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제주화 속 외로운 바람

2015.06.30 03:10

arcadia 조회 수:1158

   
242CE84953474597128E40  〈변시지〉 (邊時志)

바람부는 제주를 떠올리면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독… 불안… 기다림… 恨 등
"제주는 바람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화가 변시지는 제주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 바람부는 외롭고 거친 제주를 담았습니다.
지팡이는 지금까지도 그에겐 평생의 의지(依支)였고, 그림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1980년대 초 제주에 살면서 가끔 변시지 화백과 사무실에서 조우할 기회가 있었지만,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 업무적인 일처리만 해드렸으니, 변화백께서는 나를 기억할리가
없을 것입니다. 금방 쓰러질 것 같던 불편한 몸에 언제나 지팽이를 의지해서 다니시던
그 때의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간 30여년 넘게 꾸준히 혼을 담아 그려 온작업이 세상의 인정을 받아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중장년 시절의 궁벽하고 외로운 모습이 아니라,
당대의 명망있는 대가로서의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그림 속에서 만나는 남자는언제나 혼자이며 지팡이를 짚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은 80년대 초 그 시절 그 남자의 아픔과 고독이었습니다. 그 비틀어지고
휘어버린 육신의 아픔과 외로움이 녹아 있는게 변시지 화백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주어진 운명에 주눅들지 않고 숭화해낸 그 정신에 존경을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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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 (邊時志) 화백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서귀포 동홍동에서 태어나, 6세 때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성장하며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연소로 광풍회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1950년대 후반 서울로 돌아와 작업하면서 ‘비원파’라는 극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시도해 한국적인 미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0년대 중반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변 화백은 기존의 작품수법과 표현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한 생략과 거친 표현, 동양적 여백을 활용해 제주를 황토빛의 절제된 색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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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
변시지의 두 작품 중 하나이다.


"풍경과 인물 속에 형상화된 인간존재에의 연민과 우수"

제주출신 원로작가인 변시지는 주로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말을 그린다.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 가는 초가와 소나무 한 그루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구부정한 한 사내가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 이러한 변시지 회화의
기본 구도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고즈넉하게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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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와 소나무>

화면 전체가 장판지색 혹은 건삽한 황토빛으로 처리되어 있고, 풍경과 인물은
먹선의 고졸(古拙)한 맛과 역동성(力動性)이 함께 어울려 장대한 대자연의 율동으로
형상화 된다. 제주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 23세에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귀국하여 서울대,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다시 제주로 돌아간다. 실로 40여년만의 귀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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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45.5 x 33.4cm>

변시지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제주의 풍물이 詩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갈매기와 바닷새와 쓰러져 가는 초가, 바람 혹은 태양을 마주하고 망연히 서 있는 사내
- 이 소재들은 그러나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부수적인 소도구일 뿐 제주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풍물시가 아니다. 풍경으로 처리된 변시지의 인물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수이고 그 표현의 저돌성은 모두
아름답고 개성적이다. - 열화당 미술문고 "변시지" 와 "모딜리아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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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27.3 x 40.9cm>


世界 100大作家 사이버갤러리 班列에 오른 暴風의 元老畵家

세계의 100대 화가 중에는 저마다 고유의 자기언어와 독자적인 화풍과
조형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작고 작가 중에는 박수근, 김환기, 이응노,
이중섭 같은 작가가 그들만의 특질적인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고, 생존작가 중에는
변시지, 김흥수, 서세옥, 재불작가인 김창열 같은 원로작가들이 자기만의 고유한
오리지날리티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이들 화가들 모두가 세계의 미술계가
공인하고 있는 원로들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이들 화가들의 공통된 특징을
지적한다면 작품세계가 필요한 진수만을 골라 낸 간결하면서도 한국성을 추구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예술양식이 세계성과 공존할 수 있는 국제감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이들 작가 중 여느 한 작가일지라도 작품세계가 한국성(韓國性)을 상실했다면
아마도 이 반열 속에 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본 란은 폭풍(暴風)의 작가(作家), 제주(濟州)의 풍물시인(風物詩人)으로 세계적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제주 출신의 원로화가 변시지 화백의 작품세계를 집중
탐구해 보기로 한다. 그동안 작가는 본지를 통하여 여러차례 소개된 바 있지만
본지의 사시(社是)와 성격이 첫째 한국성(韓國性)의 지향,
둘째 한국미술의 세계성 획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가를
집중 조명한다는 것은 본지의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며, 일관된 추적을 하면서
내외에 널리 홍보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사명이다. 이른바 한국미술의
세계미술시장 진출을 통한 고부가 가치의 외화를 획득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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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島의 해질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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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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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시간

이 사이버갤러리를 확인한 미국의 유명 브랜드의 T셔츠 전문 메이커는
변시지화백의 작품 가운데 두 점을 선정하여 로얄티를 지불하고 문화상품으로
사용하겠다고 전자메일을 통하여 아그레망을 요청해 온 것이다. 물론 이 계약은
변시화백의 승낙으로 체결되었고 현재 이 티셔츠는 상품으로 프린트되어 제작, 판매되고 있다. 다시 말해 국제간의 문화상품 판매약정이 모두가 인터넷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변화백은 지난해 72년의 생일을 맞아 인터넷 화집을 발간했다.
이 사이버 화집에는 변시지화백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한 한 작가의 작품세계와
평론과 행적, 도판 등 화업 반세기를 총 정리하는 내용들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 밖에도 그의 작품세계는 많은 다른 인터넷망과 사이버갤러리, 전자메일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의 작품이 국내 수장가는 물론이요, 일본이나 미국등지에서까지 자주 찾는 것도 얼핏 보면 단조로우면서도 순도 높은 한국성 등 고도의 예술성을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邊時志의 作品世界

이렇듯 그의 예술세계가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74년 중앙화단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로 금의환향, 제주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불과 3년만인 지난 77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잠재력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작업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 등이 제주풍경으로 환치(換置)되는 등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나 한가지 패턴에 안주하고 있는 다른 대가들에 비교하면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으며 유화의 세계에서도 작가 변시지화백처럼 극적인 변신이 가능함을 실증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요, 아카데미즘이나 극사실주의 기초수업이 튼튼한 바탕이 되어 오늘의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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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110 x 83cm

아열대성 남국의 정취가 물신 밴 제주는 아스팔트문명의 산물인 공해로 뒤덮힌
육지와는 전혀 다른 풍토적인 환경과 분위기,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의 망각 속에 살아 온 그가 고향을 그리워 하는 향수와
애정 때문에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의 완만하게 굴곡이 진 밭이랑과 화산질로 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윗돌, 나즈막이 두른 돌각담, 완만한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 오는 짜릿한 바다 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꽃자왈 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구릉지대,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국의 태양,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오는 자연환경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소중한 소재요, 피사체였다.
사실 작가의 마음 속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과 시상이 떠오른 시인이 시를 읊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화백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승화 시킨 것이다.

특히 작가의 자화상을 메타포로 이미지화 한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외롭게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모래사장이나 해안선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 낙시를 드리운 노옹의 태공망의 풍경은 그 모두가 작가의 자화상이요,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이 작품 속에 농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회화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그 표현의 방법론과 양식에서 변시지화백만의 독보적인 경지요,
오리지날리티이며, 그 누구도 닮지 않는 그만의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행여 그의 화폭 속에 불필요한 덧살이나 췌육이 딱지딱지 장황한 설명이 가해진다면
이 작품의 순수성에 훼손이 갈 것이다. <김남수 / 미술평론가 >


濟州島에 귀착한 異色藝術

변시지 선생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으며 여섯살 때 인 1931년에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대판에서 성장하며 화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대판미술학교에서
양화를 전공하고 8.15민족 해방을 거기에서 맞이하였으며, 그 후에도 일본에 머물렀다.

1945년 이후의 그의 화가 기반은 동경에서 이루어졌다.
1947년부터 그는 동경의 한 유력 미술단체인 광풍회의 신인작품공모전과, 일반적으로
한층 권위가 인정되던 일본 문부성주최의 "日展"에 거듭 입선하면서 신진으로 빛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8년의 광풍회전 출품에서는 수석상을 차지함으로써 각광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정회원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광풍회와 유대를 갖고 있다.

일본에서의 변시지의 작품활동과 작가적 위치는 광풍회 신인상 수상회원이라는 계보적인 비중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을 갖고 31세때인 1957년에 서울로 귀국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그 는 고국의 미술계나 화가들과 거의 관계를 가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내색함이 없이 자신이 택한 기법의 작품행위
그 자체로서 서울의 화단에 발붙임을 굳히는 의지를 보였다.
귀국 다음 해에 가진 화신 백화점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통하여 그는 일본에서의
저간의 작품내면을 보여 주었고, 그때 그 작품전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의 기법적
수준과 예술역량의 탄탄함 및 많은 가능성을 주목하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는 구미의 새로운 미술사조에 편승하려는 시류의 작품형식보다는 전통적 회화의식으로 자신의 화면을 충실히 내실화하는 자세와 태 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때 새로운 탐구적 태도로 현대의 조형의식을 내보인 추상적 혹은
반추상적 화 면을 시도했었다. 귀국전후였다. 그 시도적 작품이 귀국 작품전에
여러 점 전시되어 본색의 사실주의 작품계열과 대비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비구상
추구는 없이 자신의 체질적 자연주의적 정신 구현으로 일관성을 나타냈다.

서울에서 집착하게 된 세밀한 묘사력과 감성적인 시각의 풍경화에 앞서는 일본에서의
청년기 작업은 주로 인물 주제로 구도, 색채, 붓놀림의 회화적 성과 및 표현력도 감성이 매우 두드러진 내면이었다. 당시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그 내면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23세때인 1948년의 광풍회전에서 최고의 영예를 안겨준 "베레모의 여인" 과
"만도린을 가진 여자" 는 모두 실내의 좌상으로, 구도상의 포우즈화 얼굴 및 손의 표정, 그리고 색채구사와 붓놀림의 질 감등이 기법적 수준과 작품역량의 확실성을 확인
시켰다. 최고상 수상의 신예로 즉각 정회원이 되어 다음 해 광풍회전에 출품했던
"휴식" 과 "바이얼린을 가진 남자" 에서는 필치와 색조의 표현질이 한층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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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Nude Women, 1956,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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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with a Violin, 1948,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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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 in a Beret, 1948,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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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의 상 110 x 83cm

전체적인 화면 분위기에 주제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이 시기의 확실하고 탐구적인
조형성은 1947년부터 입선한 日展 출품작 "FEMME", "여인" 등에서도 살펴진다.
글머리 에서 언급했듯이 변시지의 광풍회 참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日展에도 거듭 입선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동경화단 진출을 착실하게 다져 나갔다.
그 시기의 작품 정진을 " 네모의 상", "등잔과 여인", "K씨의 상", "남자", "3인의 나부" 등의 인물화에서 엿볼 수 있다. 이중에서 특히 눈여겨 지는 것은 "3인의 나부"로 여기서는 사실적인 형태이면서도 적갈 색조의 통 일적 분위기와 변화속에서 세나부의 서로 다른 자세와 표정을 부드러운 곡선 및 특이한 구도로 전개되어있다. 화면 성과가 대단히
두드러지고, 조형적 묘미가 특출하게 구현된 작품으로 1950년대의 한 대표작으로
여길만 하다.

그밖에 드물게 그려진 풍경화의 하나로 1950년의 日展에 입선했던 "오후" 는
명상적인 시각으로 어느 공장의 일각을 소재로 삼으면서, 조형적 계산이 매우 엄밀하게 의도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수평구도를 취하면서 건물, 담, 구내 철로등이 직선 사선 곡선의 질서로 강 조되어 있고, 여름날 오 후의 정직한 시간과 공간 분위기를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한 변시지 풍경화의 특색있는 초기 작례는 1946년 작품인
"백색가옥과 흑색가옥" 의 심정적인 시각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다.

이상의 청년기 작품들은 동경시기에 다져진 기반이다.
그리고 그 기반을 서울로 연결시켜 그의 국내활동을 새로이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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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in Autumn,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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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1960, oil on canvas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하면서 변시지는 마치 마음속에 깊이 쌓여 있던 모국의 자연의
향수를 싫것 풀려는 듯이 교외 산야의 나무숲과 호젓한 산책길 등을 소재삼은 풍경화에만 열중하는 변화를 나타 내었다. 아카데믹한 사실적 수법으로 되돌아가 인적없는
조용한 자연 풍경을 눈과 마음으로 어루만지듯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하려 들면서
그는 나무와 지면에 하늘 거리는 빛이며 대기감으로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1960년과 1961년에 제작된 "길"이 그 무렵의 관심을 보여 준다.

서울의 화단에서 여전히 외로운 위치였으나 그는 그만큼 남모르게 작품에 열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비원의 역사적 시점 및 자연미와 어우러짐은 그의 회화감정을 마음
깊숙히 자극했던 것이다. 1975년에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국립제주대학 교수로
다시 안착할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비원을 찾아가 무수한 역작을 남겼다.
"가을비원", "부용정", "반도지", "애련정" , "가을의 비원"등이 그의 연작이다.
그밖에 창덕궁 풍경과 경복궁의 "향원정", "연회루" 등에도 발길 을 옮기며
눈을 사로 잡은 곳곳의 고궁미를 가능한한 사실적 현실감과 회화적 재현의 감흥으로
포착하려고 한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일본에서 성장한 변시지의 기일층의 진한
모국애 심정이 반영된 것으로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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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rbor,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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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rbor, 1970

그는 그 고궁풍경들을 녹음의 여름, 단풍든 가을, 눈덮힌 겨울 의 정취로 그렸으나
눈부시게 꽃이 핀 정경은 피하려고 했다. 너무 화사한 춘색은 고궁의 말없는 역사적
분위기의 깊이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본 때문일까. 게다가 그의 모든 풍경화는
어떠한 인적도 배제된 정막한 시계로 다루어 진다. 이 또한 작가의 내밀한 심사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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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with Palace,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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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al Palace, 1963

그러나 여기서 부연할 만한 것은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의 화면에서 변시지는 한결
신선하고 투명한 색채 구사를 보이는 수법상의 적잖은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전과 달리 여름과 가을 풍경을 색상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생명감으로 강조하려고
한 듯한 그 화면 성과가 "가을길", "여름" 등에 잘 빚어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서울에서의 심정적인 풍경작품들은 1965년부터 회원으로 참가한
신기회전과 한국 미술전 등에 출품되기도 하면서 변시지 작풍의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이 주시될 수 있었다. 그 철저성은 시기를 같이 했던 손응성(1979년 작고)의 비원풍경과
비교되면서 주목을 샀다.

그러다가 제주도에 안착하면서 작품수법과 표현의식에서 그는 근본적인 전기를
맞이하였다. 남국 적인 풍광의 고향, 제주섬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의 낭만적이며
토속적인 강렬한 풍정을 중년의 나이로 새로이 재발견하면서 더할 수 없는 애정을 쏟는 새로운 감정의 작풍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주도 출신 화가의 가슴에서 집약되고 상징적 표상화라고 할 수 있는 향토애의 진한 내면성과 함께, 서울시기의 사실주의와는 일획을 긋는 선명한 심상의 압축형태였다.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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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17.5 x 29.5cm

제주 작품환경의 변환중에서도 처음엔 서울에서의 풍경 수법을 한동안 지속하던
변시지가 집중적인 심취로 자신이 태어난 남국의 풍광미와 그곳의 특이한 삶의 정서를 가슴으로 소화하면서 놀랍게도 동양화적인 수법으로 급선회한 것은 1976-77년 무렵이었다. 창망한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 후련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검은
암석이 돌출하는 해안과 멀리 떠 있는 어선들을 배경으로 한적하게 위치하는 검은
돌담의 독특한 초가 모양등이 유채로 된 묵필화 처럼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촌", "이어도", "제주도의 여름",에서 그 급선회의 초기 양상을 볼 수 있다.

저간의 사실적인 대상묘사와 색채표현 및 엄정한 객관적 표현에서 완전히 떠나 향토적 감흥을 유발하는 엷은 황갈색을 화면 전체에 일률적으로 바른 위로 아주 까맣거나 그런 성질의 유채선으로 풍경의 구체적 형태를 간명하게 표현하는 이 제주시기의 비사실적이고 평면적이며 기묘한 낭만주의의 독자적 실현은 변시지 양식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대한으로 단순화 되는 주제 전개와 바탕의 황갈색조 및 검은 필선외에, 극히 제한적인 자연적 색조 보완으로 제주도의 풍서미를 농축시키며 변시지는 가장 제주도 화가 다운 예술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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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72.7 x 90.9cm

제주도의 풍서미에 삶의 움직임을 도입하기 위해 토종의 조랑말이나 소나 인물(해녀 포함)이 나타나는 것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요소이다.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농부나 어부 모습이 아닌 형태로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등장이다. 이는 분명히 변시지 자신의 심정적 도입이다. 바다에 면한 언덕의 작은 초가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앉은 인물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그 를 명료하게 밝혀준다.

1981년에 변시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품페이, 나폴리의 풍경으로부터 파리, 런던 풍경을 여정이 넘치는 화면으로 연작했다. 그러나 수법은 제주도에서 정립시킨 저 황갈색 바탕의 검은 필선 그대로의 작업이 엇다. 다만 그것들은 사 실적인 현장감에 비중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여기서도 자주 개입되는 변시지 자신의 화중 자화상의 모습은 하나의 복합적 심리에서 의도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그 나이브한 변시지의 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그의 예술성향을 이색적인 매력으로 평가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동양적 회화성이 원용된 검은 필선 작업의 묵화같은 그 이질적 유화의 성과는 뚜렸한 창의성의 구현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서울로 귀국한 직후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이를 먹음 에 따라 민족적 기반위에 나의 예술을 세워야겠다는 것을 느끼고 귀국했습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그리고 제주도로 떠나던 해에 "양화로서 우리나라 고유의 동양적 화풍을 살린다" 는 정신에 뜻을 같이 한 화가들 의모임으로 "오리엔탈 미술협회"를 창립하고 수년간 그 동인전을 이끌었던 노력도 바로 동양적 회화정신의 유화지향의지를 행동에 옮기려고 한 것이다. 그 무렵부터 그 는 전통적인 수묵화도 직접 손대곤 하였다.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작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매우 중요하다.

변시지 화백의 끝없는 제주도 소재의 화면은 앞으로도 그의 귀착적인 집착으로 계속 추구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기몰입의 그 유심적인 리얼리즘을 누가 어떻게 보는 가에 개의치 않으면서 더욱 자기 실현을 보여줄 것이다. <이구열/미술비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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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시절

나는 1926년 5월 20일 서귀포 서홍동에서 5남 4녀중 네째 아들로 태어 났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 었지만 우리 식구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先代에서 물려 받은 농토와 재산이 상당 했기 때문이었다.
부친(邊泰潤)은 전형적인 閑良이었다. 漢學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평소 일본을 왕래
하면서 신학문을 익혔고, 평생을 책과 벗하며 사신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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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울때 162.1 x 130.3cm

나의 "제주畵"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는 지워졌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에서 까마귀는 吉鳥로 인식되어 왔다. 까마귀가 울면 손님이 온다 했고 차례를 지낸 후 고수레로 지붕에 음식을 뿌리면 까마귀가 새까맣게 날아 들어 쪼아 먹곤 했다.

부친과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 다녀오던 길에 안장없는 조랑말을 탔다가 엉덩이 살이 벗겨지는 불상사도 있었다. 약이 귀하던 시절이라 도둑 고양이털을 뭉텅 짤라 환부에 붙이고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돼지를 키우는 뒷간에 몰래 들어가 새끼 돼지 목에 새끼줄을 감아 끌고 다니다가 돼지가 목이 졸려 죽었던 일 등이 유년의 서귀포시절을 구성하는 소도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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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조랑말

서당을 갈 때면 개천을 건너야 했던 골목길은 예전과 다르지만 그 시절 돌담 지나 너른 밭에 입본관리들이 반 강제적으로 배당한 감귤나무를 심었다. 이것이 뿌리를 탄탄히 내리면서 오뉴월이면 그윽한 감귤꽃 내음이 온마을에 진동을 했다. 그때의 묘목이 지금의 서귀포 감귤 농사의 시원이 되었다.

나의 유년시절에 가장 신이 났던 것은 서당에서의 한문공부었다. 초보수준이긴 하였지만 그때 눈 떴던 한학의 맛깔스런 세계가 후일 내 작품의 바탕을 이룬 수묵화의 뿌리로 작용하였을 지도 모른다.

천자문을 떼고 붓에 힘이 붙을 즈음 서당공부는 파장을 맞았다. 어느 날 일본 순사가 번쩍이는 칼을 차고 서당앞에 나타 났다. "이제부터 서당에 나가는 사람은 모두 잡아간다. 조선사람은 지금부터 신식공부를 해야하니 소학교를 다니도록 하라" 순사의 명령은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였다. 부친은 서당에 나가던 형들을 서귀포 소학교로 옮겼다. 나도 형들을 따라 소학교에 갔는데 나이가 어리다 하여 정식학생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형들이 교실에서 공부를 할 때면 나는 창문에 매달려 교실안을 기웃거리곤 했다. 열여덟살 장정과 가슴이 봉긋 솟아오른 처녀, 코흘리개 아이들이 함께 앉아 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학교가 파하면 형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서홍리 부근의 정방폭포는 동네아이들의 모험심을 키우는 곳이었다. 지금은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그 시절엔 아슬아슬한 바위 틈새로 곡예하듯 내려가야 정방폭포를 만날 수 있었다. 가을이면 갈대잎 서걱이는 한라산 기슭까지 달려가 딩굴었고, 겨울이면 초가지붕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무서위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서귀포 생활은 여섯살 나던 해에 끝이 났다. 부친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계셨다. "서귀포 촌구석에서 무었을 배우 겠는가. 너희는 개화된 일본에서 공부하여 세상넓은 것을 보려무나" 그길로 가산을 정리하여 일본행 여객선에 오른 때가 1931년 이었다.


무엇이 이토록 변시지에 열광하게 하나?
'변시지展' 1달만 1만8천명 돌파...이례적 3주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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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여기에 있었네” 제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도 ‘변시지 전(展)’을 둘러보고 나서 이렇게 내뱉는다. KBS제주방송총국이 개국 60주년을 기념하며 기획한 '변시지 전'은 지난 12월 10일부터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변시지 작품 70여점이 한꺼번에 전시되는 이번 전시회는 관람객들에겐 ‘붙들고 싶은 순간’이다. 이런 감동을 언제 또 만나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방명록에는 단양, 청주, 공주, 포항, 부산, 서울 잠실 등 전국 방방곡곡의 지명들이 남겨져 있다.

전시 일정에 맞춰 제주여행을 앞 당긴 이도 있고, 당일 치기로 단 2시간 관람을 위해 찾은 이도 부지기수다. 정운찬 전 총리를 비롯해 윤형주, 김세환, 전영록 등 유명인들이 전시를 찾았다. 제주에 거주하는 이 중에선 다섯번을 거뜬히 찾아온 이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들린 셈이다.

한 원어민 교사는 변 화백의 그림을 두고 ‘Amazing’이라고 방명록에 남겼고 이내 두 번을 더 찾았다. 앞으로 두 번은 더 올거라 했단다. 이들의 열광에 힘입은 ‘변시지 전’ 전시기간이 3주 연장됐다. 오는 30일까지다. 9일 기준으로 변시지 전을 찾은 관람객은 1만8422명이다. 하루 평균 580명이 찾은 셈이다. “눈 비 오는 날도 300명 가까이 다녀간다” 담당 도슨트(전시해설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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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친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던 11일 오후 한 가족 관람객이 변시지 전을 찾았다.
도슨트의 설명을 흥미롭게 듣고 있는 모습.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하는 것일까. ‘제주’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반응에서 얻을 수 있는 공통된 답이다. 휘몰아치는 황톳빛 제주 바람을 두고 사람들은 “제주를 보았다”고 말한다.한 재일교포는 “오래전에 떠나와 제주를 몰랐던 내게 ‘이게 제주구나’하는, 그간 잊고 있던 고향의 본 모습을 보았다” 는 말을 남겼다.

김유정 큐레이터는 “변시지의 그림은 서양화.한국화와는 구별되는 ‘제주화’”라고 말했다.

변시지 화백으로 상징되는 ‘제주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거꾸로 ‘제주화’를 안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설전시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에 힘을 싣고 있다. 이미리 기자 <제주의 소리> 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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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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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5 x 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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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까마귀 39.4 x 3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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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生存 45.5 x 5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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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31.8 x 40.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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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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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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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바다 2, 112.1 x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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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바다, 80.3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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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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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1, 80.3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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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2, 162.2 x 112.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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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5, 80.3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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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6, 80.3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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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8, 112.1 x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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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바다 13, 112.1 x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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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석양, 65x53cm,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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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제주, 10호,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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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제주, 45x37cm,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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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돌하루방과 까마귀, 29x18cm,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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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의 ‘점 하나’, 2005, 유화, 71 x 5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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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난무, 1997, 유화, 114 x 164cm.
스미소니언 코리아 갤러리 입구에 제주도 출신 화가 변시지의 100호짜리 그림 2점이
전시되어 있다. <난무>(1997), 다른 하나는 <이대로 가는 길>(2006)인데,
2년 단위로 스미소니언이 임대하는 형식으로 향후 10년 동안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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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이대로 가는 길, 2006, 유화, 168 x 118cm<




제주출신 세계적 '폭풍의 작가' 변시지 화백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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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작고한 세계적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  

변 화백은 한국적인 미, 특히 제주도의 자연 풍광을 서양화 속에 명상적 · 관조적으로
잘 표현해낸 한국 화단의 거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가 낳은 세계적 화가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이 8일 오후 1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1926년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출생한 변 화백은 6세 때 선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일본 최고 권위의 광풍회
(光風會)전에서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1957년 서울대 초청으로 영구 귀국한 고인은 한때 서라벌예대, 한양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변 화백은 1975년 제주대 교수를 맡으면서 서울을 떠났다. 고향에 정착한 그는 그동안 즐겨쓰던 색채를 버리고 제주 풍경 고유의 황토색으로 화폭을 꾸몄다. 폭풍 치는 해안가 등을 배경으로 까마귀나 조랑말, 배, 깡마르거나 고개 숙인 사내 등이 등장하는 독특한 작품은 고독과 비애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냈다는 평가와 함께 ‘폭풍의 화가’라는 별칭을 낳기도 했다.
변 작가가 빚어낸 내면의 풍경들은 한국적인 풍토를 뛰어나게 표출해 낸 것으로 평가받아 해외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아 일본·이탈리아·프랑스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동양인 화가로서는 최초로 2007년부터 10년간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두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1997년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가 세계 100대 화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국민훈장(1991년), 제9회 이동훈 미술상 본상(2011년)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동양화가인 부인 이학숙씨와 아들 정훈, 딸 정은(화가)·정선씨가 있다.

   
  ▲ <초가와 소나무> 고 변시지 화백 작.  

- <제주투데이> / 문춘자 기자 / >2013년 06월 0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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