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재원 가족으로 처음 미국 와서 살았던 애리조나 조그만 시골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미군과 결혼한 한국부인들은 주일이면 그 도시에 하나뿐인 한인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왔다. 그중 A집사는 주재원 가족들의 병원 학교 차량국 사회보장국 등 미국정착을 위한 여러 가지 일에 단 한 번의 싫은 기색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단아하고 사근사근한 그녀의 백인 남편은 한국여자들이 들락날락하면 슬며시 자리를 내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벽에는 한국 매듭으로 만든 장식품이 걸려있었고 집에서 직접 만든 인절미나 시루떡으로 한국인 이웃들을 대접했다.
언니처럼 엄마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성품을 지닌 A집사 때문에 미국 시골생활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또 그녀는 신앙 없는 나를 깨워 새벽예배로 이끌었다. 많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함께하면 외롭지 않잖아'라며 다소곳이 웃었다.
몇 년 후 주재원 근무기간을 마친 남편이 한국으로 들어가고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조금 큰 도시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기러기 가족생활이 시작되었는데 A집사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군인가족으로 살 때 절친한 이웃으로 지낸 B집사를 연결해 주었다.
그녀는 매사 당당했고 자신의 지난날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살에 미군인 남편을 만나 미국에 왔다는 그녀는 군인가족들이 모여 사는 단지에 들어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비슷한 처지의 한국부인들끼리 모여 화투를 치며 시간을 죽이는 세월을 보냈다. 너무너무 외로워서 담배도 피워 보았지만 허전한 가슴을 메울 길이 없었다.
우연히 어느 집에선가 흘러나오는 한국찬송소리에 마음이 끌려 들어갔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후 주일 아침이면 밴을 몰고 부대 안에 사는 군인 아내들을 픽업해서 한국교회에 데리고 가는 일을 즐거이 감당했다.
문득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칼리지에 등록해서 공부를 시작했고 졸업 후 미 교육청에 직장을 갖게 되었다는 지난 사연을 들으며 외로움의 강물을 잘 헤엄쳐 온 그녀가 참으로 크게 보였다.
그후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끔 다른 인종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을 만날 때면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남을 도우면서 '함께의 기쁨'을 누린 A집사와 외로움을 디딤돌 삼아 일어선 B집사를 떠올리며 외로움이 더욱 열심히 살아갈 재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른 인종과의 결혼뿐이랴. 사람은 외롭다. 이국땅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느끼는 외로움도 크지만 같은 민족끼리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느끼는 외로움은 어쩌면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말이 너무 잘 들려서 상처받고 오해가 생기고 그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느 한 사람 외롭지 않은 인생은 없고 모두 나름 특별한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 같다. 누가 떠밀어서 가는 길도 있지만 발걸음을 뗀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이미 선택한 자신의 삶을 성실하고 떳떳하게 수용하고 완수해 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나 보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3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