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09.04.10 04:31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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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년 된 400만 달러 상당의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이탈리아의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것으로 전세계에 3개밖에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분실되었다가 주인에게 돌아왔다는 기사가 얼마 전에 보도됐다.

정직한 택시 운전사에게는 영예시민 메달이 수여되었고 바이올린을 되찾게 된 필립 퀸트는 감사의 표시로 택시회사 앞에서 미니 음악회를 열어주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다시 찾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필립 퀸트의 사진을 보며 나는 한참동안 상념에 젖었다.

'바이올린'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먼저 울렁거린다. 딸이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자식을 가진 엄마라 하여 모두 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독주를 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지금은 많이 단련이 되긴 했지만 난 여전히 긴장한다. 무대 위의 딸보다 엄마인 내가 더 떤다. 그저 평범하게 공부쪽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싶지만 어쩌랴. 이 길이 가장 행복하다는데….

연습을 많이 하면 바이올린이 닿는 목 밑이 시커멓게 멍 들기도 하고 어깨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바이올린을 포기하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지만 대개는 자세교정을 시도하기도 하고 운동이나 물리치료를 하면서 극복해 나간다.

대학 다니는 동안 한 때는 평생 '깽깽이' 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며 갑자기 전공을 바꾸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시작을 했으니 일단 졸업은 하고 다음 길을 생각해 보자고 설득했다. 다행히 학교 카운슬러도 나와 같은 말을 해서 고비를 넘겼다. 그 한때를 넘기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고등학교 때 딸은 전공을 하려는 사람이 가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값싼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었다. 바꿔줘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 당시 딸은 샌디에고 유스오케스트라 콘스트매스터(악장)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날 나와 차를 바꿔 타고 가는 바람에 바이올린을 내차에 놓고 갔다. 하필 저녁에 샌디에고 다운타운에 있는 컨벤션 센터에서 빅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어 마지막 리허설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러니까 솔로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딸이 바이올린을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진 딸 앞에 디렉터인 미스터 제프가 하나의 바이올린을 내놓았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숨지기 전에 도네이션한 것이라며 오직 악장을 위해서만 사용하라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딸은 그 바이올린의 임시 주인이 되었다.

어느날 바이올린 활이 문제가 있어 샌디에고 멀리 남쪽에 있는 어느 바이올린 메이커를 찾아갔다. 장인의 꼿꼿함이 묻어나는 나이 지긋한 그 남자는 딸이 가진 바이올린을 보더니 어떻게 이 바이올린이 딸 손에 있는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그 바이올린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어느 가난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당시 바이올린 메이커가 소유하고 있던 이 바이올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주말이면 근처 공원에 나가서 바이올린을 켰다. 오가는 사람들이 동전을 놓으면 그것을 모아다가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 바이올린 값을 갚기 위해 몇 해 동안 동전을 주루룩 쏟아 내던 그가 죽었다. 그리고…그 바이올린은 딸 손에 있었다.

그 바이올린으로 딸은 대학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구입하고 싶었지만 망자의 유언 때문에 팔 수는 없다고 했다. 딸은 대학 4년을 고등학교 때 사용하던 그 바이올린으로 그냥 버텼다.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연세대학을 갔다. 연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동안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그곳에서 만난 몇 명의 한국 친구들이 자신의 바이올린은 얼마짜린데 넌 어떠냐고 물었단다. 억대 바이올린을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딸 바이올린 값을 말했더니 어떻게 그런 바이올린으로 전공을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을 바꿔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딸이 어느날 오래 전에 아들이 사용하던 바이올린을 옷장 구석에서 찾아냈다. 몇 번 켜 보더니 '괜찮은데…'하면서 들고 나갔다. 그 바이올린은 우리가 잠시 영국 살 때 산 것인데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없고 '메이드 인 이태리' 라고 만 희미하게 적혀있다. 그 바이올린으로 딸은 대학원과 연주자과정을 끝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대학 두 곳에서 박사과정 장학생 입학통지를 받았다.

주재원 가족으로 미국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남편 직장 상사의 딸이 뉴욕에 있는 어느 유명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때 상사부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빨리 망하려면 주식을 하고 서서히 망하려면 자식음악을 시켜라" 라는 말이 있다며 한국에서 악기를 전공하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주재원 기간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몇 가지의 이유 중에 평범한 직장인인 남편의 수입으로는 한국에서 딸을 음악공부 시키기 힘들겠다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렇게 비싼 바이올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경이롭고 바이올린의 가치에 걸 맞는 바이올리니스트 필립 퀸트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니 눈물겹다. 타고난 음악가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내 딸도 수많은 악기 중에 오직 바이올린 소리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귀도 눈물겹다.


-미주중앙일보 '문예마당'-
  2008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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