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8>
2009.05.22 14:59
언니는 어딜 가고 저 분은 누구일까, 하고 멈칫하다가 나는 그만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가 바로 강미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은 머리 때문에 더 늙어 보였겠지만 그렇게 온통 백발이 될 나이는 아직 아니라 나는 더 놀랐다. 갑자기 목이 콱 메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민우와 삼십 년의 세월을 살았는지 그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미경이 저렇게 변하다니.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 강산이 열 번을 변하더라도 강미경이 저토록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갈색의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릴 때,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는 그녀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고, 쌍까풀이 진 깊은 눈 그리고 오뚝한 콧날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여자가 보아도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미인이었다.
어느 날, 사라져가는 석양빛을 창 너머로 받으며 교회 구석진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헉’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금세 뱉어내지를 못 했었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국은 연적으로 인연이 끊어졌지만, 한때 그녀는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언니 앞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도 그녀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혹시 일어설 수가 없어서? 앉아 있는 의자도 특수하게 제작된 것임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팔걸이와 등받이 발판 등이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널따란 오른편 팔걸이 바깥쪽에는 스위치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나는 “언니” 하고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의자 앞에 털썩 꿇어 앉아버렸다. 내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손은 작고 까칠했으나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전해왔다. 삼십 년 동안의 긴 장벽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내 맘속에서 경악하는 외마디 소리를 들은 것 같이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변해서 놀랬지?”
나는 말을 잃고 눈물만 흘렸다. 언니의 뻥 뚫린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담담하게 대했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딱 삼십 년 만이구나. 내가 이토록 변한 건 그만큼 나한테 사연이 많았다는 증거야.”
언니는 첫마디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했다. 기운이 다 빠져버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의자 밑바닥으로 스르르 가라앉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생동감에 넘쳐 있어 나는 놀랐다.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눈빛도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았을까? 분명히 이민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가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부의 만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길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려면 부부는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 게다. 마치 발목을 묶고 뜀뛰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강미경과 이민우는 발목을 묶고 뜀뛰기를 하다가 그만 뒹굴어지면서 나가자빠진 것일까?
실은,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민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간 만이야’ 하고 그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 마누라 앞이니 정중하게 ‘오래간만입니다’ 하고 존댓말을 쓰면서 말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단둘이 어디서 우연히 마주쳤다 하더라도 그는 존댓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미안해서 눈 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 할 수도 있잖은가? 그도 언니처럼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젊은 시절, 그들은 영화의 주연배우처럼 미남미녀였고, 참 많이 닮아 오누이 같기도 했었다.
집 안 어디에도 이민우의 자취는 없었다. 아들과 강미경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들은 이민우와 판에 박은 닮은꼴이었다. 지금쯤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일 텐데 사진은 틴에이저 때 찍은 것 같았고 언니도 새파랗게 젊어 있었다. 혹시 이혼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강미경’ 이라는 이름을 대했을 땐 미처 생각 못했으나, 이혼을 했기 때문에 ‘강’ 씨로 도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지금에야 들었다.
또다시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갈 수 있는 그런 이민우이기에 옛날에 폈다 접었다 하던 내 상상의 나래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속을 썩어 언니가 저렇게 변했을 것이다. 아무리 속을 썩어도 그렇지... 언니를 보고 앉았노라니 자꾸만 슬퍼졌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나는 안간힘을 썼다. 허나, 그녀는 침착했고 이민우와 애경이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내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 살아온 이야기였다. 물론 결혼을 한 후의 이야기들이다. 아이가 넷이나 된다는 소릴 듣고 언니는 밝게 웃으면서 "너는 부자구나. 좋겠다. 좋겠다" 라는 말을 연발하며 신기한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윌헴 박사가 길을 터주어 나의 학교생활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무사히 박사 학위를 받았고 또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통곡 소리가 연결의 고리가 된 것이었다.
계속 연구를 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해야만 하는 남편이기에 나는 그의 논문을 정리해 주고 리서치를 도우는 비서 역할을 했다. 공부한 것을 남편을 도우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었다.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샛별 같은 평화와 해와 같은 덕이 있었다. 샛별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그 마음의 평화에서 덕스러운 행위가 배어 나왔다. 나는 행복했고 내게 좋은 남편 주신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이민우로부터 받은 고통을 남편이 다 보상을 해준 것이다.
그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되어, 멈춰버린 세월 속에 갇혀 있다가 윌헴 박사를 만나고부터는 그 정지된 시간이 서서히 발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민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나 자신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도 않고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결혼을 하자마자 나는 애만 계속 낳았다. 애 만드는 기계처럼 아이를 쑥쑥 잘 낳았다. 그리고 집에서 애만 키웠다. 남편이 그렇게 원했고 나 역시 남편에게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내면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받은 고통을 지금 언니가 받고 있는 것 같아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사연들을 그녀가 쉽게 털어놓지 않아도 나는 묻지를 않았다. 언니 입에서 슬픈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아들의 안부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민우와의 모든 추억들을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마음 구석구석을 다 씻어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단단하고 질긴 매듭이 되어 내 가슴속에 서리를 틀고 있었으나 아주 옛날에 나는 그 매듭을 풀어버렸다. 그것을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언니가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것도 풀어주고 싶었다.
언젠가 애경이가 언니는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어대면서 했던 말, 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는, 그 말이 내게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이렇게 사계절이 바뀌듯, 인생도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의 하루하루는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지 않은가? 담장 밖에서 부산하게 들려오는 살아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소리를 내며 목청을 돋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훗날 그들은 화음을 맞춰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강미경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노을이 조금 짙어진 듯했다.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 꼭 해야 할 말은 미루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이민우가 집엘 들어오기 전에 일어나는 게 예의인 것도 같아서다. 그녀는 저녁 준비가 다 됐다고 나를 붙들었다. 언니 집에서 저녁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냥 호텔 식당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모두가 다 빗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가 스위치를 누르니 의자는 스르르 미끄러져 식탁 앞 알맞은 위치에서 멈췄다. 의자와 마찬가지로 식탁 역시 언니에게 맞게끔 특수 제작이 된 듯했다. 의자가 워낙 높은데도 언니의 앉은 키에 잘 맞았다. 식탁에 딸린 의자도 보통 의자보다는 높은 편이었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아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걷지를 못함을 뜻하는 질문이었다.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그냥 지나치는 말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좀 오래됐어. 너도 알다시피 결혼 전에도 허리 수술을 받은 적이 있잖아. 그게 도진 거야. 또 다른 데도 아팠고. 윌체어 탄 지는 일 년밖에 안 되었어. 그래도 지금은 많이 건강해진 거야.”
언니가 더 이상 말을 이어기지를 않아 나 역시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왠지 아픈 기억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데라니... 어디가 그렇게 아팠을까? <계속>
강미경이 저렇게 변하다니.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 강산이 열 번을 변하더라도 강미경이 저토록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갈색의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릴 때,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는 그녀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고, 쌍까풀이 진 깊은 눈 그리고 오뚝한 콧날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여자가 보아도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미인이었다.
어느 날, 사라져가는 석양빛을 창 너머로 받으며 교회 구석진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헉’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금세 뱉어내지를 못 했었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국은 연적으로 인연이 끊어졌지만, 한때 그녀는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언니 앞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도 그녀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혹시 일어설 수가 없어서? 앉아 있는 의자도 특수하게 제작된 것임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팔걸이와 등받이 발판 등이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널따란 오른편 팔걸이 바깥쪽에는 스위치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나는 “언니” 하고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의자 앞에 털썩 꿇어 앉아버렸다. 내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손은 작고 까칠했으나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전해왔다. 삼십 년 동안의 긴 장벽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내 맘속에서 경악하는 외마디 소리를 들은 것 같이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변해서 놀랬지?”
나는 말을 잃고 눈물만 흘렸다. 언니의 뻥 뚫린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담담하게 대했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딱 삼십 년 만이구나. 내가 이토록 변한 건 그만큼 나한테 사연이 많았다는 증거야.”
언니는 첫마디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했다. 기운이 다 빠져버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의자 밑바닥으로 스르르 가라앉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생동감에 넘쳐 있어 나는 놀랐다.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눈빛도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았을까? 분명히 이민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가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부의 만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길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려면 부부는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 게다. 마치 발목을 묶고 뜀뛰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강미경과 이민우는 발목을 묶고 뜀뛰기를 하다가 그만 뒹굴어지면서 나가자빠진 것일까?
실은,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민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간 만이야’ 하고 그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 마누라 앞이니 정중하게 ‘오래간만입니다’ 하고 존댓말을 쓰면서 말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단둘이 어디서 우연히 마주쳤다 하더라도 그는 존댓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미안해서 눈 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 할 수도 있잖은가? 그도 언니처럼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젊은 시절, 그들은 영화의 주연배우처럼 미남미녀였고, 참 많이 닮아 오누이 같기도 했었다.
집 안 어디에도 이민우의 자취는 없었다. 아들과 강미경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들은 이민우와 판에 박은 닮은꼴이었다. 지금쯤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일 텐데 사진은 틴에이저 때 찍은 것 같았고 언니도 새파랗게 젊어 있었다. 혹시 이혼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강미경’ 이라는 이름을 대했을 땐 미처 생각 못했으나, 이혼을 했기 때문에 ‘강’ 씨로 도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지금에야 들었다.
또다시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갈 수 있는 그런 이민우이기에 옛날에 폈다 접었다 하던 내 상상의 나래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속을 썩어 언니가 저렇게 변했을 것이다. 아무리 속을 썩어도 그렇지... 언니를 보고 앉았노라니 자꾸만 슬퍼졌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나는 안간힘을 썼다. 허나, 그녀는 침착했고 이민우와 애경이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내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 살아온 이야기였다. 물론 결혼을 한 후의 이야기들이다. 아이가 넷이나 된다는 소릴 듣고 언니는 밝게 웃으면서 "너는 부자구나. 좋겠다. 좋겠다" 라는 말을 연발하며 신기한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윌헴 박사가 길을 터주어 나의 학교생활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무사히 박사 학위를 받았고 또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통곡 소리가 연결의 고리가 된 것이었다.
계속 연구를 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해야만 하는 남편이기에 나는 그의 논문을 정리해 주고 리서치를 도우는 비서 역할을 했다. 공부한 것을 남편을 도우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었다.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샛별 같은 평화와 해와 같은 덕이 있었다. 샛별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그 마음의 평화에서 덕스러운 행위가 배어 나왔다. 나는 행복했고 내게 좋은 남편 주신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이민우로부터 받은 고통을 남편이 다 보상을 해준 것이다.
그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되어, 멈춰버린 세월 속에 갇혀 있다가 윌헴 박사를 만나고부터는 그 정지된 시간이 서서히 발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민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나 자신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도 않고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결혼을 하자마자 나는 애만 계속 낳았다. 애 만드는 기계처럼 아이를 쑥쑥 잘 낳았다. 그리고 집에서 애만 키웠다. 남편이 그렇게 원했고 나 역시 남편에게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내면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받은 고통을 지금 언니가 받고 있는 것 같아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사연들을 그녀가 쉽게 털어놓지 않아도 나는 묻지를 않았다. 언니 입에서 슬픈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아들의 안부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민우와의 모든 추억들을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마음 구석구석을 다 씻어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단단하고 질긴 매듭이 되어 내 가슴속에 서리를 틀고 있었으나 아주 옛날에 나는 그 매듭을 풀어버렸다. 그것을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언니가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것도 풀어주고 싶었다.
언젠가 애경이가 언니는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어대면서 했던 말, 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는, 그 말이 내게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이렇게 사계절이 바뀌듯, 인생도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의 하루하루는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지 않은가? 담장 밖에서 부산하게 들려오는 살아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소리를 내며 목청을 돋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훗날 그들은 화음을 맞춰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강미경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노을이 조금 짙어진 듯했다.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 꼭 해야 할 말은 미루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이민우가 집엘 들어오기 전에 일어나는 게 예의인 것도 같아서다. 그녀는 저녁 준비가 다 됐다고 나를 붙들었다. 언니 집에서 저녁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냥 호텔 식당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모두가 다 빗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가 스위치를 누르니 의자는 스르르 미끄러져 식탁 앞 알맞은 위치에서 멈췄다. 의자와 마찬가지로 식탁 역시 언니에게 맞게끔 특수 제작이 된 듯했다. 의자가 워낙 높은데도 언니의 앉은 키에 잘 맞았다. 식탁에 딸린 의자도 보통 의자보다는 높은 편이었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아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걷지를 못함을 뜻하는 질문이었다.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그냥 지나치는 말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좀 오래됐어. 너도 알다시피 결혼 전에도 허리 수술을 받은 적이 있잖아. 그게 도진 거야. 또 다른 데도 아팠고. 윌체어 탄 지는 일 년밖에 안 되었어. 그래도 지금은 많이 건강해진 거야.”
언니가 더 이상 말을 이어기지를 않아 나 역시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왠지 아픈 기억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데라니... 어디가 그렇게 아팠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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