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ck

            추석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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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박했다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 인사 같았고

떡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았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편안한 나의 사투리에도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 이자에 쫓기지 않았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태운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고

우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았다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월간 청정 하남》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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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은 이렇듯 겁나게’ 편안하고 억쑤로’ 푸짐해야 마땅하다고향으로 달음박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무장해제를 당하기 위해서다말씀의 긴장이 필요치 않고 주머니가 좀 심심해도 상관이 없다혁대를 조일 이유도 서류를 매만질 필요도 없다일기가 어떻든 깊이 염려할 바는 아니며인터넷이니 SNS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대체로 운짐달 일이라고는 없다.


 추석 무렵의 고향은 지난 계절의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으므로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그러니 여기는 모두 황토빛깔의 동색이라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하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마저 착할 수밖에 없겠다고향이 반도의 어디든 간에 서울의 한복판 말고는 다 느낄 수 있는 고향의 정취요 정서인 것이다.설령 체감하기 쉽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리 믿으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향의 넉넉함과 안온함과 친근함도 하루 이틀 잠깐 머문다면 제대로 느끼기가 쉽지 않거니와 실효성도 떨어질 것이다다행히 올해는 좀 퍼질러 있어도 될 만큼의 넉넉한 휴가를 받았다이번 추석은 그레고리력의 조화와 정부의 하루 인심이 보태어져 쭉 열흘 휴일이 가능했다그럼에도 바쁘다느니 오가는 길이 막혀서 힘들다느니 따위의 핑계를 둘러댄다면 자기네들끼리 인천공항을 몰래 빠져나간 호랑말코이거나 정말로 피폐한 사람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런 말도 진짜로 입에서 송송 나올 것 같다성에 다 차진 않지만 농심으로 잘 익은 곡식들이 온 들판에 출렁이고 둥실 뜬 고향집 마루에 앉아 최소한 3분 이상은 달과 독대하면서 떨어져 있던 온 가족이 어울려 함께 맛난 음식 나눠먹으며 추억을 담소할 일이다느슨했던 가족애를 확인하고 엄마 품 같은 고향의 정취를 빵빵하게 충전해갈 수 있다면 답답하게 꽉 뭉쳐진 세상사도 조금은 부들부들해지리라.


 그런데 시내를 다니다보니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이것도 좋게 생각하면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데 삐딱한 내 눈에만 그런가지방선거가 8개월도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예비출마자들의 불법 추석인사 현수막이 여기저기 난삽하게 걸려있어 선거철 풍경을 방불케 했다.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해빠진 마당에 그들만이 빳빳한 사심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추석 풍경을 아주 배려놓았다.

( 권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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