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이라는 그분을 보내고
장남이자 외아들인, 50대 초반의 오빠가 작년 이맘때쯤 암으로 이 땅을 떠나셨다. 가까운 Holly Cross 공원묘지에 오빠를 묻고 내려오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꽃 사들고 찾아가 뵈어야지 마음으로 다짐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동네 파머스 마켓에서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꽃으로 한 묶음 샀다. 그러나 살아있기 때문에 우선이 되는 일들 앞에 마음의 다짐은 허물어져 갔다.
자주 가 뵙지도 못하면서 불쑥불쑥 오빠생각에,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등 앞에서 울 때가 있다. 뒷 차가 옆 차선으로 쏟살같이 달려나가면서 빵빵댄다. 깜짝 놀라 둘러보면 파란신호로 바뀐줄도 모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힐끔거리며 빠른 속도로 제 갈길을 가고 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개로 오빠생각에 울음을 삼키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 무렵 나의 가정에 한국으로부터 손님이 오셨다. 말기암 이라는 40대의 그 남자분이 오빠가 마지막 치료방법으로 선택했던 멕시코 암 특수치료 센타로 입원하러 오신다는 것이었다.
남편 친구의 친구라는 그환자는 남편친구와 함께 나의집에 오셨다. 그분을 뵙는 순간 돌아가신 오빠생각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보니 투병하실때의 오빠의 비참했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분은 한국에서 진단결과 암세포가 여러 기관으로 퍼져 치료하기엔 이미 늦었으며 6개월 이내로 죽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진단결과를 들은지 벌써 3개월이 흘렀으니 앞으로 남은 기간은 3개월이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으러 오신 것이었다.
이미 배에는 복수가 차기 시작했는지 깡마른 몸에 배만 불룩했다. 저녁이되어 현미밥에다가 된장국, 야채샐러드를 차려 드렸더니 제법 많이 드셨다. 한국에선 이미 음식을 못먹은지 여러날 되셨다는데 나의집에 오셔서 최근 들어 처음으로 음식을 많이 먹는 거라고 하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다시 오빠생각에 목이 매여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저녁식사 후 우린 가까이 있는 아론드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음식을 드셨으니 기운만 허락하면 걸어야 된다고 적극 권했더니 그러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호수를 낀 공원을 한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쾌한 공기 맑은 호숫가의 공원 길을 거니니 기분이 너무 좋다고 즐거워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일요일이라 우리 가정은 교회를 가는데 같이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분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교회라는 곳을 가본적이 없지만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일요일 아침 모두 준비를 해서 나가려는데 소파에 않으셔서 심호흡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처음 교회 가려니 가슴이 떨린다면서 아기 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남편은 급한 일이 있어 교회먼저 가고 난 남편친구와 그분을 내 차에 모시고 교회로 갔다. 나와 남편은 성가대에 서야 되는 관계로 안내석에 계시는 장로님께 두 분을 부탁 드리고 연습하러 들어갔다. 중간에 자리를 잘 잡으셨는지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예배당에 들어가 다시 확인을 했다. 두 분은 앞쪽 중간에 앉아계셨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그분들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생전처음 교회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신 그분이 오늘 목사님 말씀에 큰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고 난 쏟살같이 그분들께 달려갔다. 모두들 얼굴모습이 환하게 피어 올랐다. 교회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될지 망설이다가 식당에 들어가서 메뉴를 확인했다. 다행히 시금치 된장국이라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이번엔 내가 교회에 남아서 해야 될 일이 있어서 남편이 그분들을 모시고 집으로 먼저 갔다. 이렇게 남편과 서로 시간을 조정해가면서 그분들과 시간을 보냈다. 교회에서 그 동안 우리가 하던 일들을 하면서 최대한 도와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후 집에 오자마자 남편친구분은 다른 일이 있어 내일 병원 가는 길에 중간지점에서 조인하기로 하고 먼저 샌디에고로 떠나셨다. 저녁이 되었다. 남편은 내일 이환자분을 모시고 멕시코 병원을 가야 하기 때문에 사업상 해놓아야 될 일이 많아 쩔쩔매고 있었다. 어제 함께 공원 산책할 때의 편안해 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오늘도 가겠냐고 여쭸더니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셨다. 남편이 너무 바쁜 듯 보여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모시고 산책을 나가겠다고 했다. 너무 편안한 표정으로 선뜻 나를 따라 나섰다.
공원 길을 천천히 걸으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사업을 하셔서 돈도 엄청나게 벌었고 자식들도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로 어리진 않으니 곧 죽는다 해도 여한은 별로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딱하나 걸리는 것은 죄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해야 될 순간이 된 것 같았다.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살다 보면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면서 짓는 죄도 있지만 가장 큰 죄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등등…내가 알고 있는 어설픈 지식들을 조용히 말해드렸다.
가만히 다듣고난 그분은 잠깐 벤치에 앉아 쉬었다가 가자고 하셨다. 나는 나란히 옆에 앉았다. 그분은 눈길을 호수 저쪽에 두시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고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일을 하고 살거라면서 꼭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하시면서 쓸쓸히 웃으셨다.
오늘 아침 그분은 병원으로 출발하셨다. 남편 옆자석에 앉아 밝게 웃으시면서 손을 흔드셨다. 잘 이겨낼 거라고 기도할거라고 하시면서…그렇게 가셨다.
오빠가 하셨던 꼭같은 말을 난 듣고 있었다.
2003년 6월 30일 월요일
한국일보 문인광장
장남이자 외아들인, 50대 초반의 오빠가 작년 이맘때쯤 암으로 이 땅을 떠나셨다. 가까운 Holly Cross 공원묘지에 오빠를 묻고 내려오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꽃 사들고 찾아가 뵈어야지 마음으로 다짐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동네 파머스 마켓에서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꽃으로 한 묶음 샀다. 그러나 살아있기 때문에 우선이 되는 일들 앞에 마음의 다짐은 허물어져 갔다.
자주 가 뵙지도 못하면서 불쑥불쑥 오빠생각에,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등 앞에서 울 때가 있다. 뒷 차가 옆 차선으로 쏟살같이 달려나가면서 빵빵댄다. 깜짝 놀라 둘러보면 파란신호로 바뀐줄도 모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힐끔거리며 빠른 속도로 제 갈길을 가고 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개로 오빠생각에 울음을 삼키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 무렵 나의 가정에 한국으로부터 손님이 오셨다. 말기암 이라는 40대의 그 남자분이 오빠가 마지막 치료방법으로 선택했던 멕시코 암 특수치료 센타로 입원하러 오신다는 것이었다.
남편 친구의 친구라는 그환자는 남편친구와 함께 나의집에 오셨다. 그분을 뵙는 순간 돌아가신 오빠생각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보니 투병하실때의 오빠의 비참했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분은 한국에서 진단결과 암세포가 여러 기관으로 퍼져 치료하기엔 이미 늦었으며 6개월 이내로 죽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진단결과를 들은지 벌써 3개월이 흘렀으니 앞으로 남은 기간은 3개월이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으러 오신 것이었다.
이미 배에는 복수가 차기 시작했는지 깡마른 몸에 배만 불룩했다. 저녁이되어 현미밥에다가 된장국, 야채샐러드를 차려 드렸더니 제법 많이 드셨다. 한국에선 이미 음식을 못먹은지 여러날 되셨다는데 나의집에 오셔서 최근 들어 처음으로 음식을 많이 먹는 거라고 하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다시 오빠생각에 목이 매여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저녁식사 후 우린 가까이 있는 아론드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음식을 드셨으니 기운만 허락하면 걸어야 된다고 적극 권했더니 그러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호수를 낀 공원을 한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쾌한 공기 맑은 호숫가의 공원 길을 거니니 기분이 너무 좋다고 즐거워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일요일이라 우리 가정은 교회를 가는데 같이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분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교회라는 곳을 가본적이 없지만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일요일 아침 모두 준비를 해서 나가려는데 소파에 않으셔서 심호흡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처음 교회 가려니 가슴이 떨린다면서 아기 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남편은 급한 일이 있어 교회먼저 가고 난 남편친구와 그분을 내 차에 모시고 교회로 갔다. 나와 남편은 성가대에 서야 되는 관계로 안내석에 계시는 장로님께 두 분을 부탁 드리고 연습하러 들어갔다. 중간에 자리를 잘 잡으셨는지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예배당에 들어가 다시 확인을 했다. 두 분은 앞쪽 중간에 앉아계셨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그분들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생전처음 교회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신 그분이 오늘 목사님 말씀에 큰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고 난 쏟살같이 그분들께 달려갔다. 모두들 얼굴모습이 환하게 피어 올랐다. 교회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될지 망설이다가 식당에 들어가서 메뉴를 확인했다. 다행히 시금치 된장국이라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이번엔 내가 교회에 남아서 해야 될 일이 있어서 남편이 그분들을 모시고 집으로 먼저 갔다. 이렇게 남편과 서로 시간을 조정해가면서 그분들과 시간을 보냈다. 교회에서 그 동안 우리가 하던 일들을 하면서 최대한 도와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후 집에 오자마자 남편친구분은 다른 일이 있어 내일 병원 가는 길에 중간지점에서 조인하기로 하고 먼저 샌디에고로 떠나셨다. 저녁이 되었다. 남편은 내일 이환자분을 모시고 멕시코 병원을 가야 하기 때문에 사업상 해놓아야 될 일이 많아 쩔쩔매고 있었다. 어제 함께 공원 산책할 때의 편안해 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오늘도 가겠냐고 여쭸더니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셨다. 남편이 너무 바쁜 듯 보여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모시고 산책을 나가겠다고 했다. 너무 편안한 표정으로 선뜻 나를 따라 나섰다.
공원 길을 천천히 걸으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사업을 하셔서 돈도 엄청나게 벌었고 자식들도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로 어리진 않으니 곧 죽는다 해도 여한은 별로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딱하나 걸리는 것은 죄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해야 될 순간이 된 것 같았다.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살다 보면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면서 짓는 죄도 있지만 가장 큰 죄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등등…내가 알고 있는 어설픈 지식들을 조용히 말해드렸다.
가만히 다듣고난 그분은 잠깐 벤치에 앉아 쉬었다가 가자고 하셨다. 나는 나란히 옆에 앉았다. 그분은 눈길을 호수 저쪽에 두시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고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일을 하고 살거라면서 꼭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하시면서 쓸쓸히 웃으셨다.
오늘 아침 그분은 병원으로 출발하셨다. 남편 옆자석에 앉아 밝게 웃으시면서 손을 흔드셨다. 잘 이겨낼 거라고 기도할거라고 하시면서…그렇게 가셨다.
오빠가 하셨던 꼭같은 말을 난 듣고 있었다.
2003년 6월 30일 월요일
한국일보 문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