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녕하세요

2020.12.07 23:01

김성은 조회 수:8

할머니, 안녕하세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열 살짜리 딸 유주가 온라인 품세심사에 도전하는 10월  어느 토요일 정오를 앞둔 지금, 이곳은 러닝머신과 다이어트 바이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컴퓨터방입니다.

 금요일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지리산 천왕봉을 정복하고 돌아온 남편의 어깨에 무통침을 놓아 주고 어렵사리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평일에는 방해받지 않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 마음만 졸이는 42세 김성은이 할머니가 된 당신을 조심스럽게 상상해 봅니다.

 퇴직은 하셨고, 몸은 건강하십니까? 아프신 데 없이 평안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전히 익산에 살고 계시나요? 당신 직장이 맹아학교 하나로 끝이었는지 궁금합니다. 42세 김성은은 내심 이료교사 말고 독서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거든요. 글을 쓰고 향기로운 커피향을 나눌 수 있는 북마사지카페의 주인장을 꿈꾸며 행복해 하는 워킹맘은 분주하게 흘러간 한 주를 익숙하게 마감하는 중입니다.

  금주에는 2학기 1차 고사가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서동공원으로 현장학습도 다녀왔어요코로나 19로 모든 교외 활동이 철저한 방역 관리하에 소규모로 진행되었습니다뉴스에서는 연일 독감백신에 대한 불안한 보도가 이어집니다. 접종 후 사망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비해야 하는지 아직 명확한 정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에요2021학년도 신입생 면접이 있었습니다.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할 것 같이 선한 느낌의 20대 남학생도 있고, 출산 중 의료 사고로 영구 장애를 입게 된 젊은 엄마 신입생도 있네요. 선택의 여지 없이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린 피해자들에게 재활의 장이 되어 주는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10년 전에 졸업한 제자들의 식사 대접을 받았어요저를 보고 깜짝 놀라며 오 원장이 말했습니다.

 “우리 선생님, 이제는 아줌마 다 되셨네. 나 학교 다닐 때는 아가씨였는데….”

 10년 만에 만난 제자였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지요. 외모도, 언변도 그 시절과는 사뭇 달라진 제 모습이 실감 났습니다. 중도 실명한 남편들을 지성으로 보필하며 자리를 함께한 제자들의 아내들과도 반가운 웃음을 나누었어요. 42세 김성은은 졸업한 제자들의 아내와 소주잔을 부딪치며 그녀들의 막막한 눈물을 짐작했습니다.

 유주는 잘 키우셨습니까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일관되게 얘기합니다. 이모들은 율동과 노래를 잘 하고 동생들을 살갑게 챙기는 유주에게 공립 유치원 선생님이 딱이라고 권유하는데, 성인이 된 유주는 어떤 직업을 가졌나요? 여전히 씩씩하고 쾌활하겠지요?

 숙녀가 된 유주라, 사실 좀 웃깁니다. 열 살인데 아직도 목욕하며 엉덩이를 사정없이 흔들고, 태권도에서 다리 찢기 실력을 다지며 찔찔 울다가도 금세 발차기를 뽐내는 아들 같은 유주라서 그런가 봅니다. 어제는 도장에서 띠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 사범님께 띠압 당했다며 도복만 입고 올라왔지 뭐에요? ‘폰압도 아니고 띠압이 뭐야?’ 투덜거리면서도 천진난만하게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쪼그만 녀석이 무슨 스트레스가 있다고 매운맛이 당긴답니까? 중독성이 있다면서 우유에 씻은 떡볶이와 라면을 즐기시는 초등학생께서는 여전히 빨간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지금처럼 맑고 깨끗한 심성으로 건강한 나날을 만들어가고 있기를 42세 엄마는 소망합니다. 퇴직하니까 홀가분하신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40대 김성은은 60대가 되신 당신께 무조건 뜨거운 박수부터 보냅니다. 부군께서는 70대를 바라보는 연세가 되셨겠네요. 49세 남편은 운동에 열심입니다. 동료들과 지리산도 다녀오고, 혼자서 모악산이며 한라산도 틈틈이 오릅니다. 딸과 아내를 뒤에 태우고 텐덤 바이크도 부지런히 탑니다. 서로의 운명을 나누어 가진 두 사람이 함께 웃고 울고 원망하고 화해하고 이해했던 날들이 13년만큼 쌓였습니다. 앞으로 이 세월보다 곱절은 더 긴 시간을 함께할 테지요?

 당신에게는 평생 단 한 사람으로 남을 남자가 지금 거실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당신은 넉넉하게 이해하시지요? 저 남자에게도 같은 페이스로 운동하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음을, 기동력 있게 움직이며 나란히 자유로울 수 있는 벗이 필요했음을….

 할아버지가 된 그를 아껴주십시오. 내가 갖지 못한 그의 자유를 어지간히 시샘했습니다. 눈 먼 아내에게 가을을 알려주고 싶어 라이딩 중에 코스모스를 만져볼 수 있게 해준 남자라서, 아내가 좋아하는 안주에 맛있는 콩나물국까지 끓여 주는 남자라서, 자기 인생을 통째로 내게 준 남자라서 더 바라는 것이 많았나 봅니다.

 3학년 유주에게는 수학을 가르쳐 주는 똑똑한 아빠요, 요리 솜씨 뛰어난 만능 잔소리꾼인데, 설마 숙녀 유주에게까지 잔소리 폭탄을 난사하는 할아버지는 아니겠지요? 두 분 모두 명예롭게 은퇴하시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40대 남편 소원대로 고향 안동에 터를 잡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매일 티격태격하겠지요? 두 양반이 건강하게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40대 김성은은 당신이 그때도 글을 쓰고 계셨으면 합니다. 책을 한 8권쯤 출간하신 중견 작가가 되어 계시면 더 멋질 것 같고요. 숙녀 유주 남자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외모를 관리하셨으면, 무엇보다 아프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당장이라도 무거운 이 엉덩이를 그냥 둬서는 안 될 텐데요.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49세 남편을 본받아 집에서라도 빈틈없이 걷고 굴리고 매달려보겠습니다. 그래야 허리가 꼿꼿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토록 바라던 유럽 여행은 다녀오셨습니까? 되도록 환갑이 되기 전에 한 살이라도 젊은 감각으로 다녀오시길 권합니다40대에게도 여성호르몬이 동난 것 같은 건조한 마음이 될 때가 있음을 고려할 때 당신의 60, 70대 관점은 어디를 향하여 관계와 환경을 이해하실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해석하고 포착하는 순간들이 아름다웠으면 합니다. 젊은 혈기로 No를 외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를 연마하는 중입니다. 당신은 노련하게 거절도 하시고 깔끔하되 정중한 No에도 유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후회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더 사랑하지 못했다고, 표현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울 일 없이 끝까지 쏟아보겠습니다조금 어색해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살가움이 자연스러워질 날도 오겠지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당신과 기쁘게 만나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겠습니다. 42세 김성은은 내 긍정과 부정의 감정을 모두 정제된 언어로 순화하여 말로 표현하기 연습을 약속드릴게요.

 

 60대 김성은 할머니께서는 꼭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꼭 8권 출간 이력을 가진 중견 작가가 되어 계시기로 말이에요. 존경하는 장영희 작가처럼 소탈하면서도 깊은 통찰이 묻어나는, 슬픈 마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작은 불씨 같은 글이면 충분합니다

  16년간 주일마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았던 북일교회 담임 목사님이 은퇴를 준비 중에 계십니다. 미련 없이 충성한 세월이었기에 떠나는 길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시는 목자님이세요. 화끈하게 사랑하고, 사납게 순종하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우리 목사님 스타일로 제 50대를, 60대를 맞이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먼 훗날 당신을 만날 때까지 미숙한 40대 김성은이 비틀거릴지언정 포기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부디 응원해 주십시오.

 당신의 심장이 뭉근한 불꽃처럼 붉은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두근거리는 설렘이 찰나의 순간이어도 생생하게 전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깊어진 시선으로 그윽하게 감동하고 감사하겠노라 약속해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애에 매몰되어 상처 내고 밀어냈던 스스로에게 미안해서라도 오롯이 사랑하겠습니다. 기필코 사랑에 매진하겠습니다. 당신과 가족들 모두가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 10. 25. 오후 1029분)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07 장마는 떠나고 김재교 2020.12.08 3
» 할머니, 안녕하세요 김성은 2020.12.07 8
2105 올림픽 탁구 금메달 이야기 김택수 2020.12.07 7
2104 비비정 예찬 구연식 2020.12.06 3
2103 아! 테스 형 송재소 2020.12.06 7
2102 라오스 여행기(2) 신팔복 2020.12.06 14
2101 잠 못 이루는 밤 곽창선 2020.12.05 7
2100 항상 쫓기면서 사는 사람들 이인철 2020.12.05 8
2099 이끼 최상섭 2020.12.05 9
2098 12월의 기도 최상섭 2020.12.05 4
2097 나는 수필가 김세명 2020.12.05 3
2096 물거품 하광호 2020.12.05 1
2095 나무난로 앞에서 윤근택 2020.12.05 8
2094 나비의 인내심 두루미 2020.12.04 5
2093 고마운 필요악 백남인 2020.12.04 4
2092 섹스가 보약인 열 가지 이유 하나로 2020.12.04 33
2091 반성문 쓰는 아버지 김학 2020.12.03 3
2090 라오스 여행기(1) 신팔복 2020.12.03 3
2089 신의 묘수, 7진법 구연식 2020.12.03 3
2088 먹시감 산효선 2020.12.0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