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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주에서 발표된 시를 중심으로 >

         바다 건너에서도 피는 모국어의 꽃
         - 여전히 꽃은 아름답고, 별은 신비한 것처럼 시도 여전히 위대하다. -    
                                                                          
  
  이곳 미주에서도 고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학단체에서 발행되는 문예지들과 수없이 발행되는 개인의 시집을 통해서 수도 없이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있어서, 이전에 비하면 요사이는 미주에서도 사뭇 시의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같다. 이는 문학의 일반화나 대중화 등으로 다시없이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시의 가치나 전문성 등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는 우려를 낳게도 하고 있다. 시라고 하면 적어도 우리에게 무언가 조금은 특별한 것이고, 우리에게 하나의 감동이나 깨우침이나 가르침을 주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종전의 개념으로 보면, 대다수의 시들이 그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고, 더러는 가치 있는 시들까지도 저 냇가에 깔린 수도 없는 조약돌들처럼 선별되지 못한 채, 독자들의 시선에서 그대로 씻기어 가버릴 수도 있다는 점은 아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은 유독 시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고,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 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꽃은 아름다운 것이고 별빛은 신비한 것처럼, 시 역시 여전히 위대란 것이고 최상의 가치 있는 글이며, 그러한 가치를 지닌 감동적인 시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그 어떤 대상이든 그 참된 가치나 진실을 바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시에 있어서도 이를 식별해 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것은 시인이나 독자 모두가 각자 처지가 다르고, 각자가 지니고 있는 아픔이나 꿈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그러한 모든 것들과도 함께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에는 바로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언어의 비늘과도 같은 반짝거림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한 계절이나 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것도 있고. 또한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이어가는 영원을 노래한 것들도 있고, 철학적인 진리나 가르침을 통한 교훈적인 것과 순 미학적인 탐미적 세계를 밝혀주는 시들도 있는 것처럼, 현대시의 내용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해서 우리 독자들이 이를 식별해 내기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주가 흙 속에 묻혀 있어도 그 빛은 여전히 아름답고, 조화가 지천으로 깔려있어도 여전히 한 송이의 생화가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뛰어나게 좋은 시는 결코 독자의 눈에서 지나칠 리가 없고 식별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좋은 시라면 반드시 잔잔한 감동으로 시 스스로가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가치 있는 시들이 바다 건너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에 의해서 모국어로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은 고국에서보다 더욱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지난 한해 동안 발표된 시들 가운데서 이러한 시들을 골라 살펴 보기로 한다.
다음의 시는 서양 고대 서정시의 근원인 고대 디오니소스의 낭만의 리릭(Lyric. 서정시)의 숲으로 돌아가 붉게 익어가는 자연의 서정에 젖어, 자연 속의 계절의 결실과 그리고 시인의 원숙한 삶을 노래한 아름다운 서정시가 있다. 이창윤의 ‘시월의 숲이 바로 그것이다.

시월이었을 것이다
<캐나>의 혼인 잔치에서
사람이 만든 술에 다시 취하는
그 즐거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마도 시월 달이었을 것이다.

(중략)

해바라기 밭 위에서 출렁이던
<반 고흐>의 눈이 잡은 그 햇살을
캔버스에 옮겨보려다가, 온 세상을 물들이는
저 시월이 빚는 술에 나도 취하여
잠시 잠이 든 모양이다
새 몇 마리가 하늘 한 자락을 물어다
나를 덮어주고 있다
                                                          <이창윤 '시월의 숲' 『미주시인』 2006)

  시인은 사람이 만든 술을 마시고 자연과 신이 빚는 시월의 숲에 다시 취한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숲 속으로 돌아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서정시인 디튀람보스(Dithyrambos.酒神頌歌)를 읊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전적 낭만의 정경인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닮은 그는 한잔의 술을 마시고, 고흐의 해바라기와 그 햇살에 취하고, 그리고 끝내는 붉은 시월 숲의 빛깔에 취한다는 것이다.  시월의 숲, 그것은 신이 빚어내는 결실과 풍만을 상징하는 붉은 빛깔로 이를 시적 서정 의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기교가 놀랍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기계적인 케미칼 음식만을 먹고 케미칼 향기에 취해 살아갈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인류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끔 우리는 순수한 자연의 서정적 동산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빌딩의 숲과 기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도 한잔의 낭만의 술을 마시고 신이 빚어놓은 기적과도 같은 가을의 숲에 취해서 한 줄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노릇인가. 그렇다. 시인은 신의 기적으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자연의 영묘함과 은유적 세계에 젖어서 이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 몇 마리가 하늘 한 자락을 물어다가 / 나를 덮어주고 있다. '
이 얼마나 절묘한 은유의 표현인가. 이처럼 시인만이 생각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는 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꿈은, 자연에 대한 반역인 문명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무한한 안식과 평화를 느끼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의 또 다른 한 편의 서정시를 인용한 것이다.

동해안에서 자리잡은 공군 레이다 기지
바다 쪽으로 창문이 열린 의무실을 지키던 시절
수평선을 바라보며 틈틈이 시를 쓰던
나는 좀 엉뚱한 젊은 군의관
그녀는 대학을 갓 졸업한, 세상물정 어둑한 여자
공군 중위의 박봉을 믿고 따라나선
눈이 커다란 여자
바다의 아침을 한 폭의 치마로 담아오던
그 젊은 여자를
거기서는 다시 만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직도 간밤의 꿈 생각에 젖어서
오랫동안 걸을 수 있어서 좋은 곳

봄이 미리 알고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는
노스 캐롤라이나 그 바닷가에 가면
                                               (이 창윤 '바다의 층계' 일부 『해외문학』2006 )

   이 시 역시 잔잔하게 고국과 이국,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시간과 공간을 서정의 끈으로 자연스럽게 오버랩 시키고 있다. 이처럼 이 시인의 세계는 한결같이 삶의 치열함이나 날카로움이나 한 자락의 음울한 구석도 없이, 늘 평화롭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색이다.  이런 점은 그가 만들어낸 인위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의 타고난 천성적 낭만적 성품이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의 친숙한 교감을 통해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몸에 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연하고 아름다운 서정이나 낭만에 대하여, 요사이의 좀 스피디한 젊은 시인들에겐 좀 늘어진 듯한 느낌으로 좀더 치열한 느낌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서정의 정서에서 멀리 떠나와 눈앞의 현실적 관념의 세계에 지나치게 다가가 있는 시인들은 그러한 현대 물질 문명의 중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낭만과 서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는 서정 미학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고, 서사시 역시 서정이라는 미학적 표현을 어떤 형태로든 지니고 있어야 하지 이를 떠나면 시라고 하는 형태에서 멀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서정이 시의 형태나 내용적인 중심이고 이 서정의 강물은 시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시의 가장 큰 가치로 흘러갈 것이다. 다음은 역시 위의 해변목가적인 '바다의 층계'와 다름없이 그 시상이 비슷한 배정웅 시인의 서정시다.

  (전략)
안데스 산자락이 뜨문뜨문한
지구의 끝 칠례 만에서
내가 처음으로 조우한 바다 까치 떼
얼마나 오랜 세월이었을까
그것들이 남긴 둥지와 배설물들은
아슬한 해안 절벽마다
사철 눈 없는 나라의 적설로
하얀 초석광 구릉으로 응고되어 있었다.

파도와 작두 위의 무당처럼 춤추던
지진의 발소리마저 잠자는 밤에는
샴포냐 대나무가락이
내 고향 산 접동새처럼 자주자주 울었다

그런 만조의 밤
이승에서 그리움이나 외로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바다 너머 바다
오오 피안이라든지
그렇게 이름 붙여진
인간의 말과 은유들이 지구의 작은 만에서
아열대의 물안개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바다새가 되어
바다까치 떼가 되어
                                              <배정웅 '칠례만에서' 의 일부 『미주시인』 2005 >

  남미에서도 맨 남쪽 끝 남극을 향해 길게 뻗어 내려간 땅끝 칠레 만에서 병풍처럼 둘러선 해안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문득 긴 시간과 공간 속에 두고 온 고국의 까치 떼를 조우하고, 고국의 산 접동새 울음소리를 기억해 낸다.
희고 까만 까치 떼와 그들의 배설물이 백설처럼 하얗게 덮인 칠례 만의 초석광 구릉을 보고, 이제 그의 의식 속에도 오랜 세월을 두고 수없이 날아오르곤 했던 그의 꿈의 나래가 새하얀 까치 떼로 퍼덕거리며 하얀 초석광으로 변해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찾아 헤매던 생에 대한 미적 추구의 궤적이 축적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생의 아픔이 축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꿈을 찾아서 떠나온 그의 유랑의 길이 이제 고국으로부터 아득이 멀고 먼 남극에 가까운 칠레 만에서, 이제 그의 꿈은 허옇게 피어 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수많은 바다 새가 되어 피안의 세계를 향해 하늘로 비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도와 작두 위의 무당처럼 춤추던 /지진의 발소리마저 잠자는 밤에는
삼포야 대나무가락이 / 내 고향 산 접동새처럼 자주 울었다'
  작두 위의 무당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헤어나 잠시 평온을 느끼는 깊은 밤이면, 그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품속 같이 그리운 고향의 산 접동새의 슬픈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접동새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상실과 죽음과 슬픔을 상징한다. 그럼으로 접동새의 울음 소리는 모정과 고향의 상실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향수의 꿈인가. 이처럼 그는 떠나온 모성인 고국을 다시 생각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멀고 먼 이 곳 칠례 만에서, 평생을 두고 찾아 헤매는 꿈이 결국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는 이제 허연 물안개로 피어 오르는 은유로 표현되는 피안이라고 하는 영원의 시간을 향해서 그의 꿈은 하늘 위로 피어 오른다는 것이다.
  결국 시인이 끊임없는 영혼의 방랑을 통해서 추구하는 꿈의 세계는 영원과 안식이라는 고국의 까치 떼가 날아 오르고 산 접동새가 우는 고향과는 또 다른 하나의 탐미적 세계로, 그것은 어쩌면 저 피안의 세계라고 하는 영원의 세계에나 있는 꿈일런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찍이 순수한 애국이나 정의감보다는 치열한 생의 체험을 통한 생의 외로움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미적 관심에서 월남 전쟁터를 찾아간 듯싶고, 이어서 여전히 낭만과 탐미에 대한 추구로 이민을 떠났고, 볼리비아 알젠치나, 칠레, 등으로 낭만의 꿈을 찾아 가족을 이끌고 옮겨 다녔다. 결국 그는 토속적인 색다른 정서와 삶에 대한 도전과 그리고 낭만을 찾아 옮겨 다녔던 것이다. 시인은 지금 엘애이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그는 다시 어디론가 떠나갈 음모를 계속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시인이 사물을 통해서 그 사물의 존재와 가치를 밝히고, 순간에서 영원을 생각하게 하는 사색적인 그의 다른 한편의 서정시다.

아사도를 구우려고
시뻘겋게 장미 빛으로 타는
숯불더미 위에
진눈깨비 몇 점
난데 없이 뛰어 들었다
지직 지지직
그것들도 몸이 있는지
타는 냄새와 재가
개따이보꽃 지듯 어지러이 흩날렸다
찰나 같은 순간이었다
에트나 화산
그 시뻘건 용암의 자궁 속으로
엠페도클래스도
이처럼 뛰어 들었으리라
영원 같은 찰나이었으리
                                                         (배정웅 '투신'의 전문 『해외문학』 10호 2006)

한 방울의 물도 되지 못하는 몇 점의 진눈깨비가 숯불 위에 떨어져서 지지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모습 속에서 시인은 한낱 진눈깨비에 불과한 하잘것없는 존재 속에서도 엄청난 존재의 의미와 뜨거운 숯불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에서 영원이라고 하는 길고 긴 시간을 느끼고 있어서, 모든 사물이 지닌 가치와 그 존재를 영원성으로 확대 시키고 있다. 결국 아무리 작은 사물에도 우주와 같은 그들대로의 존재의 의미가 있고, 찰나 이어서 그 순간이 더욱 장엄할 수 있고 또 영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길고 긴 생도 어찌 보면 찰나에 불과 하고, 또한 찰나에 사라지는 진눈깨비처럼 단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그 시간 속에 어쩌면 우리보다 더 길고 긴 생을 사는지도 모른다는 찰나와 영원을 오고 가는 생각을 떠 올리게 하고 있다.
  이 시는 요사이 젊은 세대에 많이 쓰이고 있는 직관에 의한 인식론적인 시들에 대해 하나의 경계(境界)를 나타낼 수도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사물을 직관으로 살펴 사물 자신을 설명하는 유한성에서 이 시는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이 시는 결국 시가  '로고스 (logos)나 서술(narrative)이나 담론까지도 포함하는 역사나 사실이 아닌 우화(禹話)이고 신화(mythos)이고 독백(monologue)이어야 한다.' 는 점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시는 시의 본질 내지 특색인 비사실성과 함께 개연성(蓋然性)을 나타낸 것으로, 진눈깨비에서 향기가 난다는 것은 사실일 수는 없지만, 전혀 황당하지 않게 그럴 수도 있는 가능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는 앞서 말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론적인 시나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논리에 불과한 많은 현대 시들에 대한 하나의 경종으로 표현될 수고 있는 하나의 택스트(Text)와도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우리에게 사물의 가치와 존재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삶에 대한 존재와 가치까지도 생각해 보게 하는 많은 사색적 여운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그 한 예로 시인은 어쩌면  '저 하잘것없는 몇 점의 진눈깨비도 죽을 때는 저처럼 요란한 소리와 짙은 향기를 내는데, 그 몇 천만 배의 몸뚱이로 몇 천만 배를 사는 몸뚱이를 지닌 나는 어떤 것인가?' 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에 대한 가치를 가늠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생에 대한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 보게 하는 시리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투신’ 이라는 위의 시와 제목이 똑 같은 또 다른 장태숙 시인의 시다.

오래 바라본다
저물어가는 저수지의 하늘

(중략)

마음 자락도 휘어야 견딜 수 있는 물 가 소나무
정수리 쓸고 가는 바람의 우울한 노랫소리에
묵은 상처 닦아내고
그리움이 그리움에 젖어
건너편 때 이른 마을 불빛이 반짝인다

영혼의 가슴 풀어 헤치고
제 호흡 태우는 저 노을의 아픈 춤사위
낮은 구름에 엎드려 가만히 눈물 훔쳐내고는
발끝 팽팽이 곤두새워 내 심장 깊숙히 투신하는

맨몸의 내가,
노을 끌어안은 내가,
내 하늘과 빛과 어둠과 바람과 하나되는
온통 작약 꽃밭 같은 불길
어둔 하늘 촘촘한 별들 점등하며
                                                 (장태숙 '투신' 의 일부, 『미주문학』 2005 겨울)
  
앞서의 배정웅 시인의 투신이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와 찰나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원성을 표현한 점에 비해, 위의 장태숙 시인의 시는 죽음 이전의 현실적인 삶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뇌하다가 끝내 새로운 생명과 값진 삶을 찾아간다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다룬 시다.
저수지와 투신이라는 음울하고 날카로운 표현으로 시작된 시인의 생에 대한 아픈 추억과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고뇌하다, 이내 한 마당의 흐드러진 슬픈 노을 속 춤사위로 투신의 제전을 밝힌 다음 , 결국 죽음의 저수지가 아닌 전혀 상반된 자신의 붉은 심장의 불구덩이 속으로 투신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죽음의 저수지는 '오필리아(Opheilie)의 실망과 추락의 콤플렉스의 상징' 이고, 심장의 붉은 불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리비도(Libido)의 생명력이다.
결국 자신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에 대한 변신을 극히 체험적 율동과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여 놓은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나타낸 아름다운 서정시다.  
투신을 암시하는 저수지와 하늘빛,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암시의 마을 불빛이 저수지와 춤사위라고 하는 긴장을 통해서 죽음이 아닌 생명의 심장으로 투신하는 반전의 표현은 가히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눈물을 훔치고 춤을 추는 시인의 니힐한 춤사위가 생의 비애를 느끼게 해서 차라리 애잔하게 느껴지지만, 이는 투신이라는 새로운 삶에 대한 리비도적 뜨거운 불을 지피기 위한 준비된 제전(祭典)의 한 마당 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새로운 투신을 통해 하늘과 빛과 어둠과 바람이 하나로 되어 과거의 슬픈 기억과 고통까지도 미래의 밝은 삶에 대한 사랑과 화해로 온통 붉은 작약꽃밭이 되고, 비로소 조용히 밤 하늘의 별들에 점등한다는 대단원의 평화와 안식의 불빛으로 막이 내린다.
결국 저물어 가는 저수지의 하늘 빛으로 시작해서 붉은 노을 빛 속의 춤사위, 그리고 붉게 타는 심장과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로 되는 붉은 작약 꽃밭과 그리고 별에 점등한다는 대단원, 이렇게 온통 생명력과 그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빛의 리비도를 통해서, 어둠과 바람이라는 생의 고통과 눈물까지도 함께 끌어안고 하나로 붉게 물 들인다는 관용과 사랑의 정신이 이 시를 더욱 더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고, 공포(terror)와 연민(pity)을 불러일으키는 죽음 직전의 위기의 춤사위와, 저수지가 아닌 심장으로 반전된 투신의 절정과, 그리고 점등이라는 대단원을 하나의 단막과도 같이 극적으로 구성한 그 극적 구성기법이 뛰어나고, ' 어둔 하늘 촘촘한 별들 점등하며' 라는 표현에서  '점등' 이라는 시어는 가히 절미(節美)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단 한 마디의 언어의 적절한 선택과 조련(彫練)이 시에서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시인이 현실적 삶을 붙들고 끈질기게 고뇌하고, 실제 혼신의 춤사위를 통해 새롭고 가치 있는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일종의 생명 시 라고도 할 수 있다.

다음은 우리 주변에 늘 가까이 있는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나무를 소재로 해서 쓴 시들을 살펴보자.

곧게 뻗어나간 큰 나무가 저렇게 많이
하늘 높이 서 있는
노스 캐롤라이나에 와 보면
나는 나무를
하늘 나라에서 심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하지만 겨울날
눈보라가 몰아치고
눈 속에 뿌리 묻은 채
무엇인가 항상 기다리는 나무가 있다
                                            
사는 일은 이 모든 것,
하늘 나라에서 나무를 심었듯이
나는 무슨 나무를 심어야 할까
나무는 내가 심은 대로 자라줄텐데
                                                                           (조윤호 '나무심기' 일부 『해외문학』 2006)

  시인은 늘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손쉽고 부담 없는 꽃이나 나무를 시의 소재로 즐겨 쓴다. 또한 무겁고 어두운 어휘들을 피하고 비교적 손쉬운 우리말을 골라 의식적으로 쓰고 있어서, 얼핏 보면 동시나 동요를 읽는듯한 지나치게 부드러운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언어의 연금이나 조탁(調琢)에 힘을 기우려 온 결과이고, 거기다가 소재마저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우리 주변의 꽃이나 나무 등을 택하고 있어서이겠지만, 그의 시는 일종의 의미시라고 할 수 있듯이 그의 시속에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의문과 함께 독자들이 생각해야 할 사색적 공간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시의 특색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명제는 하나의 철학적인 가르침일 수도 있고, 더러는 정서적이고 풍자적인 쌔타이어 일 수도 있고, 생활의 담론을 통한 교훈적인 것이어서 결국 그의 시는 주제에 중심을 둔 주지적 서정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울창한 캐롤라이나의 숲에서 하늘 높이 뻗어 오른 나무를 보고, 기적과도 같은 신의 손길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나무가 펼치는 여러 계절의 모습과 그 의미를 우리 마음 속에 지니는 각자의 꿈으로 표현하여, 나무는 심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대로 자라 주는 것처럼, 우리가 소망하는 삶의 목적이나 꿈의 나무를 우리의 가슴에 지니게 되면, 그대로 자라게 되고 그래서 꿈은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삶에 대한 꿈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주제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고,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이 가슴에다 옮겨 심을 수 있는 네 계절의 나무를 열거 하고 있다. 첫째는 잎이 늘 무성하게 푸른 행복만을 상징하는 여름 나무이고, 둘째는 새싹을 틔워 여름을 준비하는 봄의 나무와, 셋째는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나무도 있고, 마지막으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겨울나무도 있는데, 시인이 바라는 바의 나무는 아마 기다림의 겨울 나무일 것이다. 그것은 겨울 나무가 추위를 이기고 새로운 봄이나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가치 있는 나무이고,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생이나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영혼의 세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시인은 사람들이 가슴에 꿈을 지니고 살기를 바라고, 독자들도 하여금 자신들의 가슴에 심어야 할 그 구체적 꿈나무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을 제시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미래의 꿈을 위해 고통을 참고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의 꿈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사색적인 교훈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역시 나무와 그 그림자를 소재로 해서 쓴 김병현의 사시나무다.

노숙자가 가로등 밑에 제 그림자를 벗어서 깐다
여름 밤이고 풍향기 가만히 있는데 사시나무로 떤다
사시나무의 밑둥과 그림자 밑둥이 ㄴ자로 침묵.
사시나무는 생(生)으로 서서 떨고 그림자는 사색(死色)으로
누워서 떤다
서로의 생사의 떨림을 주거니 받거니 교차 수혈한다
노숙자는 제 그림자의 죽음을 수혈 받아 제 죽음을
미리 떨고 그림자는 제 실체의 삶을 수혈 받아
제 죽음 같은 삶을 대신하여 떨어 준다.
삶도 죽음도 속 떨림인지 같은 파장으로 떤다
                                                                    (김병현 '사시나무' 전문, 『미주문학』2006년 여름)

사시나무와 그림자 그리고 노숙자와 그림자 사이의 죽음과 삶이 ㄴ자로 접목되어 되어 죽음과 삶이 같은 파장으로 떤다는 감각적인 표현 속에 생과 사의 구별 없이 죽음과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영생 불멸의 생이즉사(生而卽死 )의 연기의 한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숙자와 나무는 똑같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나 생이라고 하는 동질의 개념이고, 이에 상반되는 것이 바로 그림자다. 그러나 이 이원적인 삶과 죽음이 다시 서로 구분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윤회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삶과 죽음이 떨림이라고 하는 매체를 통해서 하나로 넘나드는 모습이 시인의 날카로운 사색적 앵글에 포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흐름을 관념이 아닌 하나의 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인의 깊은 철학적인 사색이 회화적으로 구상화(具象化)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구상은 여전히 나무와 노숙자와 그림자 그리고 떨림일 뿐, 그 이외의 구상은 독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이 아닌 자연적인 고요 속에 존재하는 생물적 의미의 노숙자와 나무와 그리고 그 그림자를 통해서 자연 속에 흐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붙들고 있는 시인의 사색은 더러 물리적이기도 하는 불교의 연기나 윤회의 세계를 통해서 자연 속의 생과 사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퍽 특색이 있는 사색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다음은 시의 한 대표적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달을 소재로 해서 시의 상징성 및 은유적 표현에 대한 특색을 표현한 시다.

별보다 더 높이 오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해보다 더 이상 눈 부시는 빛을 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어둠의 숲, 가지들 사이사이 틈새를 밝혀놓는 이유에 대하여
면경 같은. 이를테면 호수다 우물이다 바다다 강물이다.
오, 그 새하얀 박꽃에 내리는 이슬마다 촘촘히 살펴보는 이유에 대하여
웃는 사람보다는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찾아가는 이유에 대하여
밤새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 저기 저 두 사람
고즈넉이 감싸주는 이유에 대하여

달은 말하지 않네.                                          
                                                           (문인귀 '달의 침묵' 전문. 『미주문학』 2006 봄호)

원래 달이란 바로 시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메타포의 덩어리이어서 '두보의 달'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달은 하나의 시에 대한 택스트와도 같은 구실을 하고도 있다. 가령  ‘달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물에 빠져 죽었을까’ 하는 의문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고, 이와 달리, ‘오, 물위에서 살아서 춤추는 저 달 ! ‘ 하고 실제 물위에서 살아 흔들리는 달의 아름다움과, 그 달을 붙들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인 개연성까지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위의 시는 결국 달의 인위적인 행위에 대한 이유를 침묵이라고 하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껍질을 씌우고, 달의 미학적 가치인 사랑과 헌신과 도덕과 또 다른 갖가지의 달의 행위에 대해 달이 말하지 않는 이유를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있다. 결국 시의 대표적 특색인 상징성과 미학적 서정을 통해서 달의 모든 가치를 진정성 있게 표현한 아름다운 서정시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달의 구실이 지나치게 많이 나열되고 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점은 시의 또 다른 하나의 특색인 압축과 생략이라는 점이 부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도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조차도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가려버리면 달이 독자들에게 양파 껍질 속의 또 다른 껍질들처럼 난해의 부담을 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달의 행동이 줄기차게 열거되어 있음은 은유와 상징의 표상으로 쓰이는 달에 대한 표현으로는 조금은 적절하지 않다는 표현이다.
결국 이 시의 내용은 달이 지니고 있는 그늘과 음울의 미학적 가치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갖가지 인도적 가치와 침묵과 그늘이라는 상징과 중용의 도덕적 미학 까지도 나타내고 있는 다양한 내용을 극히 기교적이고 서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의 시 역시 같은 시인이 달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이시는 생태적인 시로서도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전략)
이제는 시커먼 선글라스
밤에도 눈동자 꽁꽁 숨기고 서 있는 그녀 곁
그 어디쯤에 서성이다 그만
시커멓게 타 없어져 버렸나

달아,
달아,
지금 너 어디에 있니.                          
                                                     (문인귀 '달달, 어디 어디에' 일부 『미주문학』 2006 여름)

여인의 이마에서도 웃음으로 떠오르고, 바다에도 하늘에도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도 뜨고, 경포대 바다 같은 곳에서는 너덧 개도 함께 떠오르던 그 달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숨어버리고, 이제 이 태백의 달은 그 어디에도 없고, 휘황한 문명의 불빛이 요란하게 눈을 가려 시인이 말하는 요샛달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도 신비하지도 않다는 이야기다.
이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의 순박했던 옛 정서와 인간성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반역으로 자연을 망치고 자연으로부터 자꾸 멀어져 가는 우리 인간들에 대한 경종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반역인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 인간의 순박한 인간성은 흐려가고 휘황찬란한 문명의 불빛에 선글라스를 낀 음모와도 같은 인간들의 어두운 면을 표현해서, 우리의 순박하고 순수한 달인 옛 달을 찾아나서는 시인의 갈망이 아름답게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우리의 삶의 모습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가치나 그 지혜나 혹은 그 교훈적인 면을 하나의 풍자(諷諮)적인 표현을 통해서 표현한 작품들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통이 두 개가 있다
밥통과 젖통이다
거스름 계산에 꿈 뜬 나는 밥통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암씨에게 밥통을 내 주었다

지금 나의 밥통은 없어지고 젖통은 가라 앉았다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다
둘 다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귀하다. 무척 귀하다
<중략>

밤마다 나는 꿈을 꾼다
밑창에 질펀한 탐욕의 찌꺼기
말짱하게 비워내는 빈 통의 꿈을    
                                                        (김영교 '밤마다 꿈꾸는 빈 통'의 일부 『미주문학 』2006 봄)

우리는 통이라고 하면 자꾸 관능적인 그리고 무언가 풍만하고 풍성하게 체워지는 느낌을 연상하게 되어, 필자 역시 이 시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 통통통...’ 하고 들려오는 음성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에 젖어 있었으나, 정작 시의 세계는 생과 사를 오고 가는 생명과 삶을 상징하는 젖통과 밥통이라는 생의 가치 있는 대상으로 그 방향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결국 시인 자신의 육체를 통한 생의 체험을 밝힌 것인데, 이러한 육체와 몸에 대한 표현은 1930년대 이상의 '육체의 계보학'에서 시작되어 모더니즘 작가들에 의해 관념과 이념으로 치장되었지만, 1970년대부터 나타난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현실 (독재와 경제)에 의해 혹사 당하고 학살 당한 현실적인 육체가 손톱 끝의 고통으로부터 죽음까지 현실적 고통으로 낱낱이 표현되는 육체의 표현으로 정점을 이루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나타난 최승호의 '대설주의보'(1982, 민음사. 1995)를 기점으로 이러한 몸뚱이를 통해서 시대와 역사를 비판하는 이성을 갖춘 육체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김수이(평론가)의 글 '몸시의 출현과 반란에 대한 기억'(서정은 진화한다. 창비간)에서   "최승호의 시에서 육체는  '몸'으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라고 표현한 것처럼 근래에는 이성과 조화된 가치 있는 육체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나타나는 육체는 죽음이나 고통이 아닌 생산을 위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는 보다 더 가치 있는 육체의 정제된 표현이며, 더욱이나 감성을 비워가는 통 속에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채워가는 이성의 통으로 표현된다. 그렇다. 비워간다는 것은 또 다른 충만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원숙한 삶의 자세와 새로운 지혜로 채워지는 정말 무거운 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시의 참된 시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를 직접 소재로 해서 자신의 또 다른 무형의 통을 채워가는 자신의 경건한 삶의 자세를 나타낸 시인이 손수 자신의 몸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입구에 장전된 안전장치의 묶인 실이 풀어지자
가슴 속 비장의 한이
시한폭탄 터지듯 펑펑 터지며
잉여의 생이 있었던 것처럼
바람을 섬김답게
바람과 동반 자폭하고 말았다
(중략)
쪼글쪼글 늙어버렸고
미래를 보여주지 못한 일회용으로 끝난 신뢰의 날개는
추락하여 만신창이로 널브러져 누웠다
배신을 증오할 것이냐 짓밟을 것이냐
땅 속에 묻혀서도 흙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족속이                                        
                                                         (윤희윤 '추락, 고무풍선' 『외지』 2006 여름)

위의 시는 고무 풍선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헛된 꿈에 부풀어 살다가 끝내는 추락하게 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극히 풍자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풍선이란 시각적인 충족이 있을 뿐 위로만 오르기를 좋아하고 바람만을 꿈처럼 섬기고 있어서 언젠가는 추락하기 마련이고, 바람이 버리고 간 그 흉한 잔상만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추락, 고무풍선’ 이란 표제 자체가 바로 이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고, 또한 추락 다음에 남는 그 초라하고 추한 모습을 통해서, 헛된 꿈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당하게 될 파경의 그 황당하고 비참한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교훈적인 풍자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나 추락해 있는 만신창이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원죄까지도 포함하는 하나의 사회악이나 또는 자연에 대한 해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흙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표현은 안간의 죄악은 죽어서도 연옥으로까지 지고가야 할 불교적인 불멸의 인괴응보의 세계를 교훈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문 바다를 바라 우두커니 서있는 등대
저것은 남근의 상징이 아닐까? 어떤 폭우에도
살아남기 화들짝 밝아졌던 불빛 흐려지면서
세상 사내들 외로운 상징으로 버티고 섰습니다.
고단하기도 하겠지요. 차라리 한 점 날카로운
벼락을 기다릴지도 몰라. 아니면 남근 까딱거리며
물개처럼 까마득히 달아나고 싶은 건지도….
(중략)

절정의 순간 울컥 뒤집히는 바다는
허망의 밑둥치를 치고 클클 달아났습니다
치명적인 세월 불끈 고쳐 잡으나 알(=egg)
노랗게 품고 지쳐가는 慾이나 情
같은 거, 密船 어느 쪽으로 들지 몰라
은밀히 몸통 세우며 전전긍긍하는
등대는 외로운 사내들의 상징입니다.        
                                                   (한헤영 '등대와 남근(男根)과의 관계' 『해외문학』 2006여름)

남성을 상징하는 남근을 외로운 밤바다를 지키고 서 있는 등대에 비유해서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들의 힘겨운 사회적 구실이나 그 고통과 외로움이나 생에 대한 고뇌하는 모습을 극히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과거의 절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차츰 여성상위 시대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 현상에서 느끼는 남성들의 특별한 고뇌와 불안한 심리를 나타낸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고, 가장이나 남편이나 아버지라고 하는 힘든 현실의 방패 구실은 여전하지만, 그들대로의 사회나 가정이나 여성에 대한 소외감이나 외로움,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남성의 사회성에 대한 몰락과 여성들의 반항과 반역에 대한 불안이 표현되고 있고, 그러한 반역의 밀선이 언제 들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나머지 남근만을 붙들고(그래도 그들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어디론가 달아나고도 싶은 도피의 유혹을 지니고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폭우에도 꺼질 듯 꺼질 듯 하면서도 기실은 살아남는 강인한 남성들의 의지의 정신 세계 뒤에는 바로 남성들의 욕과 정인 욕망과 사랑의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일종의 모성에 대한 오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남근과 등대의 유사점을 통해서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에 대한 심리적 갈등이나 외로움 등을 극히 풍자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힘들게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이나 혹은 고통스런 이민의 삶에 대한 그 어려움이나 이를 개척해 나가려는 생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시들이다.

<전략>
모래에 파묻힌 사람의 발자국
끊어질 듯 길게 이어가는 길을 보았다
깨진 유리그릇 플라스틱 컵
모래 속에 절반쯤 파묻힌 비닐 봉지
뜨거운 태양과 모래바람을 견디고
사람이 지나간 자국으로 길이 있더라

어디로 가다가 이 길 위에 머물렀을까
사막에도 길이 있더라
슬픈 역사가 흘러간 자리에
상처와 인내의 흔적으로 길이 있더라              
                                                 (기영주 '사막에 길이 있더라'『미주시인』2006 여름)

황량한 사막 위에 족적을 남기고 길을 내고 간 그 흔적을 보면서 고 사람들이 겪는 생의 고통과 그 인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밝히고 있고, 또한 이는 어쩌면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이국의 힘든 이민생활의 고통의 행적과 그 결실에 대한 미래의 꿈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바람을 이기고 사막 위에 남김 흔적에 대한 표현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이나 혹은 사막이나 다름없는 이국 땅에서의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이민자들의 힘든 삶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고, 우리는 이를 통해서 황량한 사막의 개척자나 다름없는 그들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길이 있더라 '라는 전달식의 간접 표현을 통해서 주관을 떠난 하나의 개관적인 사실로 표현함으로써 개인적인 삶의 행적이 아닌, 우리 모두의 그리고 인류 전체의 행적이나 역사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는 표현상의 기법이 돋보인다.
  또한 인간이 남기고 간 플라스틱 봉지와 유리병은 인간이 지상에 남기고 가는 역사적인 흔적으로서의 의미 보다는 인간이 자연을 망쳐가는 자연에 대한 해악과 반역을 자연 생태학적인 측면으로 떠올리게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인류 스스로가 자연 위에 남기고 있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슬픈 역사가 흘러간 자리에 / 상처와 인내의 흔적으로 길이 있더라 " 라고 하는 슬픈 역사를 이겨낸 상처의 흔적으로 길이 남아있게 되리라는 인류의 값진 승리에 대한 개척자적인 정신과 빛나는 인류의 미래의 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러한 현실의 삶이나 힘들고 외로운 이민의 삶을 민요적인 리듬으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 포근한 위안과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하는 여성 특유의 정서로 표현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있다. 바로 석정희의 '문 앞에서' 이다

나 여기 있습니다
거리의 먼지 뒤집어 쓰고
돌아온 나 여기 있습니다

기다리는 그림자
창에 비쳐 잰 걸음으로 왔습니다

떠돌던 먼 나라의 설움에
눈물 섞어 안고 나 여기 와 있습니다

어둠 속 머~언 발치서
아직 끄시지 않은 불빛을 따라
나 여기 와 있습니다                                    
                                                 (석정희 '문 앞에서' 전문 『미주시인』2006 여름)

소월의 시가 오늘날까지도 애송되고 있는 것은 그 시에 심오한 뜻이나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가장 손쉬운 우리말의 숨결과 가락이 실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시 역시 단 한 마디의 한자어도 섞이지 않은 순 우리말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고, 표현된 리듬 역시 구어체에 의한 반복 표현으로 정형시에 가까운 리듬으로 균형 있게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일상적인 손쉬운 어휘와 유연한 리듬의 숨결로 표현되고 있어서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소월의 시가 그렇듯이 이처럼 손쉬운 언어와 손쉬운 리듬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얼핏 보면 시의 내용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이와는 달리 내용은 극히 사색적이고 힘겨운 생의 고통이나 이민 생활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함께 미래의 꿈을 향해 다가가는 경건한 삶의 자세가 잘 표현되고 있다.  더욱이나 이러한 내용이 매우 사려가 깊고 단아한 한 여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여성적인 어법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어서,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적 삶의 세계가 극히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순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이 찾아가는 '머언 발치의 불빛' 이라는 시의 대상이 결국 시인이 찾아가는 생의 참된 가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구체적 대상이 한 개인의 절대적 사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찾아가는 새로운 고향일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온 생애를 두고 찾아가는 꿈의 불빛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지치고 낙담한 나머지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머금고 찾아가는 신을 향한 구원과 영혼의 불빛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란 거의 모두가 시의 내용이 단일한 대상이 아닌, 여러 형태의 의미가 은유적으로 포함된 일종의 복합적인 함축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리의 먼지 뒤집어 쓰고/ 돌아온 / 나 여기 있습니다' 의 표현에서  '돌아온' 이란 인생에 대한 회환과 달관을 표현한 점이나,  '떠돌던 먼 나라의 설움에/ 눈물 섞어 안고/ 나 여기 와 있습니다 ' 에서  '눈물 섞어 안고' 라는 절묘한 표현은 가히 시적 표현으로는 다시없이 뛰어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읽어도 실증이 나지 않는 시, 그래서 늘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 이러한 시가 결국은 좋은 시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시가 바로 시의 생명이 긴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위의 시와는 달리 힘든 현실의 삶이나 이민의 삶에 대한 의지의 세계를 보다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한 사막의 열기보다 뜨겁고 술보다 독하게 표현된 한 편의 시가 있다.

즙이 되기 위해 목말라갔을 다년초
말간 진액을 술잔에 따르며
나지막이 흐르는 바람을 듣는다
스르르 목줄기 타고 넘어가는 따가운 선인장의 일생을 마시며
살아 남기 위해 가시가 된
지독한 목마름에 취한다
(중략)
몸뚱이 잘려나가도 상처 아물면
제 몸 안에 또 다른 가시 돋을
극진한 뿌리
그 기억으로 기필코
사막 위에 너를 지으리라                                
                                           (구자애 '데낄라' 『미주문학』2006 봄)

사막은 외로운 황무지의 살벌한 땅이다. 따라서 사막에서의 지독한 목마름은 삶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고, 사막의 가시는 삶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사막의 아픔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 시인은 스스로 독한 가시가 되고, 몸이 잘려 나가는 아픔 속에서도 제 몸 안에 또 다른 가시를 키워내는 질기고 질긴 뿌리를 통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리라는 자신의 생명과 삶에 대한 굳은 결의를 나타난 일종의 생명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민의 삶의 현장인 도시의 한 복판을 차로 달리면서 시인은 사막을 생각하고, 그 사막의 열기 속에서 독하게 살아남은 선인장으로 빚은 독한 사막의 술 데낄라를 마시며, 목에 느껴지는 따가운 감촉으로 생의 아픔이나 고통을 다시 한번 느끼고,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열정으로 새로운 삶과 생에 대한 의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표현하 고 있다. 따라서 이는 사막과도 같은 이국 땅 위에 또 다른 고향을 건설하려는 이민의 빛나는 꿈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막과 선인장과 가시, 그리고 데낄라 술, 이 모두가 현실의 아픔이나 이민 생활의 고통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물을 통해서 시인이 붙들고 살아가는 현실적 삶의 아픔이나 이민의 삶의 고통이 우리 모든 이민자들에게도 삶의 아픔으로 전해오는 점이 이 시의 가치라 할 수 있고, 아울러 이러한 고통을 극복해 가려는 시인의 독하고 질긴 생존 의식이나 그 바른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적인 가치로 전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깊은 철학적 예지와도 같은 삶에 대한 하나의 교훈적이고 사색적인 명상의 세계를 나타낸 시들이다

한 손으로 어둠을 재우고
한 손으로 빛을 깨운다
일어서려는 어둠과
누우려는 빛 사이

바람이 사선으로 운다

칠월이면, 바람은
자꾸만 누이를 유혹한다                            
                                                  (안경 라 '바람' 전문 『미주문학』 2006 여름)

칠 행으로 된 세연의 짧은 시를 통해서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적 고뇌를 극히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다.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두 세계를 대비시켜, 꿈과 현실이나 욕망과 이성, 그리고 이승과 피안이랄 수도 있고, 믿음과 불신 같은 종교적일 수도 있는 일상 속의 갈등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일어서려는 어둠과 누우려는 빛은 우리 인간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 양면인 선과 악이나 이성과 감성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이원적 세계를 조정하는 것은 우리의 두 손이라고 하는 이성과 감성이다. 한 손은 욕망이나 감성 등의 어둠을 누르는 이성의 힘이고, 다른 한 손은 이성의 손으로 밝은 빛을 불러 일으키는 손이다. 그럼으로 두 손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의지적인 손이지만,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둠이나 감성의 편인 또 하나의 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현실이라고 하는 유혹의 바람이다. 물론 바람은 낭만적이고 유희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여기에서의 바람은 역시 우리를 유혹하는 교활한 사선의 바람이다.
'칠월이면 바람은 /자꾸만 누이를 유혹한다. '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내적 욕망과 현실이라는 외적인 바람이다. 이러한 어둠과 욕망의 바람은 작게는 개인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크게는 지상과 인류에게 전쟁과 살육을 몰고도 온다. 그러나  이 사선의 바람을 다스리는 것은 역시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속의 보편적인 가치와 공익과 그리고 지혜와 이성의 힘으로 바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묵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혜로운 누이는 결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봄바람이나 혹은 폭풍과도 같은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 일 수 있는 칠월의 바람을 잘 이겨낼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누이에 대한 바램일 것이다. 결국 우리 독자에게도 잠시 사색의 세계에 들어가 우리가 얼마만큼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감성이나 외부 현실 세계를 이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 역시 극히 사색적인 세계를  밤비라고 하는 소재를 통해서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전략)
잘났다 저 혼자 더 빨리 지름길 찾지 않고
손발을 합쳐 몸을 공 굴리며
미는 대로 업힌 채로, 앞 서고 뒤따르며
합하지도 못하고 뒹굴던
먼저 살마저 안고 간다.

어디도 모난 곳 없는, 어디도 감춘 맘 없는
환한 속 들여다보나니 길이 있어 가는 게 아니라
제 몸 터트려 물자리 만들며 가는구나
또륵 또르륵 맑은 제 눈물이었구나
만사 맘 길 안에 갈 길이 있었던 걸
물길 뚫고 가는 밤, 빗길이 환하다.
                                                     (강학희 '밤비' 일부 『미주문학』2006 겨울)

  어둠 속에서 내리는 밤비 소리를 들으며 물은 덕(德)이고 길이며 그 덕은 바로 만물의 도(道)라는 노자의 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를 표현한 시다. 물의 순리가 자연의 순리이고 물의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순리일 것이다.  
이러한 물의 몸짓을 통한 길 만들기는 자연과 그리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빗물이 어두운 땅 위에 스스로 길을 내고 흐르는 모습을 심안(心眼)으로 보면서, 골똘히 사색의 세계에 잠겨 빗물들이 방울방울의 서로 를 내 살처럼 끌어안고 하나로 조화되어 스스로 길을 내면서 바른길을 찾아가는 물길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생의 바른 도리이며 바른 몸짓이라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그 물길처럼 지혜로운 몸짓으로 살아가리라는 바른 생에 대한 깊은 사색적 세계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생도 물의 순리나 도를 따라서 스스로 길을 내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더욱이나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인 사색보다는 물의 근원적인 순리인 생명 사랑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나 인류평화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시인의 사색의 세계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길 뚫고 가는 밤, 빗길이 환하다.'
결국 물의 지혜로움이 내게도 있을 수 있어서 내가 속해 있는 현실세계나 다름없는 이 밤과, 그리고 빗길이 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시인의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쓰다보니 지면이 많이 초과되었다. 좋은 시들이 많으나 지면 관게로 더 싣지 못함을 양해주시리라 믿는다.

(해외 문학 11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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