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풍경속의 지푸라기

 

<그늘 반 근>의 시집 첫 장에는 김영태화백이 직접 쓴 그의 사인이 적혀있다.

'친구 영교,

내게 남은 건 그늘 밖에 없군요.'

草芥

 

초개는 그의 아호이다. 김영태화백은 늘 반 근의 여백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없는 듯 꽉 채우며, 모자라는 듯 가득했다. 실체 없는 그늘이 존재 할 리 없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의 개입으로 그늘의 존재가치는 더욱 선명해졌다. 풀기 가신 윗도리, 그 아래 헐렁하게 삶의 원고지를 놓고 하루하루 지고의 미(美)로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자유인, 가끔은 이빨도 아프고 기가 질리는 속 쓰림마저 껴안고 외로움과도 살을 섞으며 살아갈 줄 아는 그가 옆에 있어서 그와의 사귐이 소중했고 서가엔 그의 저서들이 거의 다 꽂혀 있는 게 나로선 큰 자랑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서울 살 때 그 옛날 그가 일러 준 아호는 목우(木雨)였다. 그때 그의 시작활동은 아주 왕성했다. 나무가 물을 만나 더욱 푸른 생명으로 충만했다. 첫 아들에게 목우를 넘겨주고 자신은 초개가 되어 '초개수첩'을 내 놓았다. 어느 날 초개 얼굴을 기라성 같은 미녀들에게 돌리더니 무용평론계의 독보적 존재로 지상(紙上)을 주름 잡았다. 본래 그의 '다재 다능'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건너 사는 나에게는 늘 경이로운 바람이었다.

 

김영태 시인이 자신을 일컬어 초개라고 부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푸라기와 풀잎은 '풀'에 근원을 두고 있다. 풀이 별 것은 아니지만 우주와 교감하는 물방울을 지닐 줄 알았다. 연약한 풀잎에 물방울이 맺히면 신비에 감전된 듯 그는 안테나 몇 개나 더 달고 예술의 하늘을 환하게 열어 재낀다. 그의 말대로 '춤추는 풍경'을 풍경인이 되어 들락거리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목에 힘 줄줄 모르지만 무게 없는 초개의 눈은 항상 번득였다. 바싹 말라 버린 지푸라기 같은 보잘 것 없는 비 생명체마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치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명에는 에너지라는 질긴 힘이 내재율(内在律)로 잠복해 있었다. 생명 에너지가 풀이라면 에너지의 부재는 지푸라기다. 에너지는 그의 예술을 위해 완전 연소되었다. 서로 연결되어 풀과 지푸라기, 생과 사, 밤과 낮, 선과 악, 유와 무, 등의 상극의 에너지로 미를 극대화시키는 우주의 원리를 늘 제시하는 장인이었다. 예리한 직관력은 한 순간도 그냥 낭비되지 않았다. 우주의 호흡을 따라 음악이 늘 배후에 초대되었고 음악평론집만 보아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걸 쉽게 알아 체릴 수 있었다.

 

풀잎과 지푸라기의 두 세계를 다 공유하면서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가슴이 서늘하게 떨릴 정도로 압권이었다. 무게도 없는 불과 반 근 밖에 안 되는 그늘의 실존은 옷깃을 여밀 정도로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말수가 비교적 적은 그가 유독 ‘유서’라고 덧붙이며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을 먼저 읽어 보라며 건네준 '그늘 반 근'의 표지엔 특유의 필치로 자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평생을 모았던 춤과 시와 그림 외 모든 책을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안에 아르코 자료관에 기증하였다. 문화예술 진흥원의 김영태 자료실에는 육성 녹음과 그 유명한 1200명의 <예술가의 초상>이 다 보관되어있다. 예술가의 초상 아홉권째 책 134쪽에 내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어 부끄럽지만 시인의 보람을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다.

 

7권의 나의 시집과 4권의 수필집 표지 그림을 애정으로 그려준 김영태 화백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충격의 전화를 받은 게 어제 같다. 그 후 두 차례 서울 방문은 주로 건강캠프며 건강식을 소개해주느라 큰 오라버니와 다행이 자주 만나 시간을 함께 했다. 나는 5월 중순 돌아왔고 지난 7월 12일 김영태화백의 부음을 들었다. 71세를 일기로 그늘 반근의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장사익의 추모곡 '찔래꽃'을 들으며 강화도 전등사 느티나무 수목장으로 초개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 특유의 필치로 사인해서 선물로 안겨 준 김영태시전집(1959-2005)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와 'Ma Vie II' 가 지금도 그의 체온을 따뜻하게 전해주고 있다. 실력 있는 무명의 발레리나를 일약 정상에 올려 세우는 무용평론가의 실력- 관객과 나눔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반 근의 화살로 세상을 관통하던 쟁이, 한 세기를 풍미했던 지푸라기 초개 풍경인은 살아있다, 아름답게 이렇게 살아있다. 이렇게 깊숙이 우리 가슴에.


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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