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희 서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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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한 시간의 ‘발’ 을 보는 서늘한 눈
유봉희의 〈잠간 시간의 발을 보았다〉

호병탁 (시인, 평론가)


시집 아무 곳을 펼쳐도 유봉희의 시는 모두 일정한 수준을 확보하고있다.
평론가들이 시집을 뒤적이며 빛나는 글을 찿기 위해 시력을 낭비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단언하건대 그녀의 시편에는 단 하나의 태작(拙作)이 없다.
따라서 여러 시편을 들먹거릴 일도 아니다.

한마디로 사물의 외형을 뚫고 즉시 그 본질에 육박하는 예리한 시선을 느낀다.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그것이 유발하는 인식, 그리고 시인이 낚아챈
그 인식이 지적 사유를 통해 선명한 심상으로 쏟아지고 있다.
우선 시집을 열고 있는 첫 작품을 보자

억수로 비 쏟던 엊그제 /
어느 누가 어떤 마음으로 /
이 언덕 모퉁이를 걸어갔을까요./
물 고인 발자국 안에 내려앉은 하늘 /
작은 웅덩이에 동그만 하늘 /
구름도 산드르 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숫가에서 /
그만 가던 길을 놓아 버렸습니다./

나도 일상을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
호수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붙일 곳 없는 어떤 쓸쓸한 마음에게 /
혹은 적적한 당신에게 /
작은 발자국 호수로 놓여 /
지질린 낮에 잠깐 옹크리고 앉으면 /
어쩌다가는 물방개 한 마리 건너오고 /
바람 부는 밤, 별 소나기 쏟아질 때는 /
아기별들 소근소근 놀다가 /
별바래기 하나 가만히 놓고 가는 호수./

― 「발자국 호수」 전문


시인의 서술 속도는 빠르다. 비가 쏟아지는 길을 누군가 걸어갔고
물고인 발자국이 생겼다. 하늘과 구름을 담은 그 발자국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호수’. 시인은 걸음을 멈춘다. 궁싯대지 않고
비 개인 후 물 담긴 ‘발자국’ 은 ‘작은호수’ 라는 결론을 단숨에 내리며
첫째 연을 마감한다. 그러나 있을 건 다 있다. 비가 내린 때는 “엇그제”
이며 그것도 “억수로” 로 왔다. 발자국이 찍힌 장소는 “언덕모퉁이” 다.
발자국 안에 내려앉은 하늘과 구름은 “산드르” 떠있다.
강우의 시간과 장소는 물론 그 정도가 포착되고 또한 하늘과 구름이
떠있는 형용까지 빠짐없이 그려지고 있다. 섬세한 숨결이 느껴진다.

둘째 연이자 마지막 연은 간단하다.
시인도 그런 '호수 하나 만들고싶'다는 희망사항이다.
그리고 그 호수가 어떤 호수인가를 설명할 뿐이다. 그런데
발자국이 만든 작은 그 호수에 대한 시인의 설명은 독자들의 가슴을
'마구' 흔드는 모든 요소들이 구비되어 있다. 그것은 '붙일곳 없는
어떤 쓸쓸한 마음' 과 '혹은 적적한당신' 을 위해 놓인 호수다.
짓눌린 낮시간에 웅크리고 앉아 보면 "물방개 한마리 건너오" 는 호수다.
별이 가득하고 바람 부는 밤에는 "아기별들" 이 놀다가
희망의 "별바래기 하나 가만히 놓고 가는 호수" 다.

사물의 미세한 떨림까지 포착하는 시인의 안력(眼力)은 매우 날카롭다.
그러나 찬 기운은 전혀 없다. 낮에는 물방개 한 마리가,
밤에는 작은 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그녀의 호수에서 논다.
몇시간도 안 되어서 사라지고말, 거친 사내의 발자국 하나면
뭉개지고말 그런 작은 호수다. 그곳에 든 하늘과 구름, 그곳에서 노는
별과 물방개를 시인은 따듯하고 섬세한 모국어로 보듬어 안는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가슴이 흔들린다. 감동의 파문이 이는 것이다.

위의 시에는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많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우선 비, 별, 바람, 발과 같은 시어(詩語)들은 여러 형태로 다수의 형태로
다른 시편에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는 밤 바다에도 내리고(밤비의 날개)
혜화동에도 내리며(일기예보를 듣다가) 소나기로도 쏟아진다(기울다).
"여객선 갑판 위로" 뿌려지는 감각적인 밤 바다의 '비'를 보자.

차갑고 따갑게 얼굴에 맺히는 빗방울들 /
조그만 연체동물로 손등을 기어 가는 빗방울들 /
먼 들판을 달려서 첩첩산길을 넘어왔을 그들은 /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먼 인연들인가 /
이제는 머뭇거리며 악수를 청해야 하는 인연들인가 /

- 「밤비의 날개」 부분


우리는 시인의 명징한(明澄-) 이미지에 감탄한다.
빗방울이 "조그만 연채동물로 손등을 기어" 가다니!
언어의 촉수(觸手)가 극치까지 뻗어가고 있다. 먼 들판과 첩첩산길을 넘어
온 이 빗방울들은 "악수를 청해야 하는 인연" 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녀의 언어가 투명하게 반짝이듯 이 시에서 인연으로 시인에게 다가오는
찬 빗방울들은 "무리를 지어 반짝반짝 은빛 날개를" 펴고 있다

"바람" 은 유봉희시집 곳곳에서 분다.
바람은 "우듬지 위에" 도 (하이든을 연주하는 새벽달)
"대밋벌 대나무 숲에" 도 (대나무 숲에서)
"저녁문틈" 에도 (하루살이)불고있다.
"긴 꼬리 바람 불어 별 가루" 가 날리기도하고 (긴 꼬리 바람 부는 밤)
"지게로 낙엽을 부려 놓고 가는 바람" (윙크 하는 바람)도 있다. 그리고
시인이 "시간의 발" 을 목격하게 되는 "만 년 전 소금기 먹은 바람" 이 있다.

산의 높이가 바다의 깊이로 떨어지는 이곳 /
눈 감으면 파도 소리인 듯 바람 소리인 듯 /
만 년 전 소금기 먹은 바람이 /
바위산을 휘휘 서늘하게 핥고 있는 /
산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여기에서 /
문득 걸어가는 시간의 발을 잠시 목격했다./

- 「현장은 왕복여행권을 갖었다」 부분


시집의 제목 〈잠간 시간의 발을 보았다〉는 바로 이 시에 기인한 것
임을 알 수 있고 위의 인용문은 그 "발을 잠시 목격" 하는 장소 즉
"소라와 조개껍질이" "총총히 박혀" 있는 "몇 만 년 전 바다" 였던 바위다.
그런데 "지금 개미 한 마리가 자기보다 세배나 큰 먹이를 물고" 바로
그 바위를 오르고 있다. "싱싱한 해초 사이로 물고기 떼의 운무(雲霧)" 있던
바위와, '지금 여기' 생존을 위한 개미 한 마리가 분투하고 있는 바위는
시간의 상거(相距)만 있을 뿐 같은 장소다. 하여 시인은 누구도 볼수 없는
'시간의 발' 을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존의 확인과 그에 대한
통열한 성찰이 우리를 압도하는, 이 시집에서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수평으로 활짝 펴서 천천히 물속으로 떨어지는" 고래 꼬리는
"안타까운 10초로 만나는" "몇 천년 만에 만나는 해후"(고래 꼬리)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아득한 시간의 상거(相距)와
찰라에 거하는 우리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다시 〈발자국 호수〉로 돌아가자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많은 요소들이 이 시에 함축되어 있고
이제 겨우 그 중 '비'와 '바람'에 대해서만 훑어 보고 있다.
한정된 지면은 필자를 초초하게 한다.

푸른 "별"들이 "명주 잠자리 풀 먹인 날개안에" 담겨있다.(풀치다)
태양계에서 떼어져 시인이 못내 섭섭해 하는 명왕성은
우리가 "구슬목걸이"처럼 아끼는 '별' (명왕성아)이다.
"새벽 별"은 "졸린 눈"으로 아직 "깜박"이고 (마중물)
"별똥별"은 "느낌표로 떨어진다" (별똥별이 느낌표(!)로 떨어지다)
"노란 단풍잎"이 "온 마음으로 닿고 싶은 것"은 "별빛"인가 (노란 단풍잎)
짧게 인용한 시인의 별에 대한 노래는 그야 말로 별처럼 반짝인다.

햇살이 긴 발을 내려놓는다 /
생각 많던 먹구름이 /
드디어 소나기 즉흥곡을 쏟아낸다./
몇백 광년으로 달리던 별도 /
연분홍 튤립과 반짝 눈을 맞춘다./

- 「기울다」 부분


위 시에는 '별'은 물론 '비' '발'이라는 주요 오브제가 함께 어우러진다.
시인의 명쾌한 눈은 창을 향한 튤립의 기울기가 십오 도임을 파악한다.
그것은 '간결'하지만 '간절'한 그리움으로 기울어져있다.
그 그리움에 화답하듯 햇살은 '발'을 내리고 먹구름은 '비'를 내린다.
그리고 "몇백 광년으로 달리던 별"도 "튤립과 반짝 눈을 맞춘다"
시인의 시공에 대한 스케일은 크다.
'몇만 년전 바람'을, 몇천만 년만의 해후'를 노래한다. 그러나
시인이 이에 대비하여 포착하는 사물은 물방개나 개미. 고래꼬리처럼
하찮은 것이다. 여기서도 광년이라는 엄청난 빛의 속도와 기운 한송이
튤립이 극단적로 대비되고 있다. 시인은 바로 이런 대비를 통해
작은 생명의 필연적 존재 이유와 그 가치를 역설적으로 각인 시킨다.
시는 하찮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진실을 보듬어야 할 터이고
유봉희는 이런 시인의 몫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지면이 바닥을 보이지만 고집으로라도 언급할 것이 두엇 있다.
이 시집에서는 건강한 관능과 삶에 대한 진정성의 솔직한 발화가 꿈틀댄다 "키 장대로 크고 몸피 억센 선인장"
"오늘 아침 불꽃 솟는 내 마음 받아달라고" "붉은 꽃송이 받쳐 들었다"
화자는 "저 가시투성이 팔에 잡히면 피 범벅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도 "받아줄까/잡혀줄까/함께 죽어줄까" (선인장 로미오)
아슬아슬한 황홀을 꿈꿔본다.

밤이면 "야수의 눈으로 나를 절실하게 바라"보는 이웃에게
"싱싱한 머리통과 내장을 선물 받고, 자신도 "고양이 문법"으로
그가 "기뻐할 수 있는" "감사를 표시해야 할텐데" (특별한 선물)생각도
해 본다. '고양이 문법'을 해석하자면 상당한 지면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같은 고양잇과이지만 '사자의 문법'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발자국 호수〉에는 "성큼성큼" "소근소근" 이라는 두개의 겹 부사가 있다. 이런 시어들은 체험의 직접성과 순수성을 환기시키는 효과와 함께
그 자체로 어떤 에너지가 있다. 이 시집에서도 "팡팡" "마구마구" (이사월에) "찰랑찰랑" (윙크하는 바람) "뚜벅뚜벅" (선인장 로미오)등 비유적 맥락에서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해 겹 부사어가 즐겨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정조(情調)의 지나친 진경화로 발생할 수 있는 시 품격의 흠집을
저어한다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이를 억제해야 한다.
시인은 억제했다. 두번이상 사용된 시편은 하나도 없다.
대신 머뭇거리는 의미인 "지중지중" (밤비의 날개)이라던가
아기를 업고 말하는 "둥개둥개" (단잠의 언저리)
포근함을 강조한 "포근포근" (그 밤송이)과 같은 참신한
부사어의 배치는 눈에 뛴다.

특히 '가시'집 속에, "가죽보다 질긴 겉옷"을 입고 그것도 안심이 안돼
"알몸에 각질같은 보늬" 를 입었어도 결국 삶은 밤처럼 포근포근한
'벌레의 '집'이라는 곳에서의 겹 부사어는 강한 패러독스로 작용하여
우리 자신의 앞을 살피게 한다. 이외에도
〈풀치다〉에서 별이 '푸르고' 그 '푸른' 별을 담고 있는
명주 잠자리 풀 먹인 날개도 '푸르다' 라던가 〈나비가 머문자리〉
에서 시인의 팔 위에 내려 앉은 나비 날개도 '푸르다' 라던가
〈마음 따라 눈 따라〉에서 산길 오를때의 '시퍼런 이끼와 내려 올때의
'새파란' 이끼등 미묘하게 푸른색에 반응하는 화자의 심리에 대해
또한 '덮쳐' 와 덮어, '때 DIRT' 와 '때 TIME' (고운때의 풀이)
작을 소 자와 새 발자국의 형상 (새발자국) '풀라이'와 '파리'
(파리는 파리가 되고 싶었겠어요?) 'ㅂ'두 개와 'ㅏ' 라는 양성모음으로
구성된 '밥'에 대한 언어 모형의 풀이 (밥이란 글자를 보다가) 등
언어의 지적 유희에 대해서도 시선은 한참 머문다.

이만 쓰자. 눈 감고 싶은 세상이다.
"때로는 눈 감고 세상 앞에 서라고",
"눈감고 세상을 보라고", "눈 감아 주라고"
시인의 책상 위에 놓아 둔 '눈 감고 찍힌' (정말좋은 사진)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진 한 방 박고 나도 세상에 눈 감고 싶다. -了-

- [문학 청춘, 2012, 가을호] · 호병탁 (시인, 평론가)
· 유봉희의 제3시집〈잠간 시간의 발을 보았다〉을 논함 · 2012-09-13