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

2019.09.24 14:43

곽창선 조회 수:5

그리운 선생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곽창선

 

 

 

 

 나이가 들어가며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 일이 종종 있다. 돌이켜 봤을 때 잘 살아 왔다고 자부할 수가 없으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다. 벌써 추분이 지났다. 시원한 바람결 따라 모처럼 초립동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을 들르게 되었다. 고향마을의 예전 모습은 간데없었다. 사방으로 도로가 뚫리고 낯선 건물들이 즐비해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널따란 부지에 익산보석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전국 각지의 여심들을 유혹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지난 추억을 더듬어 어림짐작해 보지만 어릴 적 추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쉼터의자에서 눈을 감으니 어릴 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순간순간 스치는 추억 중 초등학교 2학년 가을학기에 잠시 3개월 동안 담임을 하시다가 홀연히 떠나신 선생님이 떠올랐다. 언제나 고독해 보였으며 무언가에 쫒기는 듯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피시던 선생님은 어느 날 홀연히 떠나신 뒤 지금껏 기억밖에 계셨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고마운 분이셨는데.

 

 6,25 때문에 조부모님이 사시는 익산 왕궁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 첫 수필작품 <진달래 필 때> 편에 소개된 마을로 5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농촌 마을이었다, 집은 비록 작은 초가였지만 대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뒤뜰을 감싸고 울타리에 기대고 선 능금과 석류가 무르익을 때면 이웃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집 앞 좁은 농로를 지나면 큰 신작로 따라 이곳저곳 어디든지 갈수 있는 마을이었다. 약간 경사진 곳에 아담한 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앞에는 학용품과 군것질을 파는 문구점과 딱총놀이의 소품(탄환)이던 100년쯤 된 팽나무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초 국어시간이 싫었다. 한글을 터득하지 못해서였다. 거의 매일 아이들과 쏘다니다 해질 무렵에 집에 오면 저녁을 먹기가 바쁘게 쓰러져 자고나면 아침이었다. 자다가 바지에 실수하여 이웃집 순이네 집에 소금을 얻으러가는 수모도 여러 번 겪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순이가 자주 놀리기도 했었다. 항상 책보는 풀어 보지도 못한 채 다시 둘러메고 등교하기 일쑤였다.

 

 19549월, 첫 아침조회 시간에 새로 오신 선생님 소개가 있었다. 담임으로 듬직한 체구의 미남형 젊은 선생님을 소개하셨다. 풍금을 즐기시던 여 선생님의 여린 모습에서 바뀐 우람한 체구의 선생님에게 우리는 압도되었다. 개구쟁이 돌이, 지각대장 준이도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했고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결 조용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별 탈 없이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국어시간마다 책을 소리 내서 읽었다. 서로 나요 나요 외치며 손을 들고 나서는 아이들 틈에 기죽어 지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기야 당시 책을 못 읽는 아이가 절반이 넘었으니 중간은 가는 편이었다. 놀이에 빠져 책을 볼 겨를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국어시간이 싫어서 아프다고 꾀병을 칭하다가 할머니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갔다. 혼쭐이 날 줄 알았는데 방과후 영식이집에 갔다가 학교에 꼭 오라는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다.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친구들과 딱치기놀이를 마다하고 학교로 갔다,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평행봉을 멋지게 즐기고 계셨다. 참 멋스러웠다.

 

  그 뒤 선생님의 친절에 빠진 나는 차츰 혈육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부모 곁을 떠나 외로움을 타던 나와 묘한 수심이 흐르던 선생님과 쉽게 조합을 이루게 되었다. 선생님은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며 홀로 책읽기나 운동으로 소일하셨다. 방과후나 휴일에도 언제나 혼자였다.

 

 종종 우리는 동네어귀 산에 올라 노래도 부르며 시원한 곳에 자리하면 곧잘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이솝우화나 홍길동전이 생각난다. 그리고 틈이 나면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며 서두르곤 하셨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으나 반복해서 따라 읽다가 귀가 열리고 글자가 눈에 들어 왔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다행히 암기력은 좋은 편이라 집에서도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곤 했었다. 차츰 재미가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책 읽는 재미가 붙었다. 선생님은 국어시간에 "영식아,책 읽어봐!" 하시면 얼떨결에 한 단원을 읽었다. 선생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흘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살짝 쥐어 주신 박하사탕의 향기가 참 좋았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가을걷이를 마무리할 때쯤, 잘 익은 능금과 석류를 챙겨 선생님이 계신 숙직실에 갔었다. 공터에 낮선 남자 두 명이 선생님을 앞세우고 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썰렁한 분위기에 선생님 얼굴이 어두웠다. 쓸쓸한 미소로  "영식아, 공부 열심히 해라!"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뽀얀 먼지를 따라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풍문에 따르면 군대 가지 않아서 즉시 입영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한글을 익힐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고마운 마음에 모교에 가서 학적부를 열람해 보니 선생님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연유를 알아보니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늦게 찾은 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2019,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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