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묵상

2004.11.11 11:41

전지은 조회 수:118 추천:6

  가을 색은 도시까지 내려왔다. 바람이 창문의 틈새를 타고 들어와 사방에 찬 기운을 풀어놓으면 시린 마음은 서둘러 작은 벽난로를 손질하게 한다. 한번쯤 돌개바람이 지나가고 찬 서리가 마당가에 내리면 계절은 금방 풍경을 바꿀 것이다. 잘라놓은 나무들은 장작 감으로 잘 말랐는지 더 쪼개야할 것은 없는지 살피며 장작들을 쓰기 좋게 쌓아둔다.
  작년 이맘땐 새로운 곳으로 이주를 준비하느라 몸은 바빴고 책 한 권 읽을 수 없게 마음이 각박했다. 먼저 떠났던 남편의 뒤를 이어 집안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꾸리며 얼마나 심란해 했던가.
  유년의 고향인 강릉, 이민의 고향인 태평양을 바라보는 작은 도시를 지나 산 물결이 늘 파도 치는 록키 산맥의 한 자락으로 이주한다고 하자 지인 들은 풍광이 좋은 곳만 골라 다니며 사는 행운아라고 하였다. 그들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떠났던 길.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도 여행객의 시선과 이주자의 자세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곳에서 짐을 풀고 나서 계절의 색깔이 한바퀴 회전을 하여 돌고 있다. 책 보따리를 풀고 부엌살림이 정리되자 어느새 계절은 가버려 눈 속에 갇힌 듯 했다. 핑계 김에 은둔자의 모습이 되어 버릴 까도 생각했으나 흰 눈 속에서 푸릇푸릇 새싹을  내는 여린 잎을 바라보며 희망을 접지 않았고 여름의 풍성한 초록에 숲 속 별장에 휴가를 온 듯한 풍요로운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가을은 산언덕 가득히 황홀한 황금 자락을 흔들며 다가왔고 이제 곧 그 곱고 고운 산세를 뒤로하고 침잠하며 평화를 불러오는 흰눈이 펑펑 내릴 것이다.
  도시까지 내려온 농익은 가을 색깔을 가슴 깊은 곳까지 청하여 진한 물을 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 한해 동안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려 애썼던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여 투정만 부렸다. 조금만 바람이 불면 왜 이리 춥냐고, 어두워진 거리로 인적과 차 소리가 끊기면 왜 이리 조용하냐고, 계절에 따라 산언덕의 모습과 색깔이 변하면 아름다움조차 왜 이리 고웁냐는 불평거리가 되었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함께 서 있는 내가 되지 못하고 작은 홀씨가 되어 커다란 숲 속을 떠다니듯 했던 나. 이제 그만 부유의 깃을 접고 진정한 이주자가 되어 볼 모양이다.
  한동안 쓰기를 중단하였던 성경 필독을 다시 시작하며 기도의 촛불을 켠다. 정답고 고마웠던 옛친구들과 새로 만나게 된 이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또박또박 써 가리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 줄 한 줄 써가다 보면 범사에 감사 할 수 있으리라. 좀더 추워지면 벽난로에 장작을 가득 넣고 그 앞에 앉아 몸도 마음도 녹여 따듯하게 해 주는 책들도 읽어야겠다. 숲이 깊고 습하더라도 그 안에서 햇살을 찾는 지혜를 배울 것이며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너무 먼 곳에 미련을 두지 않고, 너무 많은 것에 욕심 내지 않을 것도 다짐해 본다. 지난 일년, 새로운 풍경을 만났고 변화하는 계절을 만났던 것은 분명 그분의 선물이었다. 깨닫지 못하고 지냈던 시간들을 반성하고 또 다시 다가올 계절들은 준비된 자세로 맞이해야겠다.
  낯선 곳에서 지난 일년을 잘 지내게 해주셨으며, 오늘을 주신 그 분께 감사한다. 그 고마움을 전하는 마음으로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이곳에서 만나게된 대자녀의 가족들과 마음을 열어 정을 나누는 몇몇 지인 들을 초대하고 잠시 다녀갈 아들과 함께 조촐한 감사의 식탁을 준비하련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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