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 · 시인론 · 신작 시조 10편에 대하여 / 홍용희
|
시인론 · 신작 시조 10편 에 대하여 · 홍용희
결곡한 절조와 서정의 심화
현대시조란 명칭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현대’란 ‘지금, 여기’의 당대성을 가리키지만 ‘시조’란 대표적인 전통적 문학 장르가 아닌가?
그래서 현대시조는 전통과 혁신, 과거와 현재의 미의식이 상호 충돌하고 교감하고 엇섞이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진행형의 양식이다.
현대시조의 미적 완성도 역시 이러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미적 균형감각을 얼마나 온전히 성취해내느냐에 있다.
물론, 이 점은 형식론과 내용가치에 걸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사정은 또한 역으로 고려 말에 발생하여 조선조에 꽃을 피운 시조가 21세기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시조가 지닌 형식 및 내용의 미적 가치와 그 저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자유시가 시사의 주류를 이룬 이후에도 시조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주지하듯, 개화기의 선각자 최남선은 개화가사, 신체시(1908) 등을 창작하며 ‘새것’과 ‘혁신’을 꾸준히 시도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오면 ‘시조부흥론’을 전면에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백팔번뇌》(1925)를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시조부흥론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개화가사와 신체시에 비할 수 없는 전통적인 시조 장르의 미학적 우월성과 더불어
개화기의 혼란과 상실 속에서 스스로 ‘조선심’으로 지칭했던 미학적 규범에 대한 향수와 갈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시조가 창작되는 배경과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
시조의 명징하고 전아한 형식미는 오늘날 자유시의 이미지와 수사의 과잉과 현란한 분식이 극심할수록 비판적 거울에 해당하는 담박한 향수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가치의 혼란과 불확정성은 시조 장르가 이상적으로 추구해온 도학적 이념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킨다.
자연의 순리를 추구하는 도학적 이념은 조선시대 5백년을 유지해온 성리학의 요체이면서 동시에 인간 삶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에 대한 성찰이며 발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이 오늘날 자유시가 시사의 주류를 이룬 상황 속에서도 시조가 지속적으로 창작되는 중심 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현대시조의 창작 원리와 의의는 당대적 생활 감각과 전통적인 미의식의 적절한 균정과 통합에 있다.
전자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자유시와의 변별성이 무화되고, 후자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폐쇄적인 복고주의의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홍성란의 시조는 일상적 생활 감각을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시조 양식의 미감으로 치환시켜 노래하는 고전적 품격을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체험적 생활 세계를 고전적인 시조 양식 속에 침전시킴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응답을 집약적으로 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
종이도 좀 떨구고 꽁초도 좀 버려줘야
공원의 청소부도 할 일은 좀 만들어 줘야
물 위로 수련이 떠올라 잠자리 날개 쉬고 있네
― 〈인다라망〉 전문
|
초장과 중장은 아주 평이한 생활 경제학을 흥미롭게 언급하고 있다.
“종이”와 “꽁초”를 버리지 않는 것이 비록 관습화된 규율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이것 역시 너무 완벽하게 지켜지면 “공원의 청소부”를 실직자로 만드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모든 개체 생명이 안으로 닫혀 있으면서도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가 있어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일상사 역시 성긴 여유의 틈이 없으면 순환과 연속과 공존의 질서를 지탱할 수 없다.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원리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에 따라 교섭하고 교통하는 “인다라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작은 생명체까지도 거대한 우주 생명의 연기설 속에서 생성되고 자기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장에서 전개되는 시상의 비약적인 전환의 내적 연속성을 읽어낼 수 있다.
평이한 세속적 일상사와 “물 위로 수련이 떠올라 잠자리 날개 쉬고 있”는 탈속적인 선경의 지점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들 모두 “인다라망”의 연기설로 이루어진 숨은 차원의 질서를 통해 전일적으로 포괄된다.
물론, 이러한 연기설은 단순히 시간적 인과관계뿐만이 아니라 공간적인 입체성과 동시성,
그리고 구체적인 상관성과 추상적인 실상론의 양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은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된다.
홍성란은 나직하고 절제된 화법으로 일상사 속에 숨어 있는 법계연기의 근원 질서를 전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시상의 전개는 자유시의 형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종장에 이르러 도심(道心)에 입각하여 시상의 전환과 갈무리의 긴장을 추구하는 시조의 전통적인 미학적 양식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조 양식이 기본적으로 세계의 존재론적인 이치를 반사시켜 주는 유효한 장치라는 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시조의 자기 결의와 발견의 언어를 통해 현대사회의 생활 감각과 정서를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사물의 본체를 선험적인 이치에서 찾았던 주리론적 세계관의 엄숙주의만으로는 세계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이해가 어렵다는 것은
성리학 자체 내의 논쟁사를 통해서도 이미 지속적으로 불거져 왔던 내용이 아닌가.
홍성란의 나직하고 절제된 화법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포용하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행로에는 자연스럽게 시형의 일탈과 파격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의 시형은 기본적으로 ‘안정된 일탈’의 양상을 보인다.
‘현대시조’에서 ‘현대’에 대한 비중이 진척되고 있으나 ‘시조’의 엄정한 응축의 절조가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창작 방법론은 함축적인 암시와 절제의 미의식을 지향한다.
그에게 드러난 언어는 드러나지 않은 언설체계에 대한 “음미”와 “변주”의 통로이며 표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 시편은 그의 창작 방법론의 특성을 시사한다.
|
독구리산 어깨쯤
정자(亭子) 하나 쉬는 데 앞 글씨 지워지고 아래아래 붉은 말씀
오가며 음미해 보네,
‘행위 금지’
그 변주.
― 〈변주〉 전문
|
시적 화자가 읽고 있는 것은 “행위 금지”가 아니라 “행위 금지”의 전반부에 지워진 “앞 글씨”들이고, “행위 금지”가 생성시키는 “변주”들이다.
“행위 금지”라는 “붉은 말씀”이 자석처럼 불러오는 드러나지 않은 상상적 언설의 자장들이 시상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래서 시적 형태는 단순하고 짧지만 환기시키는 시적 담론은 지속적으로 새롭게 생성, 확장된다. 이 점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워진 여백의 공간은 독자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동참시키면서 재창조되는 열린 마당인 것이다.
특히, 종장을 3행으로 배열함으로써 도식적 운율화를 탈피하여 의미 생산적 율동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안정 속의 일탈을 통한 시적 양식은 다음과 같은 곡진한 일상적 체험의 언어와 만나면서 주제의식의 내밀한 심화와 확산을 배가시킨다.
|
두 말 가웃 가난이 모인
아버지 낡은 가죽가방
발우 말끔 비우듯
속내 환히 들키듯
산(算) 놓고
대차 어긋나니
또 어눌한 저녁이다.
― 〈아버지〉 전문
|
시행 배열의 확장을 통해 체험적 삶의 진경을 포괄해 내고 있다.
아버지의 가난하고 피로한 삶의 풍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낡은 가죽가방”으로 표상되는 아버지의 가난은 “말끔” 비운 “발우”처럼 단순하고, “속내 환히” 들킨 것처럼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녁이 되어도 하루의 성과를 계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산(算) 놓고/대차 어긋나니/또 어눌한 저녁이다.”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산술 내역이지만, 다시 확인되면서 가난의 시름은 더욱 짙어진다.
“또 어눌한 저녁”이란 표현은 반복되어온 가난에 대한 암시와 동시에 인간적 연민을 배어 나오게 한다.
한편 다음 시편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좀 더 사실적인 서사를 통해 노래되고 있다.
|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 있다지
굵고 센 머리털에 툭, 끊기고 마는
가느단
내 빨강머리만 슬픈 게 아니었어.
깨물리는 빈 젖꼭지
아픔만 아픔 아니라
꼭지만 달린 젖꼭지나무 일없는 젖이 더 아프다고
아버지 흔들리던 그 날
내가 본 어둠별.
― 〈젖꼭지나무〉 전문
|
시적 화자는 슬픔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외부로 확산되지 않고 내면으로 응축되고 있다.
견고하게 내면화된 슬픔은 마침내 빛을 발하기에 이른다. “내가 본 어둠 별”, 그것이 “아버지”의 슬픔이다.
아버지의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도 울지 못한 슬픔이 빛의 사금파리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적 화자가 아버지의 이러한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슬픔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느단 /내 빨강머리만 슬픈 게 아니었어”란 진술은 아버지와 슬픔을 함께 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회고이다.
시적 화자의 슬픔과 아버지의 슬픔이 중첩되고 있으나 정형화된 시조의 양식은 이를 “젖꼭지나무”의 결처럼 말쑥하고 단단한 목질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시조의 장르적 특성이기도 하면서 홍성란의 천부적인 품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단정하고 명징한 시조의 미학을 예술적 체질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편 역시 슬픔이 식물적 상상력으로 노래되는 면모를 보여 준다.
|
갠 하늘 그는 가고
새파랗게 떠나버리고
깃 떨군 기슭에 입술 깨무는 산철쭉
아파도
아프다 해도
빈 둥지만 하겠니
― 〈그 새〉 전문
|
시인에게 “갠 하늘”은 너무도 광막하고 “새파랗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는 가고” 혼자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때 하늘의 새파란 빛깔의 채도는 화자의 처연한 외로움의 깊이로 해석된다. 초장의 새파란 빛깔은 중장에 이르면 붉은빛으로 변화된다.
원거리에서 근거리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하늘의 푸른 빛깔이 “산철쭉”의 붉은 빛깔로 드러난 것이다.
“입술 깨무는 산철쭉”처럼 간절한 외로움의 모습이 또 있을까. 종장에 이르면 외로움의 색채가 “빈 둥지”의 공간으로 감각화된다.
이때 “빈 둥지”는 아픔의 감각적 형상화에 해당한다.
“둥지”란 포근함과 따뜻함의 표상이지만 텅 비어 있게 되면서부터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이미지로 변형되고 만다.
아마도 초장에서 떠나간 “그”란 “두 말 가웃 가난이 모인”, “낡은 가죽가방”의 “아버지”인지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종장의 “둥지”가 가족 공동체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점과 이별의 정서가 너무도 애틋하면서도 맑고 투명하다는 점 때문이다.
홍성란이 이처럼 자신의 간절한 삶의 정서에 대해 전혀 가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감각화할 수 있는 배경은
현대시조에서 현대성과 전통성의 가파른 균정을 적절하게 견지해 내고 있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그의 시조의 정형에 대한 일탈은 “바람이 가는 쪽으로 그도 가만, 기대이는”(〈바람 부는 이유〉) 비스듬한 순응의 각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대체로 여유로우면서도 명징하게 정제된 억제발화의 미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음 시편은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볍고 경쾌하고 명랑한 어조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
흙 먹고 사는 푸나무 흙빛 어디 감췄을까
누구 따라 놀았기에 하얀 논냉이 풀솜대 노란 꽃다지 씀바귀,
무슨 솥단지 걸었기에 자운영 앵초 달개비꽃
넘치도록 한 초롱 새 물감을 길었나
동자승 흙 묻은 손등엔 무슨 꽃이 필까요
― 〈말놀이 꽃놀이〉 전문
|
제목에서부터 “놀이”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사설시조의 형식론과 내용 가치를 계승하고 있다.
평시조가 주어진 형식적 틀에 맞추어 엄격하게 음보수를 통제하는 억제발화인 데 반해,
사설시조는 거대틀만은 엄격하게 준수하고 미세틀인 음보수는 상당 정도 일탈하고 자유롭게 늘여 사설을 많이 주워 섬기고
소재들을 많이 엮어 짬으로써 텍스트 자체의 재미를 느끼도록 하는 확장발화에 해당한다.
물론 사설시조가 확장발화라 할지라도
1) 3장으로 시상을 완결해야 하고,
2) 각 장은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를 준수해야 하며,
3)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시작해야 하는 ‘억제 속의 확장발화’(김학성, 《한국고전시가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위의 시편 역시 자유시와는 확연히 변별되는 가지런한 절제의 질서를 보여준다.
다만, 중장이 2음보격으로 엮어 짜 나가면서 짧고 경쾌하게 몰아가는 율동구조가 긴장을 풀고 조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역할을 감행하고 있다.
중장으로 인해 정적인 유장함이 동적인 경쾌성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상의 전반적인 내용은 “말놀이”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홍성란 특유의 결곡한 절조와 함축적 긴장의 미감이 이완되면서 시적 흥취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의 특유의 결곡한 절조를 통해 서정의 심화를 획득하는 법고창신의 미의식이 평시조의 전통성에 뿌리를 둘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주된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에 대두된 사설시조의 성격이 현대시조가 지향하는 ‘현대성’과는 다른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설시조가 주로 조선 후기의 서민의식의 직접적 표출을 위해 추구된 평시조의 엄정성에 대한 일탈과 파격의 양식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곧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의 현대적 생활 감각과 정서의 표출 방법론에 상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에 과도기적 양식으로 등장했던 사설시조의 미의식이 오늘날 현대시조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혁신의 방법론적 시사는 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답습해야 할 전범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설시조의 양식이 오늘날 시조 창작의 중요한 거점에 해당하는,
이미지와 수사의 과잉과 정서적 밀도의 이완에 시달리는 자유시의 비판적 거울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설시조의 미적 특성은 이미 자유시의 양식 속에 포괄적으로 복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평시조의 발화억제의 엄격성에 대한 현재적 재창조를 통해 혼탁한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서
“젖꼭지나무”의 목질처럼 말쑥하고 결곡한 서정을 반사시키고 있는 홍성란의 작품들은
앞으로 현대시조가 걸어가야 할 미적 방법론의 향방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
홍용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주요 저서로 《김지하 문학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등이 있고,
젊은 평론가상·애지문학상·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2008-12-09 에 올린글임
|
|
|
|
유봉희 (2009-10-07 20:03:23)
강학희 (2008-12-09 13:58:37)
선배님, 좋은 이 글 제가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선배님 방의 좋은 글이나 음악 영상을 제가 퍼 가는데....이해해주시리라 믿으며, 대신 많이 나누고 여러분들과 함께 즐길께요. 퍼가는 흔적을 남기고 답글을 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까 싶어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혹 염치 없는 사람이 될까 걱정입니다. 제가 영상을 만들어 보아서 아는데... 알맞는 영상과 음악 선택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지 잘 알지요^^*
좋은 쏘스에 늘 감사드립니다^^* 희.
유봉희 (2008-12-09 15:13:25)
윗글을 강시인 자료실에 올렸는데
못 보셨군요
홍교수님 강의를 더 듣고 싶어하는 강시인이
생각나서 자료를 찿아 보았답니다
강학희 (2008-12-13 09:06:26)
자료실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고 살이되도록 할께요. 샬롬, 좋은 하루되시어요.
샌워킨 강가를 걸어 볼 날을 기다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