, 네 살 때 욕지 섬으로 입양되어 욕지 아가씨가 될 뻔하였으나 끈질긴 열흘간의 울음으로 '진짜 엄마'한테로 되돌아 왔다. 이 이야기는 <뱃길 따라 온 얼굴>이란 수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사건 이후, 어머니와의 유대 관계는 남다른 애틋함이 있어 더욱 돈독해졌다. 어머니 임종을 곁에서 지켜 본 것도 6남매 중 오직 나뿐이었다. 어린 날,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본류는 부모님과 선생님이다. 거지에게도 겸상을 청하는 아버지로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정을 배웠다. 그리고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로부터는 책임감과 성실함을 배웠다. 특히, 어머니는 교육열이 철두철미하시어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는 게 학생의 도리라고 믿는 분이었다. 덕분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2년을 개근한 자랑을 갖고 있다. 내 글쓰기의 밑거름이 되어주신 분도 어머니셨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의무적으로 쓰게 된 일기를 그렇게 꼼꼼하게 봐 주시고 챙겨 주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수필가 지희선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내 신앙의 초석 역시 본인은 불교 신도임에도 교회 가도록 흔쾌히 허락해 주신 어머니 덕분이다. 선생님으로는 특별히 2학년 담임이셨던 오숙자 선생님께서 문예반을 담당하시어 내 글쓰기 기초를 잡아 주셨고, 4학년 담임이셨던 성낙주 선생님은 내성적이기만 하던 나의 성격을 180도로 바꾸어 버린 성격개조자 역할을 톡톡히 하셨다. 내 정신 텃밭은 이미 마산에서 모두 다져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후, 5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 왔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이라,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된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두고두고 마음 앓이를 했다. , , 대학을 부산에서 마치고 잠시 국어 교사 생활을 거친 뒤, 결혼 이후에는 전업 주부로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네 살 박이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고 연이어 가정 파탄의 불운까지 맞았다. 하지만, 미국 신부님을 모시고 청소년 센터에서 교육부장으로 일하며 다시 활기를 찾았다. 본인은 미국에 올 의사가 전혀 없었으나, 먼저 미국 LA로 이민을 가신 어머니의 끈질긴 요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세 살짜리 딸 아이 손 하나 잡고 태평양을 건너 온 날이 1983813. 이국적 팜트리와 따가운 남가주 여름 태양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신문 기자와 그래픽 디자이너 생활을 거쳐 미 주류 사회로 진출하고자 비유티 필드로 옮겼다. 사람을 좋아하는데다가 수필 감이 넘쳐나는 생활공간이라, 지금까지 샵 인 샵을 운영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수필가로의 입문은 1993, LA 동아 서적에 들러 명수필 한 편을 읽고는 수필에 완전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수필 공부를 하게 되었다. LA 문인이 한번쯤 거쳐 간다는 '글마루' 등록은 물론, 열권이 넘는 수필 전문 잡지를 정기 구독하며 꽤나 열심히 공부했다. 1997,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을 한 이후에도 수필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윤모촌 선생으로부터 통신 강좌를 받기도 했다. 그것도 미진하여, 2007년에 <<수필 공원>>의 후신인 <<에세이 문학>> 천료 까지 끝냈다. 요즈음도 일 년에 거의 열 권 가까운 수필 동인지에 참여하고 개인 문학 사이트까지 운영하며 수필에 대한 열정을 태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 작품집은 한 권도 발간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만나는 사람마다 왜 작품집을 내지 않느냐고 채근하지만, 출판비도 비싸고 출판의 절실함도 없어 늦어진 듯하다. 사실, 내 글을 아껴주는 마니아는 몇 명 있어도 대중성이 없는 글이라 과연 책을 낸들 몇 명이나 사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 글이 누구의 마음 텃밭으로 날아가 한 송이 민들레꽃을 피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이제, 슬슬 준비해 봐야 겠다. 내 작품에 튼실한 집을 지어 주는 거다. 은퇴 후, 주제별로 나누어 네 권의 작품집을 엮어 볼까 한다. 그러나 저러나, 봐도 봐도 고칠 게 또 있으니 어쩐담. 퇴고하다가 세월 다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실, 원고 마감일은 있어도, 완전한 작품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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