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총
2025.12.12 08:50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바람처럼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의 삶을 흔들고 만들어왔다는 의미다. 이는 사람은 스스로를 온전히 다스릴 수 없고 운명과 우연, 그리고 시대의 격랑 속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말일게다.
우연찮게도 꼭 23살에 조국 알제리를 등지고 프랑스로 향해야 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로 노래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내 집을, 조국을 떠나야 하네’로 시작하는 노래, ‘안녕, 내 나라(Adieu mon pays)'.
이 노래로 샹송가수로 사랑받게 된 앙리코 마시아스. 그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국의 독립전쟁 속에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직의 삶도 무너진 채 홀몸으로 난민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
이 후 가수로 변신한 그는 자신이 처한 경험에서 나온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에 담았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소렌자라’, ‘사랑하는 마음’, ‘지중해의 장미’가 그의 노래들이다,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겼을 때 ‘녹슨 총’을 내놨다. ‘어느 날인가 한 병사가 집이 있는 마을로 달려갔지요/ 이를 위해 어두운 수풀 속 어디엔가 녹슨 총을 버렸어요/ 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더 좋아하겠어요/ 녹슨 총보다, 더는 쓸모없는 녹슨 총보다 멋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전쟁이 남긴 상흔이자 기억으로 남은 ‘녹슨 총’. 흔히들 총이 녹슬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병사가 숲에 버린 '녹슨 총'이라고 노래한 거다.
서정주의 바람은 그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처참한 현실이었던 셈이었고, 그의 삶을 고단하게 이끌었던 그 바람은 또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밥 딜런의 노래에서 바람은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평화와 정의, 인간이 풀지 못하는 갈등,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길까지. 그러나 그 답은 허공에서 맴돈다.
하지만 서정주가 바람 속에서 성장한 시간, 마시아스가 조국을 떠나게 된 경험한 역사적 바람, 딜런이 노래한 바람 속에서 묻는 질문은 다 같은 흐름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결국 바람 속에 모든 해답이 숨어 있으며,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와 우연, 바람이 스며들어 흔들고, 만들어주며, 때로는 해답을 전해준다는 얘기다. 해서 삶과 예술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바로 그런 역사와 아픔, 선택과 우연 속에서 빚어진다고들 하는가 보다.
그렇게 볼 때 스물 세 해, 23세, 그것은 단순한 나이가 아니라 외부의 힘, 역사, 그들이 맞부딪친 우연이 만들어낸 고난한 삶의 이야기들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수풀 속에 남아 있는 녹슨 총과 바람과 함께 그 스물 세 해의 기억은 세대를 넘어 흔적을 남기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걸거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그림자가 아무리 짙다해도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들으면 우리는 그 그림자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의 노래 ‘녹슨 총’처럼. 해서 유엔은 그를 ‘평화대사’로 임명하고 ‘평화의 가수’라는 호칭도 수여했다.
마침 어제가 그의 생일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노래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 그의 노래들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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