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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여러분!

  추석이 내일모레입니다. 명절이면 가족의 의미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립니다. <NEXT>(중앙일보사)의 청탁을 받고 쓴 서간문입니다.
  여름 캠프장에서 많났던 많은 분들, 다시 보고 싶습니다.

  아내 혜윤에게

  그대와 결혼식을 올린 그 추운 겨울날이 생각납니다. 11월 29일, 첫추위치고는 제법 쌀쌀해 코트라도 입고 싶었지만 신랑양복 위에 그런 방한복을 걸친 수는 없는 노릇, 저는 이빨을 꾹 깨물고서 어서 빨리 결혼식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기나긴 혼례미사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저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대학 4년을 같이 다녔어도 그대와 저는 거리는 대단히 멀어, 딱 두 번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야학교사 선생님으로서 학과(문예창작학과) 공부는 뒷전이었던 그대와, 시대가 주는 중압감을 문학을 통해 견뎌보고자 한 저와의 거리는 일단 이념상의 거리였기에 좁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대가 들고 다니는 좌파 이론서와 근대사에 관련된 책자, 그리고 노트에 빼곡이 적혀 있는 이론학습의 결과물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저는 그래도 관심이 가는 그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했는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나이까지 한 살 많아 저를 동생 취급했으며, 저는 폐병환자로 오인될 정도로 약골이었습니다. 대학시절 내내 저는 각종 신경성 질환으로 이 약 저 약 상용하고 있던 일종의 약물중독자였지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진통제와 감기약 가운데 그 어떤 약이라도 먹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으니까요. 누이동생은 영혼의 병이 점점 심해져 제가 대학원에 진학한 해에는 병원에 아예 입원을 시켜 버렸고…….
  대학 3학년 때의 가을날이었지요. 얼굴도 모른 채 10년 동안 펜팔로 사귄 웬 서울 여학생과 첫 만남을 가진 날이 바로 이별의 날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좌절, 절망……. 저는 그해 겨울방학 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보기로, 다시 말해 대타를 구해보기로 했습니다. 고향 김천에 내려가 있으면서 그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안 보내주시더군요. 방학 시작 무렵에 편지를 보냈는데 방학이 끝나도록 말입니다. 4학년 봄학기가 시작되어 서울에 온 저는 그대에게 따져 물었지요. 편지를 받았으면 짧게라도 답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승하 씨 편지가 너무 심각해서 답장을 못하겠더라. 미안해. 차나 한잔 사줄게."
  저는 학교 앞 찻집에서 쓴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답장을 받은 셈쳐야 했습니다. 제 편지의 내용은 시종일관, 앞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관한 토로의 글이었습니다. 즉, 저의 문학관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몇 번이고 답장을 쓰려고 해보았지만 심각한 내용으로 쓴 편지에 가벼운 답장을 보낼 수 없어 썼다가 찢고 썼다가 찢고 하다가 방학을 다 보내버렸다고 했습니다.
  4학년 여름방학 때였지요. 그 여름에도 몸은 괴롭고 마음은 외로워 또 펜을 들었습니다. 고향 김천에 내려가서 쓴 편지는 우표를 2장 붙여야 할 정도로 장문이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읽은 몇 권 역사서적을 바탕으로 전개한 저의 역사의식 토로였습니다. 답장은 이번에도 방학이 끝날 때까지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답장이 와야지 제가 또 편지를 쓰고, 또 답장을 받고서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고……. 그래야 뭔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터인데 일단 받아보아야 할 답장이 종내 오지 않으니 이건 뭐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고 할까요? 저는 마지막 학기 개강을 했을 때 그대에게 따져 물었지요. 그대의 답은 지난번과 똑같았습니다. 커피 한 잔 사주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하는 그대가 참 야속하더군요. 하지만 대학시절에 저는 그대와 찻집에서 두 번, 몇 시간씩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강의실에서는 본체 만체한 '먼 그대'였던 오혜윤 씨, 그대를 말입니다.
  그렇게 두 건의 연애담은 모두 짝사랑을 하다 흐지부지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졸업식을 2개월 앞둔 시점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상식 다음날 머리를 빡빡 깎고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보충역(방위)으로 병역의무를 필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는데, 학과 교수님이 조교를 하라고 하여 흑석동 캠퍼스와 안성 캠퍼스를 오르내리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1985년 가을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박형희 군을 흑석동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나 연못시장에 국수를 사먹으러 갔지요. 졸업한 동기생에 대한 소식을 서로 전하는 과정에서 그대 이름을 형희 군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더군요. 그런데 전해진 소식은 그대가 그해를 넘기지 않고 결혼을 할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뒷날 만난 다른 친구도 그대의 결혼을 운위하더군요. 왠지 서운하고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결혼을 하는구먼. 결혼식장에 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두 주 뒤였나요. 제 근무처인 안성 캠퍼스 학과사무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승하, 나야 혜윤이. 한번 볼까 우리."
  청첩장을 우편으로 보내기가 뭐해서 직접 전해주려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그대는 "우리한테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운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1년 가까이 사귄 사람은 학교재벌의 아들로서 깍듯한 매너, 건장한 신체, 미남에다 호남……. 어느 모로 보나 한 명 신랑감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교재가 계속될수록 창백한 얼굴의 시인,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 대학원 재학생, '연애하기'를 편지로밖에 할 줄 모르는 숙맥……. 양쪽 집안 어른들의 허락은 이미 떨어졌고, 혼담이 무르익어 결혼식 날짜가 어떠니 폐물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이승하란 인간이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그대는 '그 사람을 내가 구해줘야 하지 않나?' 하며 고민하다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생이었고, 집에서는 단돈 100만원도 결혼식 비용으로 건네줄 형편이 아니었으며, 제 자신은 땡전 한푼도 없었습니다. 결혼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저는 그대의 가능성 운운을 일축하며 완강하게 거부했었습니다. 그대의 집요한(?) 회유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우리 속담 그대로였습니다. 저의 거부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 사람과는 파혼을 했으며, 저와의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말 바보같이 양가 부모의 상견례부터 결혼에 이르는 동안의 각종 연락과 예약, 준비와 실행에 있어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이 먼산 불 보듯이 하고 있었으니 그날의 결혼식 또한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던 것이지요. 동생의 발병으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에 불면증이 심해져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밤을 꼴딱 새우는 저를 보다 못해 그대는 결혼을 강행해서라도 저를 구해 주고자 했던 것이었지, 무슨 사랑이 넘쳐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대 어머니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지요. "평양감사도 제 싫다면 할 수 없다고, 네가 일년 동안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며 사귄 그 남자와 이제 와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니, 내 반대를 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승하란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말아라. 시인이라잖니. 몸은 그래 약하고. 게다가 아직 학생이고."
  어쨌거나 그대 나이 스물여덟, 제 나이 스물일곱에 우리는 흑석동 명수대성당에서 혼례미사를 올림으로써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대의 나이 어느덧 40대 중반, 새치가 하나둘 나기 시작하고 있지요. 10년이나 그대를 괴롭힌 요통이 요가로 겨우 다스려질 무렵, 사시사철 감기로 고생하던 아이는 우리의 업보가 되었지요. 생후 한 달여 만에 탈장이 되어 전신마취 수술로 소생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사시사철 감기로 고생하였고, 중이염에 비염에 농가진에……. 감기 때문에 줄기차게 복용한 항생제가 아이에게 아토피성 피부염을 선사한 것일까요? 아아, 정말 끔찍한 현대병입니다. 우리 식탁에서 일단 고기류와 튀김류와 밀가루음식이 사라졌지요. 아이로 말미암아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는 그대에게 저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어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하고 온갖 요법을 다 쓰면서 그대, 때로는 눈물을 보이고 때로는 절망하여 넋을 놓을 때, 저는 시인이랍시고 대학교수랍시고 내 일에 바빠 그대에게 소홀히 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미안하구려.
  결혼 후, 이 약 저 약 진통제를 숨겨놓고 먹다 그대에게 들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지요. 아마도 제가 약물에서 해방이 된 것은 결혼 후 5∼6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였을 것입니다. 결혼 후에도 불면증을 치료하고자 병원에도 한참을 다니고 한증요법, 전기장판요법 등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좀처럼 낫지를 않더니 아이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나아갔으니, 이 모든 것 당신 덕분이라오. 그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오.
  그대의 정성이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하였으니 우리 아이도 언젠가 저 병을 떨치고서 건강한 신체로 살아갈 수 있겠지요. 살아가는 일이 참 팍팍하지만 그대가 있어 용기를 얻었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서도 희망을 꿈꾸었소. 이 세상의 어머니는 참 강하다 하지 않소. 요즘 들어 자주 낙심하는 그대 모습을 보니 안타깝구려. 용기를 냅시다. 그대의 사랑으로 나는 결혼한 그날 이후 지금까지 행복하였소.
   ―『NEXT』(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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