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생일'을 입고 그는 갔는가 - 김영교
2017.06.21 13:16
'생일'을 입고 그는 갔는가 - 김영교
산호세에 여행온 서울친구와 LA 이곳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5일 전 쓰러저 7시간 최첨단 수술도 보람없이 코마에서 못 깨어난 친구, 그녀의 시신이 서울에 옮겨졌을 때 이해인 수녀를 선두로 가슴 아파한 사람들 중 장영희가 있었다. 친구*는 장교수의 책 (김점선 삽화) 홍보대사처럼 이곳 동창들에게 보급해 온 장본인이었다. 이것이 장영희의 모든 저서가 우리 집 서가에 책 가족이 된 경로이기도 하다.
그해 나는 서울 방문중에 있었다. 신수정은 모차르트의 밤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길 건너 수정식당에서 식사후 참석하려고 김미자, 김점선, 고영자, 나, 이렇게 넷은 만났고 장영희(불참)의 저서<생일>과 <축복>을 한 권씩 받아 축하하며 밥을 먹었다. 헐렁한 흰 서쯔 위도리를 입은 점선이 헝클어진 머리로 떠들어 댄 게 어제 같기만 했다.
생일은 계단이다. 밟고 올라가야 하는 축복의 층계이다. 친구 장선영이가 쓴 <며느리에 주는 요리책>을 번역한 내 친구 미자가 산호세에서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화가 김점선도 암으로<점선뎐>전기를 남기고 철새처럼 훌훌 날아갔다. 그게 그해 3월이었다. 후학들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장영희교수의 작고 소식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너무 아깝고 너무 애석했다. 세 사람이 남긴 빈자리, 감당하기에 너무 컸다. 휘청거렸다. 그중 나이 가장 어린 장교수 순서는 아직 아니었다고 되뇌이고 되뇌었다. 영혼생일의 층계에 닿으려고 장교수는 이미 준비했던것일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문학계뿐이랴! 장영희 교수가 그의 영미 시 산책집인 <생일>이라는 책에 “진정한 생일은 지상에서 생명을 얻은 날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 1급 장애자였지만 굴하지 않고 유명한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수필가, 시인, 번역가로 활약하다가 9년간의 암투병을 마치고 그해 5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위안의 말이 적합하랴 이 마당에, 우리 인간 모두는 언젠가 <고 아무게 >가 되지 아니한가!
꽃띠 시절 서울대학 다니는 언니로 인해 장왕록교수룰 알게되었고 그에게는 늘 책을 많이 읽는 아릿다운 어린 딸이 있었다. 그 딸은 다리가 성치 않은 탓으로 외출대신 늘 집안에서 공부만 했다. 장왕록교수가 젊은 여자들의 다리를 유심히 보곤해서 오해 산적도 있었는데 다 장애인 딸은 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번역을 도운 영리한 그 딸이 바로 장영희 교수가 되었다.
이곳 LA정음사에서 북 사인회 및 피오피코 도서관 문학 세미나에 장영희후배 (23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나는 사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밝은 미소와 큰 눈빛을 맞댄 마지막 체온 나눔이었다. 그가 건네준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그녀의 육필이 생생한 색깔로 숨쉬고 있다. ‘김영교 선배님: 문학의 숲, 생명과 희망의 숲, 함께 지켜나가요.’ Love 장영희' 라고 쓰여있었다.
장교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랴. 여기 가족같은 어떤 신부님의 글을 감히 인용해본다. 유명한 칼릴 지브란의 <눈물과 미소>가 적용되는 여자, 가혹하리 만치 고통의 삶을 눈물 속에서 희망이란 꽃으로 피워올려 우리에게 넉넉하게 나누어 준 사람, 지금 그 사람을 그리는 글을 줄여 일부 소개하면서 슬픈 마음을 달래봤다.
장교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장교수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장교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하나님 사랑 안에 있었기에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고 눈물을 미소로 바꾸는 영혼의 연금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장교수는 고통스러운 눈물의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 안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을 지니고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기 위해 애쓴 사람입니다. 장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장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입니다. 본인의 표현대로 장교수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나날이 기적이었다면 이제 살아갈 기적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교수에게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기적이 있겠지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단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감이요,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약한 인간이기에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하느님을 뵈옵는 영광이 얼마나 크리라는 것을 헤아리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절규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단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감이요,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약한 인간이기에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하느님을 뵈옵는 영광이 얼마나 크리라는 것을 헤아리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절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특히 준비 되지 않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다. 현실적으로 생명질서의 법칙으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머리는 말하는데 가슴은 잘 안된다. 사랑으로 태어나는 삶이 선물인 것처럼 죽음도 또한 선물이지 않는가. 손을 마주잡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습으로는 우리곁을 떠났지만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부활을 믿는 소망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저서를 통하여 잊히지 않을 사람이기에 이렇게 우리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창조주의 배려로 하늘나라에서 생일을 마지한 장영희교수는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일계단을 이 순간도 오르고 있을 것이다.
*김미자 사대부고 11회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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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7.06.2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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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7.06.22 22:44
Essay to joy..
詩人 백석(白石)과 통영(統營) 이야기
시인 백석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을 詩로 남겨 통영을 더욱 아름답게 예찬하였습니다. 작은 도시 통영은 그래서 더 매력적입니다. 파라솔 밑 그늘은 팔월의 더위를 다 내쫓지 못해 훠이훠이 손으로 비켜나라고 물리치며 간 곳은 맑은 샘이 투명한 하늘을 물속으로 불러 두 개의 하늘이 마주보며 미소짓는 '정당샘'이 있는 명정동입니다 . 7월이 끝나던 날 여황산 자락을 가마처럼 타고 내려 와 터 잡은 '세병관'을 돌아 보고 내친김에 명정골까지 걸음하여 반나절의 시간을 기웃대다가 돌아간 곳입니다 그날 충렬사 앞 작은 공터인 정자옆에서 우연히 만난 백석의 시비, 가슴 아리게 하는 통영 2' 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시인 백석은 첫눈에 반한 통영 천희 박경련을 찾아 명정골로 세번이나 걸음하여 가슴 시린 애틋한 시를 남겼습니다. 백석의 가슴에 난으로 피어나 동그마니 들어앉은 통영 천희 박경련 어쩌면 그녀도 명정골의 '정당샘터'로 나가 빨래하고 물길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지분거리기도 했을까요? 열여덟 꽃같던 박경련은 백석의 세숫물에서 조차 그림되어 둥둥 떠다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운 그녀를 보려고 천리길을 달려와서 남도 끝자락 통영의 낡은 옛사당 돌계단에 주저앉아 쓸쓸하게 시를 지었을 백석을 생각 해 보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중략 시인 백석이 통영을 다녀 간 사연이 절절하고 애틋한 명정골 이곳에서 시작되는 퇴영이야~ 길을 따라 조용히 문학기행을 해보리라 생각했던 7월의 마지막 하루. 그날은 마음에서 갈수록 또렷해져 기어코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와 봅니다. 백석은 박경련을 고고한 난'으로 이름지어 자신의 시속에 심었고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되었습니다 . 토영이야~길의 여정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명정골에서 시인 백석과 통영 천희 박경련을 기억 해보는 의미는 특별한 그리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명정골은 사방으로 대밭골 망짝골 도독골` `약새미골` 등의 작은 골짜기를 아우르고 있어 그 골짜기 마다에는 서문고랑 숨은고랑 동사고랑 서답고랑 까죽고랑 등의 실개천이 흐르는 등 수량이 매우 풍족한 곳이었다" 약새미 (명정동 충렬사를 마주하는 안산아래 우물) 논새미 (명정 서호동의 경계지역 옛변전소뒤 우물) 돌새미 (해방다리 옆 우물) 등의 물이 내를 이루어 가죽고랑이라 했으며 그 위로 다리를 놓아 (해방다리) 서호동 바다로 흘러들었다. (김일룡 향토역사관장) (통영충렬사 창건시 명정明井 조성 유추에서 옮김) 한국을 대표하는 해금시인 (월북한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분류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939년에 만주로 갔다가...) 오늘은 백석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야기와 명정골을 잠깐 소개 해 보겠습니다.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이며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22살에<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4년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 후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 1938년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이듬해 만주로 이주하게 됩니다. 얼핏 보면 백석은 남쪽의 끝자락 통영과의 인연이 뜻밖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 그가 즐겨 쓴 시편들은 대개가 북쪽의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며 진한 토속성을 담고 있기에 '통영'이 비집고 들어 서기로는 생경 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운명적인 통영과의 만남이 실제로 명정골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 이화여고생 통영의 박경련 백석의 첫사랑 <통영의 란, 박경련> 이루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이야기거리가 풍성하게 만들어 지기도 하지요. 백석이 자야를 만나기 전, 첫눈에 반한 여인으로 인해 아피야했던 고통을 숨겨 놓은 통영의 서정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백석은 평북 정주태생으로 시인 김소월을 동경하여 시인의 길을 택했고 슬픈 사랑을 긴 인생길의 여정처럼 노래하며 채워 갔습니다 .백석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일보사에서 여성지의 편집 일을 하던 어느 날 1936년3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는데 백석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통영출신 친구 신현중이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경남통영출신의 박경련을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이렇게 그들의 운명은 시작 되었으며 백석은 통영으로 내려가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박경련을 아내로 달라며 정식으로 청혼하게 되었고 통영을 세번 방문 하게 됩니다. 그러자 박경련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친오빠(박경련의 외삼촌) 서상호에게 부탁하여 백석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당시 통영출신 거물급 인사였던 서상호는 독립운동가 이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서상호는 당시에 조선일보 사회부기자였던 신현중에게 백석의 뒷조사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며칠후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선생님 ! 그래 뭘 좀 알아봤는가 ? 예 ! 그래 백석이 어떤 사람인가 ? 예 !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여성지의 편집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이며 그의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란 소문도 있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서상호는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저 ~ 선생님 ! 왜 그런가 ?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 신랑감으로 저는 어떻습니까 ? 뭐 ! 어~그래 ! 허허허허 그거 좋지 ! 하지만 자넨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 아~아닙니다 ! 벌써 오래 전에 정리했습니다 ! 으~흠~; 그래 ! 그럼 생각해보세 ! 이렇게 해서 신현중과 박경련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그 해 4월 통영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1937년 4월에는 백석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백석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청혼했던 처녀 박경련이 결혼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백석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현중과...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버리자 상처를 받은 백석.. 그 후 백석의 가슴에는 통영의 여인이 통한의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석은 박경련의 고향인 통영마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사랑을 노래하며 그는 남해의 끝자락을 두 차례 더 여행을 하며 통영. 고성가도,삼천포 등의 시를 남겼습니다.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한 '통영'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 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가 나는 비가 나렸다" 이 시는 1935년 6월경에 씌어졌다고 보여지며 이어 백석은 두번째 통영행을 하게됩니다. 1936년 1월경으로 시 속에 등장하는 '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 천희 : 바닷가에서 시집 안 간 여자를 통영 거제 지역에서 천희 혹은 처이라고 불렀습니다. (# 담하 : 어릴적 할머니들은 처녀들을 보고 "처니야"하고 부르던 기억이 있슴 #) 또한 천희(千姬)는 남자를 잡아먹는(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속뜻도 있습니다. [처이..라고 발음할 때 콧소리로 해야.. 처녀..라는 뜻이 됨 = 펌글자 첨글] 미역오리 : 미역줄기. 소라방등 : 소라의 껍질로 만들어 방에서 켜는 등잔. 자신을 잡아먹은 천희는 바로 박경련을 지칭하는 원망의 정서를 깔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서로가 어색하고 서먹서먹하였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 사이였던 신현중은 박경련과 혼인 후 백석을 가회동 집에 처음으로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신현중의 부인이 된 박경련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 나는 그 때 깜짝 놀랐어요. 현중씨 뒤에 누가 들어오는데 백석씨라는 것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백석씨도 어색한지 방문 앞에서 얼굴이 빨개가지고 우물쭈물하고 들어오지 못 하고 있었어요. 백석씨는 부끄러워 숨는 것 같았어요. 나는 옆으로 빠져 나와 바로 옆집 외삼촌 집으로 갔어요. 나는 그 날밤 외삼촌 집에 있었어요. 그 다음 날 현중씨는 외삼촌인 죽사에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외삼촌은 그런 법이 어디 있나고 막 야단을 치고 현중씨는 상당한 초달을 받았어요. 그 이후 백석씨가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날 이후 현중씨는 얼마 있지 않아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받아 나와 함께 경남 통영에 내려가서 살았어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바로 밑에 명정동 집 말입니다. 그 때는 벌써 애도 생기고 농사일에도 신경을 쓰고 바닷가가 살기가 좋았어요."..옮긴 글 사랑했던 여인을 친구에게 빼앗기고도 말없이 바라만 봐야했던 안타까운 백석에게 어쩌면 통영의 그녀는 사랑의 영감을 詩로 태어나게 해 준 최고의 선물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두번째 '통영'에서는 구체적인 지명 "명정골" (현재의 통영시 명정동)이 나옵니다. 명정골은 '명정(明井)'이라는 샘이 있는 마을로 '명(明)은 '일(日)과 '월(月)을 합쳐서 붙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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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7.06.23 02:34
하루를 여는 시 한편,
오해
발목까지 물이 차는 해변을 걷는다
이제
오해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제
오해로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이 칠십은
오고가는 사람이 보이고
잔정 주듯이
발목까지 물이 차는 해변을 걷는다
ㅡ허충순(1945~ )아득하고 망망한 해역을 바라볼 때에는,
또 붉은 등대가 서 있는 해역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바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이 해상의 파랑들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마음의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으로
한 줄의 잠잠한 수평선도 길게 그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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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7.06.23 03:29
A candy-colored clown they call the sandman
Tiptoes to my room every night
Just to sprinkle stardust and to whisper
Go to sleep Everything is all right
I close my eyes, Then I drift away
Into the magic night. I softly say
A silent prayer like dreamers do.
Then I fall asleep to dream My dreams of you.
In dreams I walk with you. In dreams I talk to you.
In dreams you're mine. All of the time we're together
In dreams In dreams.
But just before the dawn I awake and find you gone.
I can't help it I can't help it if I cry
I remember that you said goodbye
It's too bad that all these things Can only happen in my dreams
Only in dreams In beautiful dreams. -
Chuck
2017.06.23 04:04
Did you know these,,
인순이 이야기,,
1972년, 닉슨이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하는 법안에
사인 함으로 써 아버지날이 제정 되었다. 어머니날이
국공일로 정해진지 무려 60년 만이었다. 월남전으로 많은
아버지들이 희생당하자 위로 차원에서 행해진 조치라고 한다.
요지음 아버지들은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쉴 틈이없다. 요리, 청소, 애 돌보기 등등
옛날 아버지들 보다 훨신 가사일을 많이 한다.
일년에 하루라도 푹 쉬면서 대접 받는 날이 필요 하다.
인순이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GI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혼열아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라져 버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학교에 가면 "더럽다"고 놀려서
고등학교를 포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로 성공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노력 한 결과 한국의 중견가수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노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넘쳐 흐른다.
아버지 날에 들어 볼만한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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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7.06.23 09:42
지난 삶에 애환,,
Working all day and the sun don't shine
Trying to get by and I'm just killing time
I feel the rain fall the whole night through
Far away from you California blue
California blue dreaming all alone
Nothing else to do California blue
Everyday I pray I'll be on my way
Saving love for you California blue
One sunny day, I'll get back again
Somehow, someway but I don't know when
California blue, California blue
Living my life with you on my mind
Thinking of things that I left far behind
It's been so long doing all I can do
To get back to you California blue
Dreaming all alone
Nothing else to do
Still missing you California blue ~~ -
김영교
2017.07.08 19:38
척척박사님:
격조했드랬습니다.
건강하시고요?
봇물로 부어지는 아주 유익한 정보와 문헌, 그리고 작품들
전반적인 문학 이야기 그리고 음악도
저의 capacity로는 감당이 안될정도로
저를 확대시키네요.
급성장해서 터지면 어떻하지요?
감사합니다!
ps:이해인, 백석도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입니다.
Ode to joy.
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
"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 월간『아동문예』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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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걷기가 너무 힘이 들어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영감~, 나 좀 업어 줘!" 할아버지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사내 체면에 할머니를 업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물었다. "무거워?" 할아버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무겁지, 얼굴이 철판이지 머리는 돌이지 간댕이는 부었지 심장은 강심장이지, 그러니 안 무거워?" 한참을 그렇게 걷다 지친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멈, 이젠 할멈이 나 좀 업어주면 안될까?" 기가 막힌 할머니는 그래도 할아버지를 들쳐 업었다. "생각보단 가볍지?" 그러자 할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가볍지. 골은 비었지 쓸개는 빠졌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 없지. 너~무 가볍지."
요즘 유행어로 ‘디스’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말 나온 김에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에서 이 ‘디스’라는 영어가 교묘하게 '있어 보이는' 말처럼 포장되어 방송이고 학교에서고 마구 퍼져 유통되고 있다. 무례와 결례라는 뜻을 가진‘disrespect’이란 단어의 앞 철자를 딴 것인데, ‘비하하다, 험담하다, 폄훼하다, 깎아내리다’란 의미로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힙합 음악에서 래퍼가 손가락질 해가며 ‘디스 배틀’을 벌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전에선 그렇게 서로 헐뜯기 시작하면 결국엔 곱게 말로 끝나기는 어렵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다. 아니 요즘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라고 고쳐 말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는 ‘오는 말이 곱지 않아도 가는 말은 고와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려는 사람도 있다. 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이 상대방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준 사례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웃는 낯에 침도 뱉는 세상이라 왼쪽 뺨까지 내미는 경우는 오기와 깡의 발동이 아니고서는 현실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철저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탈리오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상대를 귀히 여기면 상대도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인간의 공격본능 탓일까.의도된 폭언이나 막말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도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그 상처는 곧 비수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 저명한 정신의학자의 진단으로는 ‘세로토닌 결핍증’ 탓이라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런 교감신경 과잉 흥분에 걸린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이다. 말뿐 아니라 돌발행동으로도 이어진다. 일단 폭발하면 분노 반응이 더욱 격화되어 평생 후회할 일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아름답고 향기 있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어의 순환법칙을 염두에 두고 말의 온도 (해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