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24 20:27

문단권력 또는 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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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권력 또는 공해]

이동희 단국대 교수


* 국문개요
* 목 차
1. 문학과 비평
1) 서두 첨언
2) 비평가는 작가인가
2. 문단권력의 실체와 병리
3. 비평의 전락
4. 부록1․문단정치와 문학민주주의
5. 부록2․작가란 무엇인가
* 참고문헌



1. 문학과 비평

1)서두 첨언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몇 권의 신간 비평서적을 읽고 여기 저기 발표한 글들을 뒤적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며 문단이란 이런 곳인가, 내가 평생 동안 추구해오고 모든 정열을 다 쏟아온 문학과 문단이 이렇게 재미없는 판이었던가, 참으로 실망스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의도는 ‘문단과 권력’이라고 해서, 현재 문단정치라고 할까 문단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한 마디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것도 물론 문단 권력에 속하지만 비평의 권력, 문학의 권력, 또는 문학 폭력 문제 등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앞에 얘기한 대로 실망을 하고 환멸을 느끼어 쓰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무엇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2)비평가는 작가인가

문학권력․문단권력이 존재하고 그런 권력이 행사되며 영향을 미치는 문학은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이 아니며 문단이 아니다. 문학 행위를 가장한 파렴치한 문학 외적인 목적에 급급한 외도이며 허세에 불과하다. 문단 쓰레기이며 문학공해일 뿐이다. 그런 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뭘 쓰고 있다면 큰 착각이며 스스로 생각한 문학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문학을 정치나 상업에서 문학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이 글의 결론이 될 것이다.
비평의 어원을 찾아보면 ‘분할, 구분, 식별하다, 권위 있는 의견을 말하다, 재판관, 심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보아 평가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작업이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비평은 작품의 향수를 위한 예술적 가치와 그 가치의 성립에 대한 판단을 하여 작자와 독자를 매개하는 사명을 띠는 것으로 그 기능이 작가에게 작용하고자 하는 경우와 독자에게 해설자의 위치에 서는 두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문예비평의 원리는 작품을 통해 귀납되어야 하고 작품을 올바로 읽고 판단함으로써 작가 작품의 평가와 독자의 이해에 기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평론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이다. 그것은 평론의 생명이다. 거기에 작가정신이 수반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작가는 자기 작품의 결점 지적이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하여 반발을 하고 분개하기도 한다. 체호프는 비평가를 쇠꼬리에 붙은 파리라고 하였고 괴테는 비평가를 개라고 하며 내쫓았다. 오늘 우리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매체를 통하여 많은 작품이 발표되고 매일 수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는 현실에서 문학과 비문학,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분하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 작품을 평가하여 선택하는 일,. 그 평가 선택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는 작업이 문학비평이다. 나아가서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면은 그 극복 지향의 방향을 제시하여 문학 예술 수준의 상승을 주도하기도 한다.
비평은 창작의 창작으로서 단순히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결점과 장점을 판단하여 논하는 비평과 문학비평의 다른 점이며 정치평론 스포츠평론과 다른 점이다. 문학비평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예술적 구조를 가져야 하며 작품의 조건을 갖출 때 비평문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또 문학비평은 엄밀한 논리를 수반하기 때문에 학문으로 귀속되기도 한다. 김양호, ꡔ한국현대소설과 비평의 만남ꡕ(한불문화출판, 1993), p.3.

최소한 이런 것이 문학원론에서 배운 비평문학 문학평론의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되는 비평은 비판이 없으며 예술적 작품의 구조를 갖고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가장 중요한 핵이 빠져버린 것이다. 거세된 비평이 되어버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비평이 문학 예술임을 망각하고 비평가가 문학 예술가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작가가 아니기를 바라는가.

2. 문단권력의 실체와 병리

문학권력․문단권력은 문학병리 현상이다. 우리 문학 비평은 언젠가부터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사회 현상일 수는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건강해야 하지만 문학이 병들면 그 사회는 지표를 잃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여기 저기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 문학권력 논쟁에 대한 글 가운데서 그 병인이라고 할까 상황을 옮겨보면, ⑴영상산업의 번창, ⑵이념의 상실, ⑶신세대 문학의 허약성, ⑷출판상업주의 등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통용되고 있는 문학위기론의 배경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⑴민족문학 내지 민족문학론의 위기, ⑵포스트 증후군으로 대변되는 문명사적 변환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른 문학적 위상변화가 탐지하고 있는 위기, ⑶문학출판의 위기 등이다. 그러나 이 진단 자체가 비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전투구를 하고 있는 처지여서 그것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런 유의 진단서를 골고루 첨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말려들어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어떤 경우라도 미화될 수가 없다. 정치권력은 사회적 가치의 방향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정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문화 문학의 권력이란 무엇인가. 문단권력은 패거리의 행패에 불과하다. 문학권력이 존재하고 거기에 작가가 굴복한다면 문학은 패거리와 상업주의에 굴복하는 것이 된다.
2000년에 들어와 문단과 학계에 일고 있는 문화권력․문학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화혁명의 기운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그동안 쌓아올려진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들이 차례차례 도전을 받고 부정되어 왔다. 그리고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어느 순간 다시 도전을 받고 부정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 문학 예술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가, 어느 것이 개혁이고 누가 어용인가, 신어용은 무엇인가, 냉정한 사려가 필요하다. 전환기에 문학예술인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정치권력의 예속에서 벗어나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정신을 찾는 균형감각이다.
최근 문학권력․문단권력 등의 문제를 성찰하는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ꡔ한국 현대문학의 제도적 권력과 사회ꡕ 정현기, ꡔ한국 현대문학의 제도적 권력과 사회ꡕ(문이당, 2002).
는 한국문학 속에서 정치 읽기, 역사, 문학권력, 문학전통, 한국사회 등 문학을 둘러싸고 제도권이 형성되는 양상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문단의 제도와 권력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문학권력․문단권력을 해부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정신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문학권력․문단권력에 대한 비평서들이 많이 나왔다. 김명인 외, ꡔ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ꡕ(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 강준만․권성우, ꡔ문학권력ꡕ(개마고원, 2001); 권성우 ꡔ비평과 권력ꡕ( , ); 홍기돈, ꡔ페르세우스의 방패ꡕ( , ) 외 문단권력의 실체와 문언유착의 현실을 비판한 많은 비평서를 접할 수 있었다.

우리의 문단은 《창조》《폐허》와 같은 동인지로 출발하였다. 초창기 한국문단은 동인문단이었다. 그러나 초창기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다분히 동인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것을 다 말할 지면은 없고 60년대 초까지 쌍벽을 이루었던 《현대문학》과《자유문학》의 주류들과 출신 작가들로 양대 파벌을 형성하였다. 한국문학가협회와 자유문학자협회가 그것이다. 그 뒤에 성격은 다르지만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부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작품의 발표, 비평, 출판, 문학상, 문단의 감투 등이 그 파벌에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그런 문단의 폐해라고 할까 권력은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문단의 속성으로서의 유파였고 파벌이었을 뿐 거기에 패거리를 이루지는 않았고 적어도 상업성이 게재되지는 않았다.
“흔히 문예지를 문학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라고 부르곤 한다. 그리고 작품 게재권을 쥐고 있는 편집자를 문학 권력자라고 여긴다.” 김수복, 「<시와 반시>, 오기와 고독의 ‘시의 政府’」, 《영남일보》문화칼럼, 2002. 9. 3.
“(본문에서 이어짐) 권위주의 시대 우리 문단은 대체로 이 문학 권력을 중심으로 문학과 시대에 맞서 왔고, 그 공으로 문인들은 그 문예잡지의 권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고 숭상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그 정부에 편입되기를 기원하며 그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며 힘을 쏟기도 했다. 이 권력들은 대체로 우리 정치현실이 그렇듯이 ‘서울 공화국’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이 중앙권력을 향해 작품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유통 자체도 대체로 서울 중심 구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방에서의 ‘작은 정부’ 만들기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문학권력 문단권력의 실체로서 60년대 등장한 계간 문예지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한 문예지를 얘기한다. 문학권력이라고 할 때 또 그런 문학 계간지, 문학출판사, 문학비평가, 이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힘을 행사하고 있는 비문학적인 작태를 말한다.
“이런 문학권력이란 패거리주의에서 도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문인들이 문예지를 창간하고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어떤 힘을 발휘하면, 그들은 집필과 작품 게재의 문을 동아리적으로 폐쇄하고 적극적인 언론 홍보와 영업활동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소성, 「패거리 문학의 폐해」(《소설시대》 3집, 2002. 3. 1), p.273.

이런 패거리주의는 ⑴문단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야심가들에 의해서 시도되고, ⑵문단정치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도되며, ⑶새로운 문학에의 갈증에 의해서 시도된다. ⑷언론홍보용으로 시도되는 경우도 있고, ⑸발표지면과 평론가를 따라가는 패거리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loc.cit.

문학은 그 자체가 권력일 수가 없다.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다. 문학권력 문단권력의 환상에 젖어 있는 우리의 일부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그러한 문학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하면 문학의 위상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문학일 수 있으며 또 부단히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이 시대 문단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비평의 전락

비평의 핵심은 비판이다. 그런데 그런 핵심이 거세된 비평이 횡행하고 있다. 주례사 비평이라는 것이 있다. 주례가 신랑과 신부를 앞에 놓고 짤막한 시간에 몇 마디 좋은 얘기만 하는 것이 주례사이다. 사실 주례사도 칭찬 일변도의 미사여구만 늘어놓아서는 좋은 주례사가 되지 못하므로 간혹 뼈 있는 한 두 마디를 하지만 신랑 신부를 곱지 않다고 비판하는 주례는 없다. 그런 주례사와 같은 비평을 주례비평, 근친비평, 근친상간, 동종 번식이라는 용어를 써서 냉소하기도 한다. 의전비평, 연인비평, 남근비평이란 말로 낯 뜨거운 논전을 벌이기도 한다. 비판 없는 비평은 비평 축에도 들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이 문단의 전면에 부상할 수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주례사 비평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문학출판의 상업주의화에 있고 비평가가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인가?’ 강준만․권성우, op.cit., p.54.
라는 제목은 참 거론하기조차 민망하다. 평론가는 문학자본의 파출부이며 비평가가 문학 산업의 홍보요원 외판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문학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학출판은 광고 스케일이 커지고 상업주의화 되어 갔다. 그래서 비평은 의도적으로 신화 만들기, 스타 만들기, 베스트셀러 시스템을 구축하는 상업주의 전략화에 말려들어 갔던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경쟁력이 있고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골라서 출판한다. 거기에 비평가들이 해설을 써서 첨부한다. 여기서 작가와 작품은 신랑 신부가 되고 비평가는 주례가 된다. 그래서 소위 주례사 비평이 이루어진다. 해설의 대표적인 미사여구는 책의 표지에도 등장한다. 책의 출판과 동시에 집중적으로 신문에 5단통 또는 전면 광고를 내보내고 여러 신문 문화면에 기사가 나가게 하고 방송에도 신간 소개, 대담프로 등으로 작가와 작품을 띄우는 등 선전 홍보 수단을 총동원한다. 언론사와 기자를 매수하여 심지어 어느 신문 문화부는 어느 출판사 선전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기자들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고 비평가들이 다시 등장하여 서평을 쓰고 그 서평과 해설이라는 이름의 주례사는 계속되는 광고와 홍보전략의 선전자료로 이용된다. 그렇게 비평은 상업주의적 문학출판 자본에 묶이게 된다. 비평은 자본에 종속되고 비평가는 노예가 된다.
그런 3박자가 맞으면 일시에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리게 된다. 10만 부, 20만 부, 50만 부…… 베스 셀러가 된다. 베스트셀러 시스템의 과정은 반복되고 그런 가운데 비평가의 종속화는 굳어지게 되고 에콜을 형성하고 그것은 또 패거리를 이룬다.
하나의 과정이 더 있다. 문학상이다. 베스트셀러 시스템은 스타 시스템 작동과 병행된다. 그 시스템이 다 특정 문예지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문예지는 출판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다시 문학상 수상 작전을 펴고 문학상 수상은 판매 부수로 직결된다. 문학상도 스타 시스템의 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출판자본 작가 비평가 언론의 야합으로 문언유착과 비평의 악순환이 연속된다. 학연 지연 친분이 여기 가세를 하여 비평의 현장은 시장 바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집착하고 있고 우리 시대의 많은 소설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하여 씌어지고 있다. 박덕규, 「붕괴 또는 확산-대중문화 속의 소설의 운명」, 《소설과 사상》(1993. 겨울호), p.253.
출판자본은 작가를 억압하고 있으며 문단은 황금만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학풍토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대중문학이며 통속문학이다.
본격문학 순수문학을 묵묵히 추구하는 작가들은 뒷전으로 물러 앉히고 그 앞자리에 대중문학을 내세움으로써 한국문단을 황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황순재, 「젊은 비평의 주체와 진정성-90년대 대중문학 논쟁을 중심으로」, 《작가세계》(1996. 가을호), p.403.
“이제 본격문학을 수호하려는 비평가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문화의 주도자의 자리에 서 있지 않은 듯하다. 대중문학론자에게 그 자리는 넘어가고 있고, 문학적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본격문학론자의 부단한 노력은 곡해되고 설익은 논리에 무시되면서 패퇴를 강요당한다.”

이것이 한국문학의 현주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서글픈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고 가령 주례사 비평에 메스를 가하고 두껍게 쌓아올린 문학 문단 권력의 벽에 반기를 들고 맞서고 있는 젊은 비평가들의 용기와 의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문단권력을 비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마치 서부 활극이나 게릴라전과 같은 논쟁을 보면서 혼란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판은 좋다. 문학이 되고 작품이 되고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발전적 논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작가들이 많다. 좋은 작가들도 많다. 몇몇 소위 상업주의에 오염된 인기 작가들에게만 매달려 끌려 다니지 말고 부단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여 할 것이다. 가능성은 신예작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묵묵히 작품에만 매달려 오로지 자신의 길에만 정진하고 있는 작가주의 작가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진행형인 작가들에 대한 면전 평가보다는 땅 속에 들어간 작가들과 미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여야 할 것이다.

4. 부록1․문단정치와 문학민주주의

문단이 말이 아니다. 이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 대다수의 문인들이 문단이라고 하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든다. 원로들은 오늘의 문단에 대하여 개탄하다 못해 외면하고 만다.
여기서 문단이라고 함은 선거에 의해 그 수장을 뽑고 그에 의해 전개되는 문단 행정체계를 말하며, 일부 몰지각한 인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대표적인 문인단체를 말한다. 이동희, 「문단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문인》(2002. 4, 5), p.44.

누가 문단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선 문단 지도자들이 교양이 있고 상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법을 지키고 규칙을 지켜야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건 범법집단이다.
문단은 문단정치를 하는 사람이 이끌어서는 안 된다. 문학계의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는 사람들이 일정 기간 봉사를 하면서 문단의 위상을 국내외적으로 높여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갖고 문학풍토를 부단히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문단 인사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득표 구걸 행각을 하고 공공연히 돈을 거둬가지고 그것으로 선거자금을 하여 조직적으로 전화를 걸어대고 술을 사고 돈 봉투까지도 돌린다. 이래가지고야 정상잡배지 어디 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표만 긁어모아가지고 당선이 되어서는 다시 재선이 되기 위해서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신입회원을 무더기로 입회시킨다. 문단이라고 하는 문턱도 없고 권위도 없다. 오로지 자기 회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문학이다 예술이다 권익이다 하는 것들은 뒷전이다. 염불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눈독을 들인다. 신의도 없고 양심도 없다. 그런 문단 악을 비호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은 또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이 문단에 발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 요즘 산골 읍․면에서도 그런 선거는 안 한다. 문인들 스스로가 체통을 지켜야 한다.
문인은 정치를 하는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주고 감동을 주는 문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단의 수장은 이 시대를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배와 원로를 앞세우고 서로 권하고 사양하며 봉사하는 문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문단의 단체장으로 당선되기까지 말할 수 없는 잡음과 폐해를 뿌리며 당선이 되고부터는 독재가 시작된다. 우선 독단적으로 이사 선임을 한다. 이사 선임은 각 장르 분과회장의 추천을 받아서 구성하는 것이 관례이나 이번 회기의 한 이사장의 경우 부이사장들에게는 통보도 않은 채 분과회장에게 각 분과 이사 수의 2분의 1만 추천하도록 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여 추천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이사장의 측근들로 이사구성이 되었고 중요 안건 처리의 공정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무원칙하고 독단적인 이사장의 의견이 이사장단 분과회장 연석회의에서 협의도 없이 처리되어 집행되고 있다. 그 한 예만 보더라도 문단의 민주화는 요원함을 느끼게 한다.
기관지인 문학지의 편집위원도 임원진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대부분 이사장의 측근 인사로 구성한 데다가 가동도 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편집 발행을 함으로써 문학지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있어 다수 회원의 원성을 사고 있다. 문학지를 두껍게만 만들므로 전화번호부 또는 쓰레기통이라는 비난을 하고 있지만 우이독경이다. 신인상 심사위원 및 월평 필자 등의 선정도 각 장르별 분과회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심사와 평론의 신뢰와 권위를 가질 수가 없다. 심지어는 한 임원에게 어느 문학상을 받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기관지의 귀중한 지면에 두 번씩이나 공개 변명함으로써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 외 신입회원 심사 문제, 특별 위원회 설치문제를 독단적으로 처리할 뿐 아니라 도덕성 문제, 인사 전횡의 문제, 합의도 없는 성명서 발표 등 수 없는 문제를 안고도 오로지 다음 선거에서 재당선하겠다는 일념으로 회원관리에 영일이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정리하여 다음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⑴통일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끌고 승화시켜야 될 임무를 문인 작가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문단부터 통일을 해야 할 것이다. 문단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사분오열 되어 있다.
⑵문인단체는 문인들의 사랑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막걸리가 있고 커피가 있고 재떨이도 있고 원로들이 놀러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탁자 하나면 된다.
⑶정치인들보다 한 술 더 뜨는 선거 풍토를 바꿔야 한다. 문단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면 문인들의 얼굴을 전부 반쪽으로 갈라놓고 만다. 그리고 문단의 수장은 여러 모로 문인들의 신망을 많이 받고 있어야 하겠지만 작품으로도 평가받는 훌륭한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5. 부록2․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가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이며 비평가란 무엇인가. 모든 장르를 포함해서 작가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또 무엇을 위하여 작품을 쓰는 것인가. 펜을 들기 전에 먼저 풀어야 할 화두이다. 이런 원론적인 문학 예술적 자세가 너무도 아쉬운 시대이다.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이 시대 이 사회를 위하여 쓰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쓰는가. 잔뜩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자기 얘기만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은 밤 이른 새벽 스스로에게 숙연히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참으로 잡지(문예지)도 많고 신문도 많고 방송도 많고 그래서 작가도 많다. 한국문인협회 회원만도 6천명이다. 문인이 많은 것은 좋다. 모두가 문인이 된다면 이 땅은 낙원이 될 것이다. 적어도 요즘 정치 경제사회처럼 개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작가 같지 않은 작가, 작품 같지 않은 작품, 문예지 같지 않은 문예지가 참으로 많다. 평생 문학 외적인 욕망에 끌려 다니며 버럭만 치고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는 작가가 참으로 많으며 그들의 몸짓과 작품은 오늘날 심각한 문학 예술 공해가 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문인을 너무 양산하고 남발하고 있다. 도대체 뭘 할 게 없어서 문인 장사 신인 장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다. 작가가 무엇이며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운영하는 문예지들이 많다. 그런 것은 문학이 아니고 쓰레기일 뿐이다. 문단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한 술 더 떠서 그런 세력들을 비호하고 있다. 도무지 신의도 없고 양심도 없이 표만 긁어모아 가지고 회장이 되겠다 이사장이 되겠다고 하는 문단이 무슨 문단이란 말인가. 그것은 한국문학과 한국문화를 먹칠하는 사기집단에 불과하다. 문인의 권위를 스스로 지키고 문인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서 작가들 서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동희, 「무안 선언」, 《농민문학》(2000. 가을호), p.41.

문학과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그 외에 어떤 사치스런 장식도 그것은 헛된 망상이며 착각의 몸부림일 뿐이다. 문단도 조직인 만큼 정치가 필요하며 지도적 역량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와 혼탁한 사회의 행태를 답습하기보다는 부단히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는 문화의 창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 자체가 작품이며 행동 자체가 예술이 되도록 스스로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럼으로 해서 이 사회의 오류와 삐뚤어진 방향에 메스를 가할 수 있고 지도력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이기주의와 함께 집단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가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중국에 핸드폰을 수출하기 위해 마늘을 수입함으로 해서 농민들이 땅을 치며 울게 하고, 그 대가로 로얄티를 외국회사에 싸다 바치고 있는 정책은 무슨 이기주의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신판 황금만능주의 국가이기주의를 고발하며 이 시대의 작가들에게 묻는다. 이러한 답답함을 보며 작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로지 베스트셀러만 추구할 것인가.
추수를 하여야 할 농민들이 고속도로와 여의도 광장에 머리띠를 두르고 추위에 떨며 메아리 없는 외침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남북이산 1세대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한 달에 100명씩 이산가족을 만난다면 1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 인류를 울리고 있는 이 민족의 분단 드라마를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우둔한 정치논리에 맡겨야 하겠는가.
이 시대 모든 작가들에게 막막한 우문을 던지며 우리의 현실과 민족의 내일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할 문학의 논리 작가정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문학권력․문단권력이 존재하고 그런 권력이 행사되며 영향을 미치는 문학은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이 아니며 문단이 아니다. 문학 행위를 가장한 파렴치한 문학 외적인 목적에 급급한 외도이며 허세에 불과하다. 문단 쓰레기이며 문학공해일 뿐이다. 그런 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뭘 쓰고 있다면 큰 착각이며 스스로 생각한 문학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문학을 정치나 상업에서 문학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이 글의 결론이 될 것이다.
문학권력․문단권력은 문학병리 현상이다. 우리 문학 비평은 언젠가부터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사회 현상일 수는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건강해야 하지만 문학이 병들면 그 사회는 지표를 잃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문학은 그 자체가 권력일 수가 없다.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다. 문학권력 문단권력의 환상에 젖어 있는 우리의 일부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그러한 문학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하면 문학의 위상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문학일 수 있으며 또 부단히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이 시대 문단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비평의 핵심은 비판이다. 그런데 그런 핵심이 거세된 비평이 횡행하고 있다. 비판 없는 비평은 비평 축에도 들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이 문단의 전면에 부상할 수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작가들은 베스트셀러에 집착하고 있고 우리 시대의 많은 소설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하여 씌어지고 있다. 출판자본은 작가를 억압하고 있으며 문단은 황금만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학풍토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대중문학이며 통속문학이다. 본격문학 순수문학을 묵묵히 추구하는 작가들은 뒷전으로 물러 앉히고 그 앞자리에 대중문학을 내세움으로써 한국문단을 황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문학의 현주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서글픈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고 가령 주례사 비평에 메스를 가하고 두껍게 쌓아올린 문학 문단 권력의 벽에 반기를 들고 맞서고 있는 젊은 비평가들의 용기와 의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문단권력을 비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작가들이 많다. 좋은 작가들도 많다. 상업주의에 오염된 인기 작가들에게만 매달려 끌려 다니지 말고 부단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여 할 것이다. 가능성은 신예작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묵묵히 작품에만 매달려 오로지 자신의 길에만 정진하고 있는 작가주의 작가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진행형인 작가들에 대한 면전 평가보다는 땅 속에 들어간 작가들과 미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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