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 '생일'을 입고 그는 갔는가 - 김영교
2018.01.27 06:00
'생일'을 입고 그는 갔는가 - 김영교
산호세에 여행온 서울친구와 LA 이곳서 만나기로 한 동창 약속은 무산되었다. 약속 5일 전 쓸어저 7시간 최첨단 수술도 보람없이 코마에서 못 깨어난 친구, 그녀의 시신이 서울에 옮겨졌을 때 이해인 수녀를 선두로 가슴 아파한 사람들 중 장영희가 있었다. 친구*는 장교수의 책 (김점선 삽화) 홍보대사처럼 이곳 동창들에게 보급해 온 장본인이었다. 이것이 장영희의 모든 저서가 우리 집 서가에 책 가족이 된 경로이기도 하다.
그해 나는 서울 방문중에 있었다. 신수정은 모차르트의 밤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길 건너 수정식당에서 식사후 참석하려고 김미자, 김점선, 고영자, 나, 이렇게 넷은 만났고 장영희(불참)의 저서<생일>과 <축복>을 한 권씩 받아 축하하며 밥을 먹었다. 헐렁한 흰 서쯔 위도리를 입은 점선이 헝클어진 머리로 떠들며 밥을 어찌나 많이 먹어치우는지 놀랐던 일이 어제만 같았다.
생일은 계단이다. 밟고 올라가야 하는 축복의 층계이다. 친구 장선영이가 쓴 <며느리에 주는 요리책>을 번역한 내 친구 미자가 산호세에서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화가 김점선도 암으로<점선뎐>전기를 남기고 철새처럼 훌훌 날아갔다. 그림도 좋지만 글도 참으로 좋았다. 그게 그해 3월이었다. 후학들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장영희교수의 작고 소식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너무 아깝고 너무 애석했다. 세 사람이 남긴 빈자리, 감당하기에 너무 컸다. 휘청거렸다. 그중 나이 가장 어린 장교수 순서는 아직 아니었다고 되뇌이고 되뇌었다. 영혼생일의 층계에 닿으려고 장교수는 이미 준비했던것일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문학계뿐이랴! 장영희 교수가 그의 영미 시 산책집인 <생일>이라는 책에 “진정한 생일은 지상에서 생명을 얻은 날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 1급 장애자였지만 굴하지 않고 유명한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수필가, 시인, 번역가로 활약하다가 9년간의 암투병을 마치고 그해 5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위안의 말이 적합하랴 이 마당에, 우리 인간 모두는 언젠가 <고 아무게 >가 되지 아니한가!
꽃띠 시절 서울대학 다니는 언니로 인해 장왕록교수룰 알게되었고 그에게는 늘 책을 많이 읽는 아릿다운 어린 딸이 있었다. 그 딸은 다리가 성치 않은 탓으로 외출대신 늘 집안에서 공부만 했다. 장왕록교수가 젊은 여자들의 다리를 유심히 보곤해서 오해 산적도 있었는데 다 장애인 딸은 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번역을 도운 영리한 그 딸이 바로 장영희 교수가 되었다.
이곳 LA정음사에서 북 사인회 및 피오피코 도서관 문학 세미나에 장영희후배 (23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나는 사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밝은 미소와 큰 눈빛을 맞댄 마지막 체온 나눔이었다. 그가 건네준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그녀의 육필이 생생한 색깔로 숨쉬고 있다. ‘김영교 선배님: 문학의 숲, 생명과 희망의 숲, 함께 지켜나가요.’ Love 장영희' 라고 쓰여있었다.
장교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랴. 여기 가족같은 신부님의 글을 감히 인용해본다. 유명한 칼릴 지브란의 <눈물과 미소>가 적용되는 여자, 가혹하리 만치 고통의 삶을 눈물 속에서 희망이란 꽃으로 피워올려 우리에게 넉넉하게 나누어 준 사람, 지금 그 사람을 그리는 글을 줄여 일부 소개하면서 슬픈 마음을 달래봤다.
'장교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장교수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장교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하나님 사랑 안에 있었기에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고 눈물을 미소로 바꾸는 영혼의 연금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장교수는 고통스러운 눈물의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 안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을 지니고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기 위해 애쓴 사람입니다. 장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입니다. 본인의 표현대로 장교수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나날이 기적이었다면 이제 살아갈 기적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교수에게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기적이 있겠지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단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감이며,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약한 인간 피조물은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이 얼마나 크리라는 것을 헤아려 볼 때 그 때가 바로 장교수를 배웅하는 지금이기도 하다는 감이왔다. 우리는그러기보다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만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속으로 절규하는게 우리들 인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특히 준비 되지 않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다. 현실적으로 생명질서의 법칙으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머리는 말하는데 가슴은 잘 안된다. 사랑으로 태어나는 삶이 선물인 것처럼 죽음도 또한 선물이지 않는가. 손을 마주잡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습으로는 우리곁을 떠났지만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부활을 믿는 소망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저서를 통하여 잊히지 않을 사람이기에 이렇게 우리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창조주의 배려로 하늘나라에서 생일을 마지한 장영희교수는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일계단을 이 순간도 오르고 있을 것이다.
*김미자 사대부고 11회
알베르토 자코메티 (1901~1966)
이미 1990년대 미술시장에서는 100억원대를 호가하는 블루칩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2010년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이 1158억원에,
2015년 ‘가리키는 남자’가 1575억원을 기록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작품 값이 비싼 조각이 되었다.
시장 논리에 따라 작품의 가격이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12점 중 3개를 차지하는 작가가 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국민일보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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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8.01.27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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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8.01.27 07:32
"괜찮아"장영희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네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 집 아이가 네댓은 되었으므로 그 골목에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줄잡아 열 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 안은 시끌벅적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방과 후 골목길에 아이들이 모일 때쯤이면 어머니는 대문 앞 계단에 작은 방석을 깔고 나를 거기에 앉히셨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딱히 놀이 기구가 없던 그때,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학고 놀았지만,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어떤 놀이에도 참여參與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골목 안 친구들은 나를 위해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친구들이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내게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겼다. 그뿐인가? 술래잡기를 할 때에는 한곳에 앉아 있는 내가 답답할까 봐, 내게 어디에 숨을지를 말해 주고 숨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은 골목 안에서 중앙이 아니라 구석 쪽이었지만 내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이 친구들의 놀이 무대였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나는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친구들이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그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반이 좀 일찍 끝나서 나는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깨엿 장수 아저씨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가위만 쩔렁이며 내 앞을 지나더니 다시 돌아와 내게 깨엿 두 개를 내밀었다. 순간 그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선의善意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방송사에서 오래전 학교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이 방영한 적이 있었다. 어느 유명有名한 가수가 나와서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찾았는데,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에 허리가 36인치일 정도로 뚱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잘 뛰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끼워 주지 않다고 했다. 그때 그 가수가 나서서 말했단다.
“그럼 얜 골키퍼를 하면 함께 놀 수 있잖아!”
그래서 골키퍼가 되어 친구들과 축구를 했던 그 친구는,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따뜻한 말과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괜찮아”, 나는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찡해진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상대국에게 졌을 때 관중들은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
“괜찮아! 괜찮아!”
퀴즈 프로그램에서 한 학생이 혼자 남아 문제를 풀다가 안타깝게 마지막 문제까지 풀지 못해도 응원하던 친구들이 얼싸안고 말해 준다.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참 잘했다.”라고 용기勇氣를 복돋아 주는 말, “너라면 뭐든지 다 눈감아 주겠다.”라는 용서의 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니 넌 절대 외롭지 않다.”라는 격려의 말. “지금은 아파도 슬퍼하지 마라.”라는 나눔의 말, 그리고 마음으로 일으켜 주는 부축의 말, “괜찮아.”.
참으로 신기하게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난 내 마음속의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에서 듣는 말,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를.
아! 그래서 “괜찮아.”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
*샘터사 刊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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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교
2018.01.27 06:36
척척박사님:
새해 2018년에 또 뵙게 되니 아주 좋습니다. 건강하신듯!
장교수 동영상, 넘넘 고맙습니다.
숨쉬며 눈알 반짝 저런
경청의 때가 저 한테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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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ul
2018.01.27 07:21
시인님의 글 사랑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교정에서 얼핏 뵌 것 같지만 오래전 일이고, 몇 년 전 새크라멘토 성당 도서관에서 장영희 교수님의 수필집 모두를 읽었습니다. 열심히 가르치는 동문 교수님 그리고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이라 기억합니다. 좋은 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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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8.01.28 00:22
우리가 자연에서 배우는 것 !칠십 평생을 거의 주말 마다 산행을 하면서 산의 숲 속에서 마주치는
나무나 풀꽃들, 산새들이나 작은 산짐승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익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나의 인생과 그들을 대비해
보고는 한다.
숲속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햇볕을 받으려고
자신의 키를 키워서 주위의 나무보다 햇볕을 더 받은 나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결국 고사목이 되어 도태되게 된다. 십여 년 전 강풍을
동반한 태풍에 청계산은 산사태가 나서 많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가 뽑힌 채
등산로를 가로질러 넘어져서 숲속이 엉망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넘어진 나무들은 버섯이나 벌레들의 보금자리와 먹이가 되어 결과적으로
나무가 부식되면서 땅이 비옥해져서 숲이 건강하게 자라는데 보탬이 되고 있다.
이처럼 태풍이란 시련을 통하여 뿌리가 약한 나무들이 솎아 짐으로서 튼튼하고 강한
나무들만 남아서 더 건강한 숲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이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언젠가 수명이 다하여 고목이 되면 자신의
후대에게 이 숲을 넘겨주고 자신은 고사목으로 이 숲에 비옥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풀꽃들이나 산새들도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씨앗을 맺거나 새끼를
키워서 자신의 종족을 보존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한 후에 수명이 다하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숲속의 모든 생명체는 생자필멸의 자연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자연의 순환법칙의 하나이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내가
숲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나도 자식을 낳고 또 내 자식이 자식을 나아서 나의 손자, 손녀가 있다. 그들은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의 분신들이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왔다 갔음을 증명
하는 것이 나의 후손들이다. 내가 자연에서 깨우친 것은 내 존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유전자가 계승되는 것이라는 것인데 인간 사회에는
종교를 통하여 자기의 후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영원히 살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이 종교 생활을 통하여 영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 종교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믿는 신만이 유일신이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영혼이 구원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인들과의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는 같은 종교 내에서도 분파가 생기어 서로 대립하고 심지어는 전쟁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갈등은 서로 타협이 되지 않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유발하였으며 지금도 이런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간이 죽은 후에도 다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종교를 믿게 만들고 이들 종교 간의
대립이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 인간들이 다른 생명체처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면
인간도 다른 생명체처럼 평화롭게 살다가 죽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유전자는
자식을 통하여 계승되게 될 것이다.
2018년 1 월 마지막 일요일 산행은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에 산의
계곡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모든 생명체가 추위에 움 추러드는데 까마귀 울음
소리만 “까아악” “까아악” 적막을 깨고 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 동물들의 사체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까마귀들은
자신의 본분인 청소부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는데 왜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 수 없는 것일까? (펌) -
Chuck
2018.01.28 00:35
"내 나이 아흔, 세상 떠날 날이 머지 않았지..."
올해 아흔인 홍영녀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쓴다.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일흔이 돼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까막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홍 할머니는
삐뚤삐뚤 서툰 글씨에 맞춤법조차 엉멍이지만,
20여년 동안 써 온 그의 일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세상과 이별할 날이 머지않은 그의 일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이 내 마음 누가 달래 주나"
"그 구가 이 내 마음을 달래 주나""청개구리는 무슨 사연으로
저다지 슬픈 소리로..."
"나는 쓸쓸해, 가슴이 서러워..."
오늘도 흰 머리카락 날리면서
산 마을로 너머 가시는 햇님은
어김없이 너머 가시네.
햇님 나는 나는 쓸쓸해.
가슴이 허전해. 가슴이 서러워.인새은 바다위에 떠 있는 배가 아닐까?
흘러 흘러 저 배는 어디로 가는 배냐?
앞쪽으로 타는 사람은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뒤쪽으로 타는 사람은 그 누구를 기다리네...아직 어두운데..., 햇님이 나오셨나
햇살이 고개를 들면 그는 창가로 다가가
햇님에게 인사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한 시골마을에서 300여평 남짓한 텃밭에
무, 배추, 호박, 가지, 고추 등
갖가지 농사를 지으며 사는 홍 할머니.
밭일을 하는 동안 그는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다.자식 같은 농작물을 매만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잘 들리지 않아도 TV를 켜 놓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6남매를 둔 홍 할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는 꿈쩌도 하지 않는다.그가 혼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아무도 없는 집에서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자식들이 걱정하면 그는
"그렇게 죽는 게 복" 이라고 대답하며
혼자이기를 고집한다.헌 내복을 입고 밭일하는 홍 할머니
홍 할머니는 새 내복 보다
낡디 낡은 헌 내복을 더 좋아한다.
아들, 딸, 조카들이 사다 준 새 것을 마다하고
헌 내복을 입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다 버리려고 했던 내복을 또 빨아 입었다.
낡은 내복을 입는다고 딸들은 야단이다.새 내복이 없어서 그러는게 아니다.
딸들이 사다 준 내복 조카들이 사 온 내복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쌓여있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자꾸 새것을 입어
휘질러 놓으면 뭐하나 해서다.그리고 새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헌 옷을 입어도 뿌듯하다.
나 죽은 후에 다른 없는 이들입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 싶다.르런 에미 맘을 모르고
딸년들은 낡은 못을 버리라고 야단이다.
물끄러미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홍 할머니
추수가 끝나면 홍 할머니는
싸앗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는다.
몇 년째 이 일을 반복하는 그는
혹여 내년에 자신이 심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식들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손수 지은 농작물을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홍 할머니가
1994년 8월 18일에 쓴 일기 전문이다.
내 글은 남들이 읽으려면
마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시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내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꽉 찼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글씨 한자 한자를 꿰맞춰 쓰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그때마다 자식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글 모르는게
내가 국미나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그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엉터리리로라도 쓰는 것은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자식들이나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서이 한테
숫자 쓰는걸 배웠다.
밤늦도록 공책에 써 보았고
내 힘으로 딸네 집에 전화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며 매모도 가끔한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으라 웃어댄다.
멸치는'메룻찌'로 고등어는'고동아'로
오만원은 '오마년'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딸들은 지금도 그 애기를 하며 웃는다.
그러나 따들이 웃는것은
이 에미를 흉보는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나는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구석 저구석
써놓운 글들을 숨겨 놓느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이젠 손주들이 보는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세사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나마 쓰게 되니까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벅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발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자식을 낳으면 굷더라도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홍 할머니가 닦고 또 닦았던 고무신
딱히 외출할 계획도 없는데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말린 홍 할머니
하지만 갈 곳이 없어 고무신에
다시 먼지가 쌓이고
그는 신어 보지도 않은 채
더러워진 고무신을 또 닦아 햇볕에 내 놓는다.
그는 이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뽀얗게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내 놓았다.
어디 가게 되지 않으니
신어 보지도 않고 다시 닦게 된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에
눈물짓는 홍 할머니
어린 자식이 숨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리 담긴 그의 일기는
그만의 일기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꾸역꾸역 참고 살아온
한 여인의 일기요.
우리네 어머니의 일기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모두의 일기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글이라 여러분과 함께 공감하고 싶어
올렸으니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모델..
故 장영희 교수
52/9/4 생 '75 서강대 영문과 '77 석사 '78 박사 과정 위해 유학 결심 '79/8 뉴욕주립대 '85 뉴욕 주립대 박사 '85 ~ 서강대 영문과 교수 94/7/17 장왕록 박사 사망 2001 유방암 2004 척추암 2008 간암 2009 사망 1등(?)... 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