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 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아 2005년 분단이후 최초로 공동문학단체를 출범시켰다.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남북 문인 2백여 명이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남북한 단일문학단체 결성과 통일문학상 제정을 비롯한 기관지 《통일문학》 창간 등을 결의했다. 교류의 첫 결실로 2008년 초 남북이 공동 편집한 《통일문학》 창간호가 5천부 발행되었으나 당시 정권 교체된 이명박 정부에서 일부 문구를 트집 잡아 티격태격하다 뒤늦게야 2천부가 남한으로 들어왔다. 이후3호까지 나왔으나 반입이 불허되었고 뒤로는 발간 자체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가 수록된 계간 『통일문학20호』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부터 발행된, 말하자면 훗날 《통일문학》의 전신인 셈이다. 다만 《통일문학》의 경우는 남북이 서로가 추천하는 작품을 교환하여 상대측에서 고르도록 한 편집방식인데 비해, 이는 북측에서 임의로 남측의 기 발표 작품 가운데 골라 실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계간 문학지의 발간은1989년 3월 황석영 작가가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당국의 허가 없이 홀로 방북하여 북측 문인들과 현지에서 즉흥적으로 합의하여 성사시킨 ‘작품’이다.
이 잡지는 2001년 중국 동북지방을 2주간 개인적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옌지의 헌 책방에서 구입한 다른 몇 권의 북한 발행 서적 가운데 하나이다. 몇 권의 과월호 『통일문학』에는 박경리의 토지가 그대로 연재되는 등 남쪽 문인의 시와 소설 작품이 상당수 수록되어있었다. 재미난 것은 정일근 시인의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훗날 정일근 시인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후에도 북쪽에서 남쪽의 작품을 재수록한 문예지를 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문인은 만나지 못했다.
각설하고, 이 시는 시인의 평소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막연한 못마땅함이 지혜의 그림 한 장과 '엄마가 그러는데 북도 옛날에는 우리나라였대요, 북의 사람이랑 남의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았대요, 나는 북의 어린이랑 친구가 되고파요'란 말 한마디에 그 편견을 깡그리 지웠다는 내용이다. 예쁜데다가 하는 짓도 이쁜 그런 아이가 ‘지혜’고, 잘 사는 집 여자가 남도 생각할 줄 아는 속 깊은 여자가 지혜엄마였던 것이다. 남한의 일부 보수기득권 계층은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풍문을 전복시킨 에피소드라 하겠다.
지혜는 얼핏 보기에 그런 계층의 아이거나 통일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일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지혜는 엄마의 아름다운 가르침으로 ‘빛나고 황홀한 국토의 꿈’을 꾸고 있었다. 시인은 그런 지혜를 보며 함께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모두 통일을 염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양상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진보는 북을 현실적인 적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할 동포이며 형제라는 인식이 짙게 깔린 반면 보수는 끊임없이 오로지 적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시가 북한 문예지에 실린 것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구미에 비교적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으나, 그보다는 이 시에 담긴 아름다움과 진정성이 그들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라 믿고 싶다. 저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의 진정성을 먼저 보여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되겠다. 진정성으로 두드리는 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모처럼 보수정권의 오랜 경색국면을 벗어나 오늘 평창 평화올림픽의 개회를 맞았다. 남북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은 거스를 수 없는 민족의 과업이며 시대정신이다.
어제 북한예술단의 강릉 첫 공연은 일부 우려했던 정치색 없이 감동적인 무대를 잘 보여주었다. 예전과 달리 이질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서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평화공존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은 혈연공동체이고 언어공동체이긴 하지만 여전히 문화공동체는 아니다. ‘통일문학’은 양측의 통일 지향적 이념이나 가치관을 포괄한다고 할 때 민족문화공동체 형성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이질적인 표층의 문화를 좁혀 지혜가 그린 ‘빛나고 황홀한 국토의 꿈’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통일문학》은 복간되어야 마땅하리라.( 해설 권 순진)
Ode to joy.
2000년 6 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아 2005년 분단이후 최초로 공동문학단체를 출범시켰다.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남북 문인 2백여 명이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남북한 단일문학단체 결성과 통일문학상 제정을 비롯한 기관지 《통일문학》 창간 등을 결의했다. 교류의 첫 결실로 2008년 초 남북이 공동 편집한 《통일문학》 창간호가 5천부 발행되었으나 당시 정권 교체된 이명박 정부에서 일부 문구를 트집 잡아 티격태격하다 뒤늦게야 2천부가 남한으로 들어왔다. 이후3호까지 나왔으나 반입이 불허되었고 뒤로는 발간 자체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가 수록된 계간 『통일문학20호』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부터 발행된, 말하자면 훗날 《통일문학》의 전신인 셈이다. 다만 《통일문학》의 경우는 남북이 서로가 추천하는 작품을 교환하여 상대측에서 고르도록 한 편집방식인데 비해, 이는 북측에서 임의로 남측의 기 발표 작품 가운데 골라 실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계간 문학지의 발간은1989년 3월 황석영 작가가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당국의 허가 없이 홀로 방북하여 북측 문인들과 현지에서 즉흥적으로 합의하여 성사시킨 ‘작품’이다.
이 잡지는 2001년 중국 동북지방을 2주간 개인적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옌지의 헌 책방에서 구입한 다른 몇 권의 북한 발행 서적 가운데 하나이다. 몇 권의 과월호 『통일문학』에는 박경리의 토지가 그대로 연재되는 등 남쪽 문인의 시와 소설 작품이 상당수 수록되어있었다. 재미난 것은 정일근 시인의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훗날 정일근 시인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후에도 북쪽에서 남쪽의 작품을 재수록한 문예지를 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문인은 만나지 못했다.
각설하고, 이 시는 시인의 평소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막연한 못마땅함이 지혜의 그림 한 장과 '엄마가 그러는데 북도 옛날에는 우리나라였대요, 북의 사람이랑 남의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았대요, 나는 북의 어린이랑 친구가 되고파요'란 말 한마디에 그 편견을 깡그리 지웠다는 내용이다. 예쁜데다가 하는 짓도 이쁜 그런 아이가 ‘지혜’고, 잘 사는 집 여자가 남도 생각할 줄 아는 속 깊은 여자가 지혜엄마였던 것이다. 남한의 일부 보수기득권 계층은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풍문을 전복시킨 에피소드라 하겠다.
지혜는 얼핏 보기에 그런 계층의 아이거나 통일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일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지혜는 엄마의 아름다운 가르침으로 ‘빛나고 황홀한 국토의 꿈’을 꾸고 있었다. 시인은 그런 지혜를 보며 함께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모두 통일을 염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양상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진보는 북을 현실적인 적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할 동포이며 형제라는 인식이 짙게 깔린 반면 보수는 끊임없이 오로지 적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시가 북한 문예지에 실린 것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구미에 비교적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으나, 그보다는 이 시에 담긴 아름다움과 진정성이 그들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라 믿고 싶다. 저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의 진정성을 먼저 보여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되겠다. 진정성으로 두드리는 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모처럼 보수정권의 오랜 경색국면을 벗어나 오늘 평창 평화올림픽의 개회를 맞았다. 남북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은 거스를 수 없는 민족의 과업이며 시대정신이다.
어제 북한예술단의 강릉 첫 공연은 일부 우려했던 정치색 없이 감동적인 무대를 잘 보여주었다. 예전과 달리 이질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서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평화공존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은 혈연공동체이고 언어공동체이긴 하지만 여전히 문화공동체는 아니다. ‘통일문학’은 양측의 통일 지향적 이념이나 가치관을 포괄한다고 할 때 민족문화공동체 형성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이질적인 표층의 문화를 좁혀 지혜가 그린 ‘빛나고 황홀한 국토의 꿈’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통일문학》은 복간되어야 마땅하리라.( 해설 권 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