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두부

2008.03.04 15:48

신영철 조회 수:49



                                두부

                                                            신영철
                                  1

  환기가 시원치 않은 부엌은 콩 물에서 나오는 비린내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미국 땅에서 결코 미국적이지 않은 그런 환경과 느낌은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아궁이 앞에 쪼그린 채 불을 뒤적이던 김칠규는 숨을 돌리기 위해 부엌 문밖으로 나섰다. 나온 김에 시원찮은 허리를 펴 툭툭 쳐가며 저 스스로 신이 난 가을 샌개브리얼 산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년 시월이 되면 이 산맥은 한국처럼 단풍이 절정을 이뤘다.  

  황금 찾아 포장마차를 타고 미 대륙을 횡단한 사람들이 몰린 서부 캘리포니아의 애칭은 골드스테이트, 즉 황금의 땅이다. 그 애칭처럼 늦가을이 되면 단풍이 누렇게 물들면서 산맥은 정말 황금 색 땅으로 변했다.
  불과 백년 전만 하더라도 샌게이브리얼 산맥이 감싸고 있는 이 땅은 인디언의 땅이었다. 본디의 땅임자는 어느 사이 종적도 없고, 골드러시를 타고 밀려 든 백인들만의 땅이 된지 오래였다. 금광 타운을 형성하며 땅임자가 바뀌었던 곳이 김칠규가 사는 곳이었는데, 더 이상 금이 나오지 않게 되자 이곳은 다시 산간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말이 휴양지지 워낙 깊은 산중이라 자본의 유입이 더뎌 지금도 이 산골 마을은 아주 한적했다. 사람 팔자는 모른다지만 땅 팔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혀 새로운 얼굴 누런 황인종 김칠규가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찾아 든 곳이니까. 땅값이 싼 탓도 있었으나 김칠규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산골을 닮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물론 살가운 김칠규 고향 경상도의 낮은 산은 아니었으나 샌게이브리얼 산맥 산기슭엔 푸른 나무숲이 있었고 맑은 물이 흘렀다.

  미국인과 국제결혼을 한 딸의 초청으로 김칠규 부부가 육년 전 엘에이로 이민 왔을 때, 이주자 모두 처음엔 그러하듯 그들도 미국을 못 견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궁벽한 산골출신인 이들에게 미국문화는 넘을 수 없는 완강한 벽이었다. 경상도 산골 출신 김칠규에게는 한국에 살 때도 서울이라는 도시조차 생경했는데 미국이라니……. 문화의 장벽은 한인 타운이라는 거대한 커뮤니티가 있으므로 그런 대로 참을 만했으나, 그들 부부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자연환경의 변화였다.
  김칠규가 평생 등 기대고 살아왔던 고향의 그런 산이 엘에이에는 없었다. 이민생활 적응에 힘들어하는 부모를 위해 효녀인 딸은 가끔 그들을 태우고 라스베가스라든가 데스벨리 같은 관광지로 나들이를 가곤 했다. 그렇지만 김칠규와 그의 처가 볼 수 있는 것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황갈색 사막뿐이었다. 듬성듬성 난 풀도 말라비틀어진 누르스름한 빛깔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바라만 보아도 넉넉했고 풍요를 상징했던 들판의 누르스름과는 느낌부터가 영 달랐다. 도저히 정이 붙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었으므로 김칠규 부부의 삶은 허공에 뜬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어쩌다 만난 곳이 지금 이 마을이었다. 이곳엔 사막의 색감이 아닌 산이 바로 코앞에 있었고 푸른 숲이 있었다. 이 산맥의 봉우리들 중 덩치가 가장 큰 마운틴 발디(baldy)가 바로 마을 앞에 있었다. 산의 높이가 무려10,064피트나 되었다. 김칠규에게 익숙한 미터법으로 치면 3000미터가 넘는 높이였다. 김칠규가 고집을 피워 어렵사리 마련한 집은 그 발디 산 등산로 입구에 있었다.

  엘에이 한인사회가 커지고 자리를 잡으면서 삶이 팍팍했던 때는 꿈도 못 꾸었을 취미생활 붐이 일었다. 여가 선용의 방법 중 산을 찾는 등산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마운틴 발디는 서울 북한산처럼 사랑받는 산이었다.
  김칠규는 이곳 산 아래에 마련한 1에이커 남짓한 농장에서 평생 손에 익은 농사를 지었다. 오리도 기르고 철망을 치고 멧돼지도 길렀다. 그러던 끝에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우연의 일치였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온 사람이 반가운 한국 사람이라는 것 하나로, 김칠규가 후덕한 인심을 보인 것이 시작이었다. 직접 자신의 농장에서 재배한 상추나 씀바귀 등을 곁 드려 내는 소위 백퍼센트 자연식은 자연히 한인 타운에 입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인기 있는 품목이 손두부였다. 순전히 한국 재래식으로 가마솥에서 갓 만들어 낸 손두부와 순두부는 등산객의 입 소문을 거쳐 한인 타운에도 두루 소문이 났다. 두부 맛도 좋았으나 한인들은 잊혀 져 가는 고향의 풍경이 미국 산골에 재현 된 것에 신기해했다. 따라서 등산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입소문을 듣고 주말이면 김칠규에게 일부러 찾아왔다.
  김칠규가 농사를 시작했을 땐 고향에서 손에 익은 채소와 과일을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았으나 이젠 주말 등산객 받는 것이 벌이가 더 좋았다. 오지에 사는 것을 걱정하던 딸도 제법 자리를 잡은 김칠규를 보며 기뻐했다. '김장사 고향집'으로 농장과 어울리는 작은 간판을 문 앞에 걸어 준 것도 산골 출신 딸의 배려였다.  

  김칠규가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잘생긴 세쿼이아 숲 넘어 발디 산은 우뚝했다. 한국과 미국의 땅은 달랐지만 산만은 많은 부분에서 같았다. 소싯적부터 평생 보아왔어도 김칠규에게는 질리지 않는 게 산이었다. 다만 발디 산은 고도가 높은 탓인지 정상부가 민 대머리를 닮았지만 김칠규 고향 뒷산 영취산은 숲과 억새가 어우러진 푸른 산이었다. 영취산 정상엔 독수리 부리 닮은 바위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꿈틀대며 흐르는 영취산 산줄기는 마치 거대한 독수리가 양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이었다. 그런 영취산도 지금쯤 흡사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단풍이 제철일 것이다.
  영취산 능선이 날개처럼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계곡 아래쪽으로 통도사가 있었다. 통도사는 불보 대찰이라 불릴 만큼 위용이 대단했다. 김칠규의 집 앞쪽 송림이 총총한 작은 능선을 경계로 안쪽은 모두 통도사 소유의 땅이었다. 통도사 경내에는 유난히 늘씬한 소나무가 많았는데 육이오 전란이 끝날 즈음 횡행했던 도벌에서도 살아남은 천연의 송림 숲이었다. 벌목과 도벌의 살벌한 세월 속에서, 절 집 스님 네들이 나무를 보호한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많이 떠돌았다. 그렇게 청정 비구들의 지켜 낸 늘씬한 소나무들이 장관의 숲을 이루고 있었고 쭉쭉 치오른 소나무들은, 사람들이 절 집을 즐겨 찾는 풍경 중 하나였을 터였다.

  그곳이 김칠규가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살았던 안태 고향이었다. 큰 사찰답게 참배객들로 통도사는 늘 붐볐는데 그러나 김칠규가 살았던 돌배골은 달랐다. 일부러 찾아오기 전에는 마을이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품 너른 산골짝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돌배골에는 돌들이 지천이었다. 원래 마을 이름은 돌맹이를 가르키는 경상도 방언인 돌배이골이었다. 돌배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돌배골로 된 것은, 영취산 아래 첫 동네가 법정동으로 분류 기록되면서부터였다.  
  물끄러미 발디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칠규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고 콩 물이 끓기 시작한 아궁이에 장작 몇 개를 더 밀어 넣었다. 콩이 끓는 비릿한 수증기는 연기와 함께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럭저럭 두부를 완성시킬 때쯤이면 오후가 될 것이고 땀 흘린 등산객들이 찾아 올 시간이었다. 발디 산 정상에서 왼쪽 능선을 타고 하산하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김칠규의 농장에서 보이는 것은 집이 등산로 입구에 자리한 덕분이겠다.
  격렬한 등산의 성취감과 적당한 허기와 갈증을 풀기에 김칠규의 순두부와 두부, 그리고 직접 담은 동동주는 퍽 잘 어울렸다.
  김칠규 부부에게 손 맛 좋은 두부 만드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은 무덤으로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김칠규의 어머니다. 어쩌다 인연 없는 미국까지 온 김칠규였지만 그 두부의 역사는 한국에서부터 따지자면 벌써 오십년의 세월을 훌쩍 넘은 것이었다.
  어머니 시절의 고향 돌배골은 전기는커녕 흔한 간이 상수도 시설도 없던 궁벽한 땅이었다. 김칠규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면 머리에 이고 소나무 숲 길 따라 통도사 공양간에 대놓고 공급했다. 남편이 짓는 산비탈 다락 논농사 가지고는 김칠규를 비롯해 아래로 오종종 낳은 사형제를 키워 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집안 살림에 보태려 시작한 것이, 맛 좋은 두부가 탄생 된 배경이었다. 그런 대 물림한 두부가 태평양을 건넜고 김칠규 부부에게 어느 사이 딸보다 더 든든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누구 안 계십니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궁이 속 장작을 뒤집는 김칠규의 귀에도 그런 기척이 들렸다. 등산객이 하산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누굴까 하며 몸을 일으키다 김칠규는 허리가 뜨끔거려 다시 주저앉았다. 일어서는 대신 그는 부엌 뒤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봉술이 엄마. 누가 왔는가베. 밖에 퍼떡 나가 봐라."
  콩 물 받칠 삼베를 씻느라 수돗물을 받던 그의 아내가 일어서는 모양이다. 김칠규의 허리 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젊은 날 몸을 혹사시킨 탓도 있었으나, 어머니가 담가 놓은 동동주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시간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문가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내가 부엌의 김칠규에게 다가왔다.
  "저, 엘에이 한국 테레비 방송국에서 왔닥카네요. 우리 두부 취잰가 뭐를 하려고요."
  "뭐라꼬? 그 흔한 두부를 찍으러 여까지 왔다고? 허 참, 그게 대체 무슨 말이고."
  두부가 몸에 좋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기라도 하듯, 뚱뚱한 몸집의 아내는 그 허연 얼굴에 무엇인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사 마 모르겠구마. 당신이 나와 보이소."
  김칠규는 허리에 손을 댄 채 조심스레 일어서 부엌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뜰엔 서너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커다란 방송국 카메라를 든 사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아가씨. 그리고 카메라를 고정시킬 삼각대를 든 사람도 있었는데 그중 운동모자를 쓴 마른 체구의 사내가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전화했던 한인방송국의 박영호 프로듀서라고 합니다."
  김칠규는 장작을 때느라 지저분해진 손으로 엉거주춤 명함을 받았다.
  "박 프로디... 좌우간 전화를 했다고요? 아아, 그랬지요. 요즘 통 정신이 없어서……. 그란데 내사 마, 그런 거 안한다꼬 했을낀데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칠규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를 놓칠세라 피디는 얼른 말을 이었다. 프로듀서라는 발음이 잘 안 되는 걸 보면 이 사람은 정말 토종 한국 시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듀서의 약칭이 피디입니다. 그냥 박 피디로 불러 주면됩니다.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협조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생께서 오려면 오라고 했으니 이렇게 온 거지요."
  "그건……"
  "선생님 집 두부가 한인 타운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한국 어머니로부터 대물림한 솜씨라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 고향의 향기에서 취재하기로 결정 된 겁니다. 이 방송은 내일 모래 저녁에 나갑니다."
  "아 예, 그렇습니꺼. 근데 여 까지 고생시럽고로 뭐 할라꼬 왔습니꺼?. 두부 만드는 기, 무슨 대단한  일 이라꼬요."
  "하하. 공장에서 만드는 두부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입 소문이 자자한 김장사 손 두부니 일부러 찾아왔지요. 좌우지간 김 선생님, 오늘 촬영 협조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란데…… 내는 지금 많이 바쁘이 다음에 하면 안 되겠읍니꺼?"
  명함을 든 손으로 손사래까지 쳐가며 김칠규는 피디에게 말했다. 그 말이 놀랍다는 듯 이내 박 피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 선생. 분명히 일요일인 오늘 방문한다고 전화로 말씀 드렸고, 그쪽에서 그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 그러니까 그건, 그쪽에서 자꾸 온 닥 하기에 맘대로 하라는 말이었지 예."
  김칠규는 여전히 떫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산골출신 다운 인정 때문에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은 사실 끈질기게 설득하려는 피디 때문이었다. 작심을 하고 김칠규를 설득하려는 오랜 통화가 지겨워져,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전화를 끊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박 피디는 그런 김칠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은 방송에 못 나와 안달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매스미디어의 위력을 모르는 것 같았다. 비록 저녁 시간만 방송되는 한인방송이지만 큰돈을 주어도 홍보하지 못 할 절호의 기회를 거절하다니. 난감한 표정의 박 피디를 지켜보던 여자가 거들고 나섰다.
  "아휴, 김 선생님. 전 리포터인데요, 이 프로그램 나가면 손님이 엄청 올 거예요. 인기 프로거든요. 그럼 사장님 장사에도 좋지 않겠어요?"
  예쁜데도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그때서야  김칠규는 그 아가씨 얼굴을 기억해 내었다. 마누라와 함께 한인 타운에서 한 보따리씩 빌려다 보는 한국프로그램 비디오에서 가끔 본 여자라는 걸.
  "그건 그렇고. 그란데, 박 피디 선상님은 우찌 우리 집을 알고 찾아 오셨능교?"
  미인계라도 쓸 요량으로 함박웃음을 머금고 말을 붙이는 리포터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김칠규는 박 피디를 향 해 물었다.
  "간단하던데요. 한인 타운에 소문 자자한 김장사 두부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등산 다니는 사람들이 잘 알려 주더군요. 그런데 김 선생님은 예전엔 한국에서 장사 소리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김칠규를 장사로 보기엔 턱도 없었다. 농사일에 투박해진 손등하며 마른 체격은 한국 농촌의 가난한 농부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김칠규의 거절은 의례적으로 한번쯤 빼보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박 피디는 직감으로 그것을 알았다. 피디는 애가 탔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스텝들을 동원하여 바쁜 시간을 쪼개 찾아 온 이상 계획된 촬영을 포기하고 갈 수는 없었다. 중요한 그림이 될 등산객을 찍으려면 일요일뿐이었고, 그래서 팀을 휴일 날 쉬지도 못하게 동원시킨 취재인데 그냥 내려 갈 일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박 피디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인 고향의 향기 시간대에, 다른 것으로 대체할 영상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주, 아이디어 회의에서 김장사 순두부 건이 결정 된 것도 박 피디 자신 때문이었다. 방송국의 등산 팀으로부터 김칠규의 두부 이야기를 듣고 소위 느낌이 왔던 것이다. 팍팍한 이민 생활에서 건강한 땀을 흘리고 산행 뒤풀이로 이곳에 모인 한인들. 나무 울울창창한 자연이야 원래 그대로 찍어도 그림이 될 것 같았고, 투박한 김장사 역시 풋풋한 한국의 시골 풍경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될 성싶었다. 거기에 한국에서부터 대를 물려 온 두부 집이라……. 그럭저럭 재미있는 한 꼭지 프로그램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피디가 전화를 걸었을 때 김칠규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꾸 촬영을 종용하는 전화에 김칠규가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전화를 끊은 것도 맞았다. 그걸 마지못해 반승낙을 한 거라고 피디는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미리 통보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이제와 서 거절이라니, 박 피디는 난감해 졌다. 눈치 빠른 리포터가 다시 피디를 거들고 나섰다.
  "김 선생님. 돈 들여 하는 광고 보다 본 프로그램에서 정식으로 다루는 것은 굉장한 거예요. 남들은 줄을 서도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해요. 우리 엘에이에 이런 게 있다는 한인소사이어티 자랑도 되고요. 잘만 찍으면 한국에도 방송될지 몰라요."
  리포터의 한국에 방송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김칠규의 눈이 갑자기 황소처럼 커졌다.
  "뭐라꼬요? 내가, 본국 방송을 탈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이고, 내는 정말 못 합니더. 정말 나중에……할랍니더."
  한국에 방송된다는 리포터의 말에 화들짝 놀란 김칠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왜 자꾸 거절만 하십니까. 한인사회에 잊고 있는 고향의 향기를 보여주는 좋은 방향의 프로그램인데요. 문명화 된 미국에서도 우리 전통을 고집하며 가마솥으로 두부를 만드는 고집스러움. 방송 나가면 미국에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나, 아마 많은 분들이 놀랄 것입니다. 그냥 하시는 일만 자연스레 하시면 됩니다. 찍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피디와 리포터가 번갈아 가며 광고와 본 방송의 차이를, 이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공익성, 장사에의 도움 등 아무리 설명해도 김칠규는 멀뚱히 발디 정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한쪽에 비켜서서 이들의 대화를 듣던 김칠규의 아내가 짐짓 방송국의 편을 들고 나섰다. 장사가 잘 된다는 말이 주효 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구마. 부러 여그까지 오시고. 장사 잘 된다카믄 도와야제. 우리가 우찌하믄 되겠능교?"  
  그 말끝에 박 피디는 겨우 안도의 미소를 띠웠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김칠규가 갑자기 마누라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랄하고 있구마. 장사가 잘 될지 망할지, 니가 우찌 아노? 아이고, 고마 이거 콩 물 넘치겠네."
  김칠규는 아내에게 벌컥 화를 내더니 도망치듯 황급히 부엌으로 가버렸다.    부인의 묵시적 동의를 알겠다는 듯 눈치 빠른 카메라맨이 냉큼 카메라를 들고 김칠규를 따라 나섰다.

  카메라가 바빠졌다. 바빠서 그런지 다행이 김칠규는 통 말이 없었다. 커다란 가마솥에 설설 끓는 콩 물을 젓는 모습부터 그것을 삼베 주머니에 퍼 넣는 과정. 그 삼베 주머니에서 걸러진 콩 물을 다시 가마솥에 넣고 끊이면서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드는 순서를 카메라는 열심히 찍었다. 김칠규는 그런 부산한 움직임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두부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두부 틀에 응고가 될 콩 물을 퍼 넣느라고 김칠규 얼굴에 땀이 솟았다. 몇 번인가 리포터가 환한 조명을 켜고 말을 시켰지만, 김칠규는 대답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런 김칠규를 난감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피디가 리포터에게 부인 쪽으로 눈치를 줬다.
  "역시 맛은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대로 이렇게 재래식으로 만드니 엘에이에서 유명한 두부가 된 것 같군요. 그런데 아주머니, 두부 맛에 비결이 있다면 어떤 걸 들 수 있나요?"
  김칠규의 노골적인 비협조에 얼굴에 웃음 띠우기도 힘들었으나, 그래도 생글생글 웃는 리포터가 물었다. 뜨거운 콩 물을 받느라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 김칠규의 아내가 말을 받았다.
  "뭐- 특별한 기 있겠능교. 그런 건 읍고요, 우리 집 물이 워낙 좋은기라요. 그 물로 콩 물을 잘 끓여 내고 불 때 잘 맞추고 하믄 되는기라요."
  박 피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특별한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평범한 인터뷰는 곤란했다. 그런 수작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칠규는 두부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부 만드는 일은 고단한 일이었다. 예전의 김장사 소리들을 때라면 일도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김칠규에겐 이 작업이 힘에 붙이는 일이었다.
  텁텁한 습기가 가득한 좁은 부엌에서 더 찍을 것은 없었다. 두부 만드는 일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삼베 주머니 속에 남은 콩비지를 꺼내는 김칠규를 뒤로하고 일행은 협조적인 부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유난히 낭랑한 리포터의 달뜬 목소리가 마당에 가득했다.
  "콩은 예전부터 밭에서 나는 고기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요, 콩에는 단백질, 인지질 외에 몸에 필요한 당분, 조섬유, 칼슘, 인, 비타민 B1, B2 등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양을 골고루 충족시켜 주는 콩으로 만드는 맛있는 두부. 한국에서 시작 된 그 두부를 대를 이어 미국에서도 만드는 분을 만나겠습니다."
  뜨거운 콩 물 습기 탓인지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것에 당황한 때문인지, 김칠규의 아내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앞서 그림으로 두부 만드는 과정을 보았는데요 두부 만드는 일이 알고 보니 참 복잡하네요. 언제부터 두부를 만드셨어요?."
  "그기……. 미국에서요? 한국에서요? 내가요? 아님 어무이가요."
  "한국에 있을 때 시어머님으로부터 솜씨를 전수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때부터 두부 만든 것이 몇 년이나 되셨나요?"
  "보자, 그러니께 내가 이 집에 시집 온지 꼭 사십년이고 이민 온지 육년 째니께 꽤 되었구만요."
  "어머나, 그렇게 오래 되었군요. 그런데 두부 만드는 콩은 직접 재배를 하시나요?"
  "어데요, 애 아빠가 몸이 시원치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응께 마켓에서 사다 쓰는디요."
  "그렇군요. 콩은 당연히 한국산 콩이겠지요?"
  "아입니더. 우리도 조선 콩을 쓸락 했지만두 워낙 비싸서요. 미국 콩으로 맹그는디요."
  그 때였다. 캇!이란 고함 소리가 박 피디 입에서 나온 것은. 그 소리에 카메라맨은 촬영을 멈추었다. 피디는 리포터에게 큰 소리로 질책을 했다.
  "이것 봐, 전통 두부는 당연히 국산 콩이라고 시청자들이 생각 할 건데 그런 질문을 쓸데없이 뭐 하러 해? 그것 빼고 다시."
  리포터는 다소 과장된 대답을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러나 매번 김칠규의 아내는 우직스러우리만큼 솔직하게 말 할 뿐이었다. 김칠규도 그렇지만 아내 역시 미디어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피디는 콩의 국적을 떠나 주인의 손맛이 특별하다는 걸 강조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아무리 리포터가 특별한 말을 유도해 내려 해도, 김칠규 아내는 콩을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든다거나 콩물이 솥바닥에 들어붙지 않게 잘 저어 준다는 비결 아닌 비결을 말할 뿐이었다. 이 유명한 두부가 미국 콩을 쓰는 것부터, 다른 두부의 제조 방법과 별 차이가 없는 것에 대해 피디는 속이 탔다.
  난처해진 리포터는 김칠규의 아내에게 특별한 말을 끄집어내려 유도했으나 그 시도 역시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콩을 열 두 시간 정도 물에 불린 다음, 콩을 갈아서 콩 원액을 가마솥에 넣어 펄펄 끓인다거나, 한 시간 동안 계속 저어주어야 한다는 두부 제조법 외에, 더 이상 부인의 입에서 흥미를 끌만한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박 피디가 리포터에게 대사 연습을 시켰다.
  "이 발디 산이 얼마나 높아. 백두산보다 높잖아. 신령스러우면서도 무공해이기도 하고. 그런 신령한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무공해 텃밭에서 정성껏 가꾼 콩이 만난 것 아냐?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 떠놓고 부엌 지키는 조앙신에게 치성을 드렸던 김칠규씨의 어머님의 정성이 그려지잖아. 그렇게 대물림한 솜씨를 미국에서도 순박하게 재현해 내며 옛 제조 방법을 고집하는 시골 전통의……."
  그때, 캇! 이란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놀란 일행이 돌아보니 소리를 친 사람은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있는 김칠규였다. 금시라도 달려 들것 같은 표정으로 김칠규는 소리쳤다.
  "고마, 이제 일 없응께 퍼덕 이 집에서 썩 나가시오. 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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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하게 김이 나는 두부와 동동주를 놓고 박 피디와 김칠규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촬영협조를 더 이상하지 않겠다는 김칠규를 설득하기 위해 박 피디가 만든 술판이었다.
  대낮부터 동동주를 벌컥 벌컥 마셔대는 김칠규가 불안한지 마누라는 술상을 차려 놓고 냉큼 사라졌다. 촬영을 나가다 보면 숱한 사람들을 만나게 마련이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생각 같아선 김칠규의 주장대로 박 피디는 그냥 철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에 보고하고 출장비와 방송 자재까지 챙겨 온 상황에 그럴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방송 시간까지 정해진 마당에 후퇴는 안 될 말이었다. 그리고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 그림도 찍어야 하고 그들 인터뷰도 해야 했다. 김칠규 처의 동문서답 인터뷰는 편집으로 처리하면 어찌 되겠지만, 어쨌거나 나머지 촬영을 위해서 김칠규의 협조는 필수였다.
  "봉술이 엄마! 여그 술 더 가지고 온 나."
  창문 밖을 향해 김칠규는 소리를 질렀다. 술을 끊었다는 김칠규에게 억지로 술을 권한 것도 역시 피디였다. 우리 팀도 출출한 참이니 두부를 팔아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판을 만든 것은 그런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술을 끊었다는 김칠규는 두부엔 손도 대지 않고 씩씩거리며 술만 마셨다. 그런 김칠규를 달래기 위하여 박 피디는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김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촬영 중지를 뜻하는 캇!이라는 말은 어디서 아셨습니까?"
  "와요. 내가 그깟 것을 모를 줄 알고요. 선상님요. 내는 그 캇!이란 말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 되었고, 미국까지 온 신세 조진 사람이라요."

  김칠규는 서서히 취해 갔다. 취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넋두리를 늘어 놨다. 낮술에 취해 급기야 눈물까지 훔쳐대던 김칠규는 자신의 과거로 침잠해 갔다.
  "한국에도 방송된다꼬요? 한인 타운 방송도 난 못허요. 다- 몬 하는 사연이 있는기라. 당신들도 내 마누라도 모르는 이바구라요…… 날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소? 지금은 그래도 두부 덕에 미국에서 밥줄이라도 뜨고 있는기 고마운 일이구마. 이 미국 땅에서 산골 촌놈이 뭐 먹고 살것소?"
  박 피디는 김칠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가난이 대물림 되는 기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 때는 지지리도 가난했심 더. 통도사에 딸린 땅 소작을 하고, 절 집 허드렛일 거들어 먹고 살던 한국의 돌배골이 내 안태 고향이라요. 내는 그 땅을 한 번도 벗어 난 적이 읍는기라요. 물론 미국 땅은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고. 이런 무식쟁이가 어느 날 한국에서 전국 방송을 탄기라요. 그 결과 내 팔자에 읍는 미국을 오게 된기고."
  뜬 금 없는 주정이었다. 박 피디는 그 말을 들어 줄 의무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내 심드렁해 했다. 미국 이민 일세대가 대게 그러하듯 흔한 뽕짝 조 신세타령이 틀림없었다. 스텝들은 직업상 그런 일들을 많이 겪어 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김칠규의 독백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눈물을 훌쩍거리는 횟수만큼, 동동주를 홀짝거리며 늘어놓는 김칠규의 이야기는 비극이었다. 아니 희극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말도 틀렸다. 아마 희극적 비극이라던가, 혹은 정 반대로 표현해야 이 경우에 맞는 말일 터였다.  

  돌배골에서 태어나고 늙어가고 있던 김칠규는 원래 힘이 장사였다.
  향기 나는 영취산 바람과, 철따라 나는 먹을거리와 땔거리를 찾아 산을 헤매던 세월이 김칠규를 장사로 만들었다. 해발 800미터, 통도사에서 제일 높은 문구암 까지 절 집 지을 대들보를 홀로 지고 오르내릴 만큼 힘이 좋았다. 또한 김칠규는 어머니가 만드는 두부 덕분인지 인동의 씨름판을 휩쓰는 장사였고 당연히 마을에선 그를 김장사로 불렀다.  
  "내도 소싯적엔 절절하게 공부를 하고 싶었심더.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통도사 땅 붙여 먹는 올 농사 가을걷이 끝내고 나면 중학교 보내 준닥하더니, 내년 농사 풍년이면 학교가라고 했심더. 결국 그 말 믿고 기다리던 삼 년에, 내는 국민학교 졸업으로 공부와 인연을 마감했꼬요."
  사춘기를 지나며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심난했지만 그래도 김칠규는 착하게 살았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겨우 마치고, 대목으로 불리는 으뜸 목수 밑에서 통도사 절 집 만드는 기술을 익히며 김칠규는 젊음을 보냈다. 김칠규가 일하고 있는 통도사의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천왕이 무서워서, 잔잔한 미소로 늘 김칠규를 반겨주는 부처님이 두려워서 그는 황소처럼 순박하고 착하게 살았다. 다만, 김칠규는 술을 일찍부터 배웠는데 어머니 솜씨로 빗은 동동주가 맛있어서, 지지리도 궁벽한 삶이 싫어서, 초등학교 동기생들 대처로 나가 잘 사는 게 부러워서, 일 끝나고 한 잔, 일없어서 한 잔.

  1969년이던가, 한국에 새마을 운동이 막 시작 될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도 호롱불 밝히는 돌배골에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시절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관청이라면 우선 겁부터 나는 때였다. 김칠규는 자신을 찾아 온 면서기를 보고 긴장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서기의 이야기는 김칠규로서는 처음 듣는 즐거운 통보였다. 대한뉴우스 촬영이 통도사에서 있는데 김칠규와 또 한사람이 돌배골에서 대표로 뽑혔다고 했다.
그 당시 활동사진이라고도 불렀던 흑백영화인 대한뉴우스에 출연하라는 말이었다.  
  특유의 빰빠라밤 빰빠바하는 시그널 음악이 울리면, 매번 비분강개한 듯한 아나운서가 목청 높여 새마을 만들자고 소리 높이던, 그 대한뉴우스에 김칠규가 출연하는 거였다. 어쩌다 아랫마을 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공짜 영화를 보러 가면, 본 편에 앞서 꼭 보여주었던 대한뉴우스는 김칠규도 잘 아는 바였다.
  거기에 김칠규와 마을 사람 하나가 출연한다니, 내용은 모르지만 그 소식에 조용했던 돌배골 사랑방이 소란해 졌다. 어떤 사람은 김칠규가 힘이 좋아서 뽑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김칠규가 목수라 뽑혔다고 했다. 어찌되었던 마을 사람이 부러워하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에 김칠규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아침 일찍 김칠규는 약속 된 통도사 송림 숲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촬영기가 돌아가고 서울에서 온 관계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소문은 통도사 경내에도 났던지 면벽 하던 스님들도 구경을 나왔다. 통도사에서 미리 허락을 받은, 잘 생긴 나무 한 그루를 톱 질 하는 게 김칠규의 역할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차출되어 나 온 사람이 할 일은 김칠규보다 힘들어 보였다. 미리 준비된 잘라 진 통나무를 지게에 지고 산기슭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역할이었는데 영화를 찍는 감독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매번 다시 시켰다. 그 사람은 무거운 지게를 지고 몇 번이고 계속되는 반복에 몹시 지쳐갔다.
  김칠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부처님의 가피력 덕분이겠지만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저 생고생 안 해도 좋으니.
  땀을 한참 쏟은 후에야 그 사람의 촬영이 끝났고 드디어 김칠규 차례가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조명이 숲 속에 휘황했다. 김칠규는 한 아름 되는 소나무에 톱질을 시작했다. 숲길을 걸을 때마다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이것은 서까래로, 요놈은 대들보로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다. 목수로서 당연한 상상이었겠는데 일제의 가렴주구에도, 도벌에도 버텨온 보호림인 이곳에서 절대로 나무를 벨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상상이 현실로 되다니, 김칠규는 신이 났다. 톱질로 잔뼈가 굵은 목수 김장사에게 나무 자르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설렁설렁 톱질을 하며 김칠규는 생각했다. 이 촬영에 동원된 사람들이 참 이상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어렵게 시키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간단한 일 때문에 서울서 먼 이곳까지 올 일일까. 웃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김칠규는 웃음도 나왔다.  
  톱질은 쉬웠다. 경쾌한 톱질 소음에 따라 차르르 차르르 촬영기도 신나게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캇! 하는 소리가 벽력 같이 들려왔다. 감독의 고함이었다. 땀이 안 나잖아. 물 좀 가져와. 얼굴에 뿌려. 그러나 이 정도 톱질에 땀이 날 김장사가 아니었다. 감독은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조감독이 다 마신 사이다 병에 계곡 물을 떠다 김칠규 얼굴에 뿌렸다. 김칠규는 나오지 않는 땀 대신 얼굴에 물을 뿌려가며 열심히 톱질을 했다.
  우르릉 꽝. 드디어 나무가 넘어갔다.
  그때 순경, 아니 순경 복장을 한 배우가 나타나 김칠규에게 수갑을 채웠다. 아니 채우는 척 했다.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감독은 자꾸 캇!을 연발했고, 거듭 채울 때마다 수갑이 옥 죄어와 김칠규는 손목이 쓰라렸다. 자꾸 반복되는 연기에 짜증이 난 김칠규는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차라리 지게 지고 오르락 거리는 게 편 할 번했구나. 그 오만상 찌푸리는 김칠규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이 웃었고 거기서 촬영은 끝났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고 김칠규는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말이 적은 김칠규도 친구들이 일부러 찾아와 말을 시키는 바람에 어깨가 들썩했다. 별거 아니더라구……. 김칠규의 신나는 무용담에 사람들이 거들고, 사랑방이 또 시끄러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아랫마을 공터에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확성기가 돌배골까지 올라와 논배미를 빙빙 돌며,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영화 장희빈을 상영한다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고단한 산촌의 하루 일과가 끝나자 해가 지고 어스름이 밀려왔다.
  돌배골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깨끗한 옷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인근의 반가운 얼굴을 만날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김칠규도 마음이 바빴다. 두부 만들 콩을 불리려 물을 받는 등 집안일을 마치고 사람들 보다 조금 늦게 구경을 나섰다. 천막으로 쳐진 가설극장은 근처의 마을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앞쪽은 앉고 뒤 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김칠규는 그 사람들 틈에 끼어 영화 상영을 기다렸다.
  대한뉴우스가 시작되며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빰빠라밤 빰빠바 신호나팔이 울렸다. 가을걷이 바쁜 탓에 오랜만에 얼굴 마주쳐, 인사하느라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시에 조용해 졌다. 비분강개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국가재건회의는 5대 사회악을 뿌리 뽑기 위하여 박정희의장의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5대 악은 밀수, 마약, 조직폭력, 탈세, 그리고 도벌입니다. 특히 도벌은 홍수 피해를 일으키므로 서 많은 인명피해와 물적 손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나운서의 비분에 찬 배경 설명이 깔리는 중에 범람하는 강물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떠내려가는 집과, 사람들과 돼지가 시뻘건 강물에 쓸려 가는 그림이 이어졌다.
  이 돌배골도 지난 여름 장마철에 많은 비 피해를 입었다. 물론 흑백 대한뉴우스니 붉은 색이 있을리 없지만 지난 여름의 태풍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총천연색 영상으로 보였을 터였다. 소름끼치는 영상이었다. 영화구경 나온 사람들도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고 김칠규도 그 화면에 압도되어 마음이 짠해졌다. 그러다가 이런 홍수가 도벌로 인하여 시작된다는 아나운서의 강조 설명이 나오는 순간, 장면이 바뀌어 갑자기 깊은 숲 속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도벌꾼이 나왔다. 아니, 김칠규가 나왔다.
  김칠규는 화면 가득히 자신의 얼굴이 나왔는데도, 처음엔 그것이 자신인 줄 몰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슬금슬금 톱질해서 나무를 넘어트리는 도벌꾼. 그 도벌꾼 김칠규가 급기야 순경에 체포되어서 수갑을 찬 후 고개를 떨구고 산 아래로 연행되는 모습이었다. 김칠규가, 그 나쁜 도벌꾼이 자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들었다.
  "어어?. 저눔아, 저거! 돌배골 김장사 맞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김칠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부르는 순간, 그 숭악한 범인이 자신의 얼굴임을 확인한 탓이었다.
  "우짠지 생김생김이 험 하더라니, 참말로 몹쓸 사람이구먼."
  김칠규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영상 속의 인물은 자신이 틀림없었다. 잊고 있었던, 영화를 찍었던 지난 기억이 또렷하게, 총천연색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자신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톱질한 죄밖에 없다. 그런데 홍수를 일으켜, 집도 사람도 쓸어내 버린 원인 제공자요, 박멸해야 될 5대 악의 원조라니. 절 집 일주문 사천왕상 보다 더 흉측한, 영상 속 자신의 몰골을 보며 김칠규는 진저리를 쳤다. 살아 있는 늘씬한 소나무를 땀을 뻘뻘 흘리며 베고 있는 모습이라니.
  순경이 수갑을 채우는 장면에선, 오만상 인상을 구긴 김칠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김칠규 자신이 보아도 화면 속 도벌꾼은 인상까지도 더러운 범죄자였다. 면사무소 말단 직원도 무서워 할 정도로, 평생 죄라고는 모르는 돌배골 무식한 김칠규였는데 그는 이로서 간단히 국가가 척결해야 할 거대한 사회악이 되었다.
  대한뉴우스는 그렇게 실감나는 영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김칠규가 수갑을 차고 인상을 쓰며 잡혀가는 도벌꾼의 말로까지 알뜰하게 보여줬다.
  옆에 서 있던 이웃 마을 사람이 김칠규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피했다.

  김칠규는 꼭 보고 싶었던, 눈물 없이는 못 본다는 장희빈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담가 놓은 동동주를 들이키며, 분하고 억울하여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자니, 영화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였다. 그 사람들은 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 친구가 똑똑한 이야기했다. 국가를 상대로 고소를 하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좋은 역할은 돈을 안주지만 나쁜 역할은 돈을 주는 법인데, 돈이라도 받지 왜 안 받았느냐고 화를 냈다. 다른 사람은, 다음 번 대한뉴우스에 김칠규는 도벌꾼이 아니라고 설명해줘야 한다고 열을 냈다. 호롱불도 사치인 돌배골 사람들의 공허한 위로 말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칠규는 목수 일도 그만두었다. 스스로 그만 둔 것보다는 잘렸다는 말이 맞는 말 일터였다. 그 대한뉴우스 사건 후론 김칠규는 톱질을 할 수가 없었다. 목수에게 톱질은 기본이었는데 김칠규는 그만 그것을 잊었다. 톱질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생긴 탓이었다. 또 다른 이유를 든다면 나쁜 소문은 일부러 찾아가 전해주는 시골의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허벅지 보면 뭐 보았다는 비약이 허구를 점차 사실로 만들어 갔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해주는 부지런함이 김칠규 주변 사람들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김칠규의 결백을 증명 해 낼 방법이 없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왕창 사람을 불러 모아 도벌꾼을 알리는 대한뉴우스에 비교하면 돌배마을 사람들의 입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김칠규가 필사적으로 그것이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외쳐도, 비분강개한 목소리와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어우러진 사실적 영상을 이겨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현실로 증명되기 시작했다. 읍내를 나가도 김칠규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번듯한 대학생이 된 초등학교 동기들도, 대처에서 그 뉴우스를 본 모양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당시 전국 방송인 대한뉴우스의 파괴력은 엄청 났다. 도시로 진출한 친구들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 마주치면 외면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그래도 의리 있는 동기들은, 고생했지…… 라며 김칠규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은 도벌꾼으로 잡혀가서 고생스러운 징역을 살고 출소한 것에 대한 위로의 말에 다름 아니었다. 못 배웠어도 착하게 살라는, 배운 친구들의 연민과 동정의 눈빛 때문에 김칠규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동동주는 김장사의 기호품에서, 서서히 유일한 친구가 되어갔다. 동동주가 천천히 취하는 것처럼, 일도 하지 않고 김칠규는 매일 동동주에 잠겨가고 있었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간 김칠규는 차마 톱질을 하지 못해 빈 지게로 내려오기 일 수였다.
  독수리 날개 닮은 영취산과 이어진 다른 산 사이에는 거대한 억새 숲이 있었다. 나무한다는 핑계로 병에 담아 온 동동주를 점심처럼 퍼마시고 김칠규는 그 억새 숲에서 홀로 짐승 울음을 울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잘 배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다. 그것도 무료로. 그런데 왜 뒤에서 수군거리는가. 어째서 졸지에 흉악한 범죄자, 척결 되어야 할 사회악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칠규는 억울했다. 그러나 덧칠해진 누명을 벗을 방법이 없었다. 동동주에 빠져 허우적댈 이유론 충분했다. 그러다 술에 장사 없다고, 드디어 김칠규는 속병이 들었다. 서서히 망가져 가는 김칠규를 보며 혀를 끌끌 차대던 어머니는, 이러다 사람 잡겠다며 그때쯤 몇 며느리 감을 찾아 나섰다. 장가를 보내면 생활이 달라 질 것 같아서였다. 인근의 처녀들은 가짜 김칠규의 과거를 진짜처럼 믿고 나서지 않았는데 어쩌다 겨우 혼사가 이루어질라치면 어김없이 그 숭악한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어머니는 돌배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겨우 혼처를 구해 김칠규를 장가보냈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김장사가 아닌, 몸 성치 않은 김칠규는 돌배골에서 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어머님의 손맛을 이어 담근 동동주와 절 집에 납품하고 남은 두부로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김칠규의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그런 자식을 측은해 하다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그란데도, 한국에 방송된다는 촬영을 내가 할 것 같소?. 캇!. 한번 속았는데……. 옘병, 제발이지 내를 마, 기냥 내 버려두소. 미국 산속에서 두부 장사나 온전히 하게 말이지."
  더듬거리며 과거를 회상해 낸 김칠규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김칠규의 이야기를 듣던 박 피디는 그가 왜 촬영에 그렇게 비협조적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김칠규는 긴 과거의 회상을 눈물과 웃음과, 콧물이 반반 섞인 어투로 끝마쳤다. 김칠규는 술이 취한 채 반쯤은 박 피디에게, 반은 문 밖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노무 영화가 한국에서도 내를 평생 도벌꾼으로 살게 맹그렀는데 여그서도 촬영을 하면 내는 어디 가서 살란 말이요. 봉술 엄마, 여그 동동주 퍼득 가져 오그라."
  그러나 불안한 눈빛으로 나타난 그의 아내는 빈손이었다.
  "그만 잡수소. 속도 편치 않은 사람이 낮술을 와 그리 묵는교. 그라고 뭐가 이 선상님들이 그리 잘몬 했능교?. 다 장사 잘되게끔 해줄락 하는긴데. 그만 하고……"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캇! 틀릿다. 니는 모른다. 모르는기라. 니가 내 속을 우째 알겟노. 술이나 빨리 가져 온나."
  술에 취한 채, 다시 술을 시키는 김칠규에게 피디는 더 이상 촬영을 하자고 조를 수가 없었다. 카메라 조작과 여론조작이 방송에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더군다나 미국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설득 할 자신도 박 피디에게는 없었다. 다만, 아까 찍어 놓은 그림에 하산하는 사람들 표정과 인터뷰 목소리만 더 담으면 프로그램은 그럭저럭 될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박 피디의 머리를 강하게 쳤다. 김칠규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두부는 식품제조가 분명한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허가를 취득하지 않고 두부를 만들고 판매하는 건 불법이다. 더군다나 야생동물의 일종인 멧돼지 불고기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닭백숙과 오리 로스구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가받은 도축장에서 고기를 얻지 않았다면…… 육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미국 사람들은 동물사랑을 얼마나 강조하는가.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 고양이 한 마리를 버림으로서 신문과 방송이 시끄러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탈세라면 무덤까지도 찾아 간다는 미국 세무당국도 관계가 된다. 만약 방송을 모니터한 당국이라면 분명히 김칠규의 행위는 온통 불법 투성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사안에 따라서 중범죄 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피디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김칠규 두부 운명이, 아니 김칠규 운명이 또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은근히 유색인종 이민을 꺼려하며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가혹한 추방을 일삼는다는 세간의 말들을 생각할 때,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박 피디로서는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이었다. 물론 김칠규가 그런 까탈스러운 법적규제를 생각해서 촬영협조를 거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 피디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에 신경을 나누기엔 시간이 없다. 촌음을 다투는 방송을 펑크 낼 자신도 없었다. 일을 계속 진행시키는 방법 외에 지금은 다른 것이 고려 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대문간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의 하산 시간인 된 모양이다. 박 피디는 카메라를 재촉하여 밖으로 나섰다. 붉은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김칠규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 피디는 언 듯 창문으로 방안을 쳐다봤다. 김칠규는 어느 사이 그 자리 탁자에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잠결에 숨이 막히는지 김칠규는 컥컥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위눌린 듯 그 컥컥대는 소리가 박 피디의 귀에는 더 이상 찍지 말라는 듯, 캇!캇!으로 들렸다. -끝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