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17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 김다명

2014.05.22 09:25

유봉희 조회 수:376 추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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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의 표지(標識)는 자연 언어다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발자국 호수』

          - 김다명(시인) … 문창2012년 여름호 <좋은 시집 좋은 시>


수로 비 쏟던 엊그제
어느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 언덕 모퉁이를 걸어갔을까요.
물 고인 발자국 안에 내려앉은 하늘
작은 웅덩이에 동그만 하늘
구름도 산드르 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숫가에서
그만 가던 길을 놓아 버렸습니다.

나도 가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호수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붙일 곳 없는 어떤 쓸쓸한 마음에게
혹은 적적한 당신에게
작은 발자국 호수로 놓여
지질린 낮에 잠깐 웅크리고 앉으면
어쩌다가는 물방개 한 마리 건너오고
바람 부는 밤, 별 소나기 쏟아질 때는
아기별들 소곤소곤 놀다가
별바래기 하나 가만히 놓고 가는 호수.
―「발자국 호수」 전문

*지질린: 기운 꺾여 짓눌린
*별바래기: 별을 바라며 희망을 간직하고 사는 모습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유봉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감각적이다.
시집 제목으로 뽑아낸 “산의 높이가 바다의 깊이로 떨어지는 이곳/
눈 감으면 파도 소리인 듯 바람 소리인 듯/ 만 년 소금기 먹은 바람이/ 바위산을 휘휘 서늘하게 핥고 있는/ 산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여기에서/ 문득 걸어가는 시간의 발을 잠시 목격했다”
(「현장은 왕복여행권을 가졌다」),
“문득 가던 길 끊어지고/ 공중에서 아찔 발이 풀렸다”
(「허공과 허공이 손을 잡다」),
“너대로의 값을 다 치러서 좋겠다”(「하루살이」)
“나는 숨죽인 나뭇가지다”(「나비가 머문 자리」).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의 언어는
자연이 발효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결되는 표지를 찾을 수 있듯,
한 사물에는 저마다 감추어진 의미가 있고, 숨은 의미를 가리키는
이 형상, 표지(標識)는 자연 언어다. 시각적 이미지가 풋풋한 시인의
감정 표현은 주관적인 영역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 감정은 인생관, 정서, 내적현실로 표현되었다. 시인의 심리적
정감(情感), 개인적 경험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산 형식(形式)이다.
생명의 유사성은 눈앞에 표현된 감정을 보고 듣는다. 뛰어난 작품
에는 생명, 생명력, 생기가 있듯, 시인은 시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발자국 호수에서는 실제 맥박도 뛰고 숨도 쉬어진다.

억수로 비 쏟던 엊그제
어느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 언덕 모퉁이를 걸어갔을까요.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은 질문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질문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답이다.”라고 말했다.
이해는 생각을 공유하는 데서 생겨났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숫가에서
그만 가던 길을 놓아 버렸습니다.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나는 너와 만나고 공감한다. 따라서
글을 통한 확대는 타자로 향하면서, 그렇게 하는 만큼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나로 돌아온다’는 것은 좁게는 자기반성
이며, 넓게는 내가 서 있는 현실의 테두리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타자 지향과 자기 회귀다.

나도 가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호수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시간 개념은 인식 가능한 지금과 연결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감각과도 연결시켜 대상은 인식 전에 느껴져야 한다. 느끼고 생각하는 지금
시간과 이 시간 속의 변화를 통해 조금씩 바뀌어 간다. 발자국 호수는 시적 나의 생생한 느낌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대표적 장소로 보인다. 작품에는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미래의 에너지가 경험의 잔해로 기억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얼마나 넓게 느끼고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가는
시인이나 시를 읽는 독자 개인에게 달렸다.

어쩌다가는 물방개 한 마리 건너오고
바람 부는 밤, 별 소나기 쏟아질 때는
아기별들 소곤소곤 놀다가
별바래기 하나 가만히 놓고 가는 호수.

이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로, 소리로 또 색채로 표현할 수 있다. 삶의 변화는 내가 꿈꾸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깨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새롭게 깨어나 행동하게 된다.

시인의 시세계는 설렘과 아쉬움의 교차 경험이다.
이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 자연과 시인의 만남은 가능한 것들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을 다시 상상하는 일이다. 시의 이상적 바탕에는 비판적, 합리적 사유가 있다. 현실의 한계 속에서 이 한계 너머의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확장을 경험할 때 잊고 지낸 낙원의 이미지를 조금씩 회복한다.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느낌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도 느끼는 것, 객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주관적 일반성’이라 했다.

미(美)는 내가 느끼는 것(주관적, 객관적)이면서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객관적, 이성적). 따라서 미는 감각적 사회. 개인적 사회를 잇는다. 이 매개 속에서 바로 미는 현실을 성찰한다. 인식,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어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야누스와 함께 ‘수용미학’을 정초한 볼프강 이저는
작품의 의미란 수용자의 해석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수용자의 자의성을 강조한 측면도 있지만 작가만큼이나 독자도 작품
의 의미 형성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니까 작품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드러내고, 독자는 이 ‘빈자리’를 채우는 능동적 역할을 한다. 이런 불확정적 의미구조는 문학을 넘어 예술전반에 해당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다면, 이 영향력은 곧 작품의 호소력이면서 감상자가 만들어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속 깊은 곳엔 늘 시가 있다. 간결하고 맑은 것, 그래서 어떤 순정함이
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래서 좋은 글은 자신의 목소리와 타인의 목소리를 함께 담는다.

- 문학과 창작 2012년 여름호 김다명(시인) 201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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