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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아버님께 올리는 편지
    




여러 해 전 아버님께 올렸던 편지 한 통

지난 설에 김천에 가 뵌 이래 안부도 한 번 못 여쭙고 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렇게 아버님께 편지 한 통을 올리려는 생각으로 새벽에 일어나 앉았습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났는데 잠이 다시 오지 않아 펜을 들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직한 표현이겠지요. 제가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님께 편지를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최근에 '아버지'가 제목에 들어가는 시를 세 편 지상에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작년에 칠순을 맞이하셨지만 워낙 건강하시어 칡과 덤불로 뒤덮인 동네 뒷산을 개간하여 갖은 채소를 다 심으셨고, 산림감시원으로 취직이 되어('취직'이란 말이 다소 어폐가 있습니다만)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직지사 뒤 황악산으로 출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시 속에서 아버님을 전신 마비의 환자로 묘사했고, 임종의 순간을 그렸으며, 외람되게도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는 제목으로 써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세 편의 시, 먼저 보여 드립니다.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버지는 침대 위에 지금
놓여 있다 전신 마비의 상태로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입을 뒤틀면서
진땀을 흘리는 아버지
배를 불쑥 내밀고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

튜브, 외과용 윤활제, 주수기(注水器) 같은
관장을 위한 기구들을 갖다놓고
고무장갑을 낀다
손가락 한 개를
나중에는 두 개를
아버지의 항문에 집어넣는다
가스가 새어나오도록
자극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제 목소리 들리세요?
목소리 들리면 제 손을 꼭 잡으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구두 반응 없음 근육 반응 없음
눈 자발적으로 뜨지 않음

자발적으로 배설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몸 속에 숨어 있는
삶에의 의지를 자극하고자
나는 지금 손가락으로
처음에는 부드럽게
점점 힘을 주어 넣되
아프지 않게

아프지는 않게, 아버지가
편히 똥 눌 수 있게, 아버지가
악취를 풍겨 후련해질 이 이승에서.
----[아버지의 숙변을 받아내기 위하여] 전문

몸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
눈을 뜨신 아버지
가족 한 번 쳐다보고
천장 한 번 쳐다보고
눈을 감았다가 금방
다시 뜨신다
이 세상 이 순간 이렇게
뜨기는 싫으신 듯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원한 암흑,
죽음의 세계일 테니
한 번만 더 눈을 뜨자
한 번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사물을 보자고
자, 한 번만 더 눈을 뜨자고
아버지는 안간힘을 다하고 계신 거다
삶의 마지막 암벽에
지금 매달려 계신 거다

오르고 미끄러지기를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예닐곱 번
마지막 기운마저 빠지자
눈을 크게 떴다가
감으신 아버지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신 뒤
숨을 멈추셨다
그 몇 방울의 눈물로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 된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다] 전문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던진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아버님이 보셔도 별 어려움 없이 이해가 될 시일 것입니다. 자식에게 또다시 크게 실망하셨거나, 몹시 언짢아하고 계시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저는 이제껏 4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린 적도, 흡족하게 해 드린 적도 별로 없는 자식이었지요. 1975년의 첫 가출 이후 오히려 늘 걱정을 끼쳐 드린 못난 자식이었습니다. 오죽 실망이 크셨으면 상주 순혜 이모님께 부쳐드린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를 동생네 집에 놀러간 어머님을 통해 읽어보시고는 분개하시어 친척들 다 불러모을 테니 당장 김천에 내려와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다 읽으라고 불호령을 내리셨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비록 허구인 시 속에서이지만 자식이 멀쩡한 아버지를 중환자로 만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도 모자라 감히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고 있으니 엄히 꾸중하고 싶은 기분이 들 법도 할 것입니다.
아버님. 치미는 노여움을 잠시 억누르시고, 제 말씀 조금만 더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는 동서고금의 문호, 그 누구의 고백록이나 참회록보다 더 솔직한 마음으로 쓰고 있는 제 영혼의 부르짖음이랍니다.
아버님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 이유를 아버님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내가 성질이 좀 급하고 불뚝성이 있어서……"란 딱 한 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뉘우침이나 후회의 발언을 한 적 없으신 아버님이어서 제가 10대 때 가출을 거듭했던 이유도,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했던 이유도, 선영이가 저렇게 13년째 정신이상자로 살고 있는 이유도, 어머님이 지금껏 신경안정제를 마약처럼 끊지 못하고 계시는 이유도 아버님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형과 저를 불러놓고 하는 훈육은 두 자식과 며느리의 불효에 대한 꾸지람 일색이셨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4학년 때 처음 '저런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뇌리에 순식간에 떠오른, 자식으로서 절대로 하면 안 될 생각을 했기에 몇 달을 고민하였고, 심야에 일어나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도 수없이 했고, 고개 쳐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 땅만 보며 걸어다닌 나날이 참으로 길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께에 이르러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면 대한민국의 법은 나를 유죄로 판정하겠지만 하늘나라의 법은 나를 용서해줄 것이라고.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하니까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끔찍한 일들을 다 보았을 테고, 그럼 나를 반드시 용서해줄 것이라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과 취업을 하여 독립해나갈 때까지 아버님은 생부를 죽여도 죄 될 것이 없다는 천하의 불효자를 슬하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10대 때의 그 무모하고 철없는 반항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이런 시를 써 보냈다고 야속하게 생각하셔도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이제 아버님과 저는 머지 않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결별해야 할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생명체인 인간이 물리적인 시간의 힘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제 자신을 단죄하는 심정으로, 아니 아버님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세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을 용서하고, 또 아버님께 용서받지 않고서 마지막 순간, 이승에서는 영원히 마지막이 될 순간을 맞게 되는 일을 저는 피하고 싶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이란 것이 아버님의 임종일 수도 있지만, '참척(慘慽)'이라는 경우를 아버님이 졸지에 당하실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제가 이런 시를 썼고, 문제의 그 시집 이후에는 시집도 부쳐드리지 않다가 이렇게 불쑥 시를 보여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숨을 거두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졌으며, 만약 아버님이 중풍이나 다른 중병으로 쓰러지신다면 내가 똥오줌을 다 받아내야 한다고 결심을 했기에 이런 시를 썼던 것입니다.
아버님. 저는 솔직히 아버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하는 슬픈 추억들이 아주 많지요. 제가 고등학교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가면서 남겨놓은 편지에 이 지하실에서 저와 선영이가 겪었던 일들을 다 쓰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아버님은 정말 왜 그렇게 자신의 아내와 두 새끼(형만은 당신의 장한 아들이었고 저와 누이는 그저 새끼였습니다)에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나쁜 언행을 일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상태로, 왜 그렇게 늘 분노에 차서 자신의 식솔을 원수 대하듯 대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제가 '앎'에 굶주려(지식에 대한 욕구라기보다는 아버님과 비슷한 인물 유형을 찾아보려는 생각이 컸습니다) 김천시립도서관에 있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오레} 같은 명작소설이나 위인전을 열심히 빌려 읽었던 중학생 시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에 충만해 있던 대학생 시절, 그리고 등단해서 시집을 몇 권 낸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지적 세계를 형성한 것은 아버님이었습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아버님의 폭력이었지요. 제가 낸 시집의 제목 중 하나가 '폭력과 광기의 나날'이란 것, 알고 계시는지요? 저는 아버님의 입에서 나오는 후회나 반성의 말을 듣고자 지금 '폭력'이란 어휘를 동원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내 잘못이 크다'는 말을 들을 소망을 1975년, 장문의 유서를 썼던 그 시점부터 20년 넘게 품어왔으나 작년 칠순 잔치가 끝나고 나서도 그런 말씀은 없으셔서 마침내 포기를 했거든요.
언젠가…… 아마도 제가 중학생 무렵이었겠지요. 아버님이 어머님과의 대화 중에 "나는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베풀 줄을 몰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당장 반박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딸 다섯 아들 하나인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의 철저한 편애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느냐, 다섯 딸이 다 굶어도 당신은 밥을 먹었던 것이 성장 환경이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주시더군요. 아버님은 대구중학교와 경찰전문대학을 나오셨지만 다른 다섯 형제는 모두 어릴 때부터 공장에 다녔으니까 어머님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진으로도 뵌 적이 없는 할아버지한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말씀을 통해 제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하셨다는 것,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했다는 것, 직업은 역전의 마부나 채소장수 같은 날품팔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너무 가난해 하나뿐인 아들 학교에 보낼 수가 없어 자신의 동생한테 보내 초·중등학교를 마치게 했다는 것, 자식이 늦장가 가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는 것 다섯 가지뿐입니다. 이 다섯 가지 속에는 제가 아버님을 용서해야만 하는 단서가 다 들어 있습니다. 부모님의 슬하를 경제적인 이유로 일찍 떠나야 했고, 정말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 할아버님 때문에 누구보다 힘들게 세파와 싸워야 했던 아버님을 떠올려 봅니다.
아버님. 중학교 시절 학생회장인가 호국단 단장인가를 하셨다지요? 아버님께서 '날렸던' 시절로 기억하고 계시는 그때, 영어를 너무 못해서 영어 시험 때면 아버님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조른 급우는 국회의원이 되어 외유를 하고, 수학은 죽어도 못하니 수학 시험 때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조른 급우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논밭을 잘 굴려 유명한 사업가가 되었는데 아버님은 말단 경찰 공무원이 되셨습니다. 산골 지서 주임. 그래서 형은 대구에서 났고, 저는 의성군 안계면에서 났고 선영이는 영천에서 태어났지요. 경위가 된 이래 10년을 계속 승진하지 않자 마지막 임지 김천에서 경찰복을 벗고 정착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구 할머님 댁으로 유학을 보낸 형의 고향은 대구가 되었고, 제 고향과 본적은 김천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사표를 낸 뒤 한 10년쯤 반공연맹에 사무장으로 재직하셨지만 일종의 명예직이라 월급이 나오지 않아 문방구점을 연 어머님께 용돈을 타 써야 했고, 그 직장도 그만두신 이후로는 문방구점의 점원이 되셔야 했습니다.
'점원'이라 표현한 이유는 역할이 사실상 그러했기 때문이지요. 어머님은 집안의 경제권(경제권은 달리 말하면 발언권일 테지요)도 쥐고 있었지만 일제시대 때의 경섬사범 출신에 2대 국회의원의 딸이었다는 자존심에다가 해방 후 서울 미동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서 경기중학교에 가장 많은 학생을 입학시킨 유능한(?) 선생이었다는 자존심이 덧보태져 있어 남편에게 말 한마디도 결코 지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격이 급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아버님과는 연일 말다툼이요, 말다툼의 끝은 두 자식 가슴 깊이 상처를 주는 파국이었지요. 단언하건대, 아버님 인생이 잘 풀려나갔더라면 저는 시인에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며, 선영이는 저런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금 제가 드린 이 말씀은, "단언하건대" 이후에 드린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이라면 결단코 용서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해온 아버지를 제가 용서하겠다는 뜻입니다. 네가 감히 나한테 용서하겠다는 말을 해? 하시면서 그 시집을 보셨을 때처럼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겠습
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죄인이며(누군가는 바로 저입니다), 그 역시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죄인입니다(누군가는 바로 아버님입니다). 제가 아버님께 절망했던 것은 지난날의 폭력 사태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딸이 당신으로 인해 고통받다가 저렇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바로 그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순종밖에 모르던 자식이, 부모가 뭐라고 하든 얼굴 한 번 찌푸린 없는 자식이 집을 네 번 뛰쳐나갔다면 무엇인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허구한 날 말대꾸를 하고 고집이 세어 매로 버릇을 고치려고 했던 딸이 중년 여인이 되도록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고 있다면 이제는 자식 앞에서 호언과 고언을 조금은 낮추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저는 아직도 아버님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나 봅니다. 지난날을 들추면서 원망을 화살을 쏘려고 시위에 힘을 주고 있습니다. 좀 전에 했던 말을 바로잡겠습니다. 아버님의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이해는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용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제 용서의 계기에 아버님 자신이 나타나 무어라 말씀하시기를 갈망하면서 세 편의 시를 썼습니다. 이 편지 다 읽어보셨으니 이제 전화를 걸어 무어라도 말씀을 해주십시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는데, 아버님과 저 사이에 허락된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아버님. 오늘이 제 생일인데, 아버님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 번도 제 생일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지요? 선물은 고사하고, 단 한 마디도 덕담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생신 전날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없으면 생신날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는 아버님을 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며느리들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베풀 줄을 몰라."
제가 바로 사랑을 베풀 줄을 모르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불효자식이지요.
아버님의 건강을 빌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서른일곱 번째 생일에
소자 승하 삼가 올림.

2004-04-14 23:38:44 / 61.100.216.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